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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소수자와 종교

동성애자와 이성애자가 함께 어우러지는 삶의 공동체를 꿈꾸다.

by 행성인 2010. 10. 19.

- ‘차별없는 세상을 향한 기독인연대’를 이끄는 향린교회 임보라 목사 인터뷰

 

가을 햇살이 눈부신 9월 마지막 주, 명동에 위치한 향린교회로 향했다. 오전 시간 명동의 한가함이 또 낯설다. ‘차별 없는 세상을 위한 기독인연대’(이하 차세기연)를 이끄는 활동가이며, 대표적인 진보 기독교회인 향린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계신 임보라 목사님을 만나기 위해서다. 동인련과 차세기연은 최근 극우 기독교의 동성애 혐오 조장에 대응하기 위해 ‘열림’이라는 공동의 모임을 만들고 여러 활동을 함께 해오며 급격히(!) 가까워졌다. 기독교에서 가장 불편하고 불쾌한(?) 주제인 동성애를 가지고 보수 우익 기독교와 정면 승부를 택한 그녀, 이것만으로도 매우 설레는 만남이다. 발걸음이 빨라진다.





역시! 월요일의 교회는 적막하다. 북적거리는 주일이 지난 후 휴식에 들어간 월요일에도 임보라 목사님은 출근하여 여러 가지 일들을 챙기고 계셨다. 조심스레 방으로 들어서니 양쪽 벽면을 빼곡히 채운 서가와 평화단체들의 소품들, 어느 소박한 아시아 여성이 만들었을 것 같은 꾸미지 않은 색감의 테이블보, 용산 참사 투쟁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제작되었던 판화 등이 눈에 띈다. 정면에는 문익환 목사님의 초상이 걸려 있다.

 

이윽고 모닝커피 한잔씩을 앞에 놓고 대화가 시작되었다. 우리는 서로의 근황부터 나누었다. 목사님은 반차별공동행동 포럼에서 발표할 원고를 쓰고 계셨다. 어떤 내용의 발표문일지 궁금하여 간단히 설명을 부탁했다.

 

“차세기연이 요청받은 것은 기독교와 호모포비아에 대한 것이에요. ‘바성연’이나 ‘동반국’이 도대체 누구냐, 차세기연이 앞으로 어떤 대응을 해나갈 것인가, 이런 이야기들이 주가 될 거예요.”

 

요즘 연일 화제가 되고 있는 주제였다. 실제로 얼마전 개최된 성적지향과 차별을 주제로 한 반차공의 포럼에는 향린교회 강당이 꽉 찰만큼 많은 청중이 모여들었다. 어쩌면 그러한 관심만큼 임 목사님의 어깨에도 무거운 짐이 지워져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해본다. 그러니 그녀가 어떻게 이 길로 접어들었는지 궁금해진다. 그저 쉽지는 않은 길이었을 텐데.

 

‘보라’는 고난의 상징입니다.

“1987년에 한신대학교에 입학했어요. 입학식 때 보니까 보라색 휘장이 걸려있어요. 제 이름이 ‘보라’잖아요. 그 때 학장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보라색은 고난의 상징입니다. 여러분은 고난의 역사에 참여하시는 겁니다.” 이 말씀이 20년이 지났지만 잊혀지지 않아요. 그 때 교정에서 말로만 듣던 문익환 목사님을 뵈었고, 6월 항쟁을 겪으면서 학생운동을 시작했어요. 신학과 언니들이 삭발하는 모습을 보면서, 5.18의 진실을 그린 다큐멘터리를 접하면서 많은 충격을 받고 교지편집실 활동을 시작했어요. 당시 문익환 목사님이 방북을 하셨어요. 그 때 제가 다니는 교회에서 목사님이 비난의 대상이 되고 우스운 사람 취급 받는 걸 보고, 이건 아닌데 싶어서 예배 시간에 일어나 나오기도 했어요. 하지만 여길 떠나기 보다는 바꿔야 한다는 생각에, 해방신학이나 기독교교육론 등을 많이 공부했어요. 그러면서 신학공부를 해야겠다고 결심하고 신학대학원을 가기로 했죠. 그러다 기독교 문화운동을 시작했어요. 방향을 급선회해서 생명, 정의, 평화를 노래하는 노래운동을 하게 된 거예요. 같이 공부했던 분들은 제가 날라리가 된다면서 걱정했죠. 결국 교회로 가기로 결심하고, 당시 강남향린교회에서 어린이부를 맡게 되었어요. 함께 노래운동하던 사람과 결혼도 했고요. 목사 안수를 받기까지는 7년 정도 걸린 것 같아요. 고민이 많았죠. 그러다 캐나다 토론토에서 작은 이민자 교회의 일을 돕기 시작했어요. 다 쓰러져가는 교회였죠. 토론토에서의 7년은 다양한 경험을 하게 해주었어요. 그 때 처음 퀴어 축제도 경험했죠. 그러면서도 제 고민은 여전히 목사 안수를 받을 것인지에 머물러 있었어요. 사회복지사나 간호사가 되고픈 맘도 있었죠. 그 사이에 딸 둘을 토론토에서 낳고 목사안수를 받은 뒤 한국으로 돌아왔어요. 교만인지 모르지만 할 수 있는 것은 참 많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신학을 공부하고 예수를 따라 산다는 것,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르기 위해 목회자로 살아가는 것이 가장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나답게 살 수 있는 길이 목회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죠. 2003년 여름에 향린교회 부목사가 되어 지금까지 일하고 있어요.“

 

한국사회에서 진보 기독교 교회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향린교회. 민주화운동의 역사가 올곧이 새겨져 있는 이곳에서 여성 목회자로서의 삶을 시작한 그녀가 스스로에게 부여한 소명이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향린교회에 와보니까 통일운동이라는 고정된 이미지와 더불어 참 남성적인 교회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어요. 처음에는 남성교우들이 여성보다 훨씬 더 많았지요. 이런 아쉬운 점들을 바꾸어 나가기 위해 ‘여성의 눈으로 읽는 성서(이하 여성눈)’를 시작했어요. 지금 기독교에서는 한창 ‘양성평등’을 부르짖고 있어요. 저는 단지 '양성'에만 머무를 것이 아니라 ‘소수자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제 스스로 ‘여성눈’을 진행하면서 여러 발견을 해나갔고 저 자신도 돌아보게 됐어요. 그리고 지난 한 해 안식년을 지내면서 성소수자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고민하면서 스스로 많이 부딪히는 시간을 보내고 왔어요.”

 

“분명히 소수자와 여성에 우선순위를 두면서, 향린교회 목회는 그렇게 시작됐죠.”

 

"향린교회이기 때문에 여성 인권에 대해 민감하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럴 때 저는 여전히 비주류죠. 예전에 한 워크숍에서 제게 향린교회의 양성평등지수를 몇 점이나 주겠냐고 묻더군요. 저는 65점 준다고 했어요. 우리 교회 교인들이나 지도자들이 들었을 때 임보라 목사가 외부에서 이렇게 이야기한 것에 많은 불만을 가지실 거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65점이라고 한 것은, ‘이 정도면 됐지’ 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죠. 제가 여성이기 때문에 관점이 비슷하고 공감과 소통이 더 잘 되는 부분이 분명히 있을거예요.“

 

당신 목사 맞아?

이어지는 궁금증, 그녀는 왜 굳이 성소수자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려 하는 것일까? 재미있지도 않고 오히려 껄끄러운 문제, 특히 기독교에서는 논의조차 금기시 되는 ‘성소수자’의 문제를 주도적으로 고민하기위한 어떤 계기가 있었던 것일까?

 

“가장 큰 계기라고 하면 외부에서 시작된 것은 맞아요. 차별금지법 제정을 둘러싼 투쟁이었죠. 2007년 말에 결국 차별금지법 제정이 좌절되면서, 2008년 1월에 토론회를 개최했잖아요. 그 과정에서 차세기연을 준비하게 되면서 공동대표를 맡을지에 대한 얘기도 나오게 됐죠. 당시 누가 이런 직분을 맡고 입장을 발표 할 것인지 이야기할 때에는, 저 쪽(우익 기독교)에서 교수나 학자들이 나온다고 하면 우리도 그런 분들을 내세우자고 생각했는데, 이런 저런 이유로 안 되다보니 저한테 그 역할이 맡겨진 거예요. 제가 생각하기에, 저는 활동가이지, 학문적으로 이론의 토대를 제공하는 것이 어렵지 않겠냐는 생각은 들었어요. 하지만 그때 상황에서는 우선 몸으로라도 막아내면서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당시 이 일을 시작하면서, 제 주위의 성소수자와 함께했던 여러 추억들이 많이 떠올랐어요. 어느 누구나 내면에 호모포비아를 가질 수 있겠지만, 처음부터 저는 성소수자가 생경하게 느껴지지도 않았고, 목사임에도 기독교적인 잣대로 편견을 가지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하지만 무엇보다 각종 문제들과 부딪혀가면서 이런 생각들이 더욱 견고해졌지요. 2008년 초에 기독교진영이 모인 토론회에 나갔고, 그것이 보수 기독교 신문들에 보도되면서 전화를 많이 받았어요. 많이 받을 땐 하루에 7통 이상을 받았고 그게 한동안 지속되었죠. 상욕을 하며 끊는 사람들도 많았고요. 지금 기억에 남는 통화내용은 저를 설득하려고 하신 점잖은 60대 남성분과의 통화였어요. 그분의 요지는, 동성애는 출산을 전제로 하지 않은 관계라는 거죠. 자기 쾌락을 위해서 동성애를 하는 거라고요. 그런 건 성서적이지 않다고 했어요. 그래서 저는 피임은 어떻게 생각하시느냐고 되묻기도 하고 성서를 어떻게 보는지도 논쟁하다보니, 결국 합의에 이를 수 없는 지점까지 갔죠. 결국엔 당신이 목사안수를 제대로 받은 목사냐면서 화를 내고, 당신이 속한 교단은 어떻게 동성애를 옹호할 수 있냐며 호통 치는 분들도 있었죠.”

 

적대적인 관계 속에 휩싸여 있다 보면 자신감을 잃거나 위축되고 마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그럼에도 한 목소리를 내는 데에 흔들리지 않는 힘은 무엇이었을까?

 




“2008년 초에 처음 경험했지요. 이런 게 호모포비아구나! 대화나 토론으로 설득되지 않는 지점에 서게 되었고, 안식년 기간 동안 그 문제를 정리했어요. 안식년 다녀와서 뉴스엔조이와 인터뷰를 한 적이 있어요. 드라마 <인생은 아름다워>를 두고, 보수·진보·중도가 함께 만나는 자리였죠. 이제는 이메일로도 욕설이 날아 오더라구요. 이메일을 열면, 미친년, 그런 말들이 이어졌어요. 뉴스엔조이 기사에는 악성(?) 댓글이 많이 달렸죠. 처음에는 일일이 반격하려고 다 봤는데, 분노가 일어나기보다는 어찌된 일인지 내 영혼을 갉아 먹히는 느낌이었어요. 달린 댓글을 일일이 보는 것은 그때부터 하지 않았어요. 날더러 미친년이라는 메일을 볼 때는 처음엔 머리가 멍해지다가 결국 그냥 받아들여야겠다고 생각했죠.”

 

“미친년, 그거 아무것도 아니라고 웃으면서 얘기했죠.”

 

“회복의 힘은 1년 동안 몸부림치면서 만났던 사람들에게서 나왔던 것 같아요. 차세기연 활동을 하면서 성소수자 기독교인들과의 만남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지만, 당시에는 차별금지법이라는 강력한 사안이 있어서 그런지, 자연스럽게 녹아들지는 못했던 것 같아요. 그야말로 목사와 성소수자 교인의 만남이었던 거죠. 지난 안식년 동안 캐나다에서 공부했어요. 캐나다 학교에 있던 성소수자 커뮤니티, 인권위원회, 여러 교수나 학생들을 만나면서 삶에서 만나는 편안함을 느꼈어요. 함께 생활하면서 에너지를 받았다고 할까요?”

 

권사님, 동성애자도 교회 다닐 수 있잖아요?

차세기연도 지금은 성소수자 교인들의 비중이 처음보다 훨씬 높아졌다고 한다. 보다 끈끈하고 따뜻한 성소수자 기독교인들의 공동체를 형성해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에게도 매우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재 향린교회에는 성소수자 교우들이 출석하고 있다고 들었다. 물론 어디든 있을 것이다. 차마 말을 못해 그렇지. 자신의 성정체성을 밝힌 교우도 있는지 궁금했다.

 

“여성의 눈으로 읽는 성서를 몇 해째 하고 있어요. 그런 모임에서 커밍아웃을 하는 경우도 있었고 근래에는 처음부터 커밍아웃하고 시작하는 교인도 있어요. 교회에 처음 나오면 새교우 강좌를 여는데, 거기서 공개적으로 커밍아웃도 하는 거죠.”

 

다른 교인들의 반응은 어땠을까?

 

“한 친구가 교회 모임에서 커밍아웃 했어요. 동성애자가 어떤 사람인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자세히 얘기했죠. 막상 그 자리에서는 특별한 반응은 없었어요. 하지만 모임이 끝나고 나서 연세가 드신 분들은 그게 뭐냐고 묻기도 하셨죠. 제가 좀 더 이야기를 이끌어냈어야 하는데, ‘어머, 권사님, 동성애자도 교회에 다닐 수 있잖아요.’라고만 한 거죠. 그 당시에는 제가 좀 방어적이었나 봐요. 그 권사님은 ‘아니, 못 다닌다는 게 아니라......’ 라고만 하고 대화가 끝났죠. 제 스스로 더 이야기할 수 있는 여지를 차단한 거죠. 이러면 안 되는데 싶었어요.”

 

성소수자들은 교회에서 소외받기 때문에 따로 기독교인 커뮤니티를 만들어왔다. ‘로뎀나무그늘’도 그러한 기독교인 성소수자 커뮤니티 중 하나다. 향린교회는 이성애자 교인들이 다수인 교회인데도 성소수자 교인들이 굳이 이곳으로 찾아오는 원동력은 무엇일까?

 

“향린에서 커밍아웃 한 분이 몇 분 있어요. 자꾸 그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될까봐 조심스럽네요.”

 

오히려 내가 놀랐다. 교회에 다니는 성소수자 교인들이 행여나 불편하게 될까봐 신분(?)이 노출될 수 있는 구체적인 이야기를 삼가하는 목사님의 인권감수성이 매우 인상적이었다고 해야할까. 이렇게 성소수자들과 공존하기 위한 실질적인 노력을 기울이는 목회자에게 성소수자 기독교인들이 신뢰와 애정을 가지는 것은 당연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로뎀나무그늘 교회가 가지고 있는 교리는 상당히 보수적인 걸로 알고 있어요. 한 친구는 로뎀나무그늘 교회에서도 있었고 다른 곳도 가보고 안 다니기도 하다가, 촛불집회에서 향린교회 깃발을 보고 찾아왔어요. 다른 친구도 진보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는데 다른 곳에서 커밍아웃을 하니 향린교회를 소개해줘서 찾아왔고요. 어떤 분은 평생 교회를 다녔어요. 이 분은 몸으로 운동을 해오신 분이에요. 커밍아웃하고 교회에서 냉대를 받으며 이 악물고 다니셨다고 해요. 그런데 이 분이 테드 제닝스 교수의 강연회에 오셨어요. 제가 그 때 사회를 봤었고, 이 계기를 통해 우리와 연결되었어요.”

 

사탄의 무리이거나, 치유의 대상이거나.

한참 이야기를 하다보니, 문득 궁금해진다. ‘바성연’과 ‘동반국’, 그들은 누구인가? 동성애를 사탄의 무리로 규정하는 전통적인 부류가 있는가 하면, 최근에는 좀 더 세련되게 ‘치유의 대상’이라고 상냥하게(?) 이해해주시는 분들까지 생겼다. 임보라 목사님께 물어보았다. 이런 사람들과 대면하면 어떤 생각이 드시는지 말이다.

 

“토론회에서 맞닥뜨린 것 말고는 아직은 직접적인 부딪힘은 없죠. 안식년 당시 캐나다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할게요. 거기엔 아시아인 기독교인들이 많았죠. 당시 이곳에서는 무지개 축제도 했었는데요. 저는 성소수자 운동의 역사나 반호모포비아 교육을 어떻게 전개할 수 있을지에 대해 관심 있게 찾아보던 참이었어요. 그러면서 인터뷰와 설문조사도 진행하고, 나중에는 연설도 했지요. 그럴 때마다 싸늘함이 느껴져요. 제가 자꾸 동성애에 대해 얘기하니 순간 분위기가 싸늘해지더라구요. 인사를 해도 느껴지는 냉랭함이 있어요. 그게 어디서 기인하는 걸까요? 지도하는 선생님을 붙들고 몇날 며칠 울기도 했어요. 무시당하고 외면당하는 느낌 때문이었어요. 이 중에는 동성애가 사형에 처해지는 나라에서 온 친구들도 있었고, 대체로 보수적 신앙을 지닌 기독교인이어서 더욱 심했죠.”

 

“한국에서는 곧 심하게 부딪히게 되리라 생각해요. 그런 냉대와 폭력 말이에요. 차별금지법을 제정한다고 해서 지금 바성연이나 동반국이 저지르는 그런 움직임이 바로 사라지지는 않을 거예요. 우익 기독교가 가지는 위험성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본인이 사고하고 행동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는 것이 제일 위험하죠. 갈등을 조정할 때 제일 힘든 부분이 신앙과 신념이거든요. 이건 깨기 어려워요. 교육이나 성서공부를 통해서 바뀔 수 있는 한계는 암담하게도 분명하답니다. 성서를 훼손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얘기가 통하는 지점이 없죠. 한편, 복음주의권(중도성향)에서는 동성애를 차별하는 것은 아니라면서 두 가지 얘기를 해요. 하나는 동성애는 있을 수 있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치 않은 관계이기 때문에 치유해야 한다는 입장이죠. 사랑할 수 있지만 성행위는 안 된다는 어처구니없는 입장도 있어요. 이와 비슷하게, 동성애자를 정죄하지는 않겠지만 잘못된 것은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입장도 있죠.:

 

이것이 최근 힘을 얻고 있는 동성애를 치유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중도적 입장이다. 이런 접근은 오히려 동성애자들에게 더 끔찍하게 다가온다. 나는 진보적 기독교운동 내에서도 이런 주장이 얼마나 받아들여지거나 힘을 얻고 있는지 질문해 보았다.

 

“진보적 교회에서도 동성애 문제를 맞닥뜨린 적이 별로 없죠.”

 

현실을 진단해보면서 진보 기독운동이 성소수자들과 어떻게 호흡할 수 있을지도 가늠해보고 싶었지만, 그녀의 첫 마디는 건조한 느낌이 들 정도로 담담했다.

 

“접점이 없었기 때문에 정면으로 문제가 불거진 것은 없었어요. 예전에 이경씨를 통해서 들었지만 진보운동 내에서도 성소수자를 무시하고 인정하지 않는 호모포비아적인 부분이 있어요. 개인적으로 경험한 것도 있군요. 최현숙씨가 종로구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을 때였어요. 기독교운동가들은 아니지만 진보 운동 하는 사람들과 함께 지나는 중이었는데, 그들 중 일부가 종로에 걸린 최현숙 후보의 플랑카드를 보면서 ‘어머, 어떻게 저런 일이 있을 수 있어?’, ‘어머 창피한 줄을 모르나봐~’라고 말하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저것이 왜 창피한 것이냐고 물어봤더니 대답은 마찬가지죠. 진보운동 한다고 해서 인권감수성이 높다고 생각하지도 않을뿐더러 활동가들이 가진 사상이나 활동 분야에 따라 큰 차이가 있는 것 같아요. 혈통이나 하나의 민족을 강조하게 되면 상대적으로 성소수자들이나 다양한 정체성의 사람들에 대해 편견을 가지게 되더라고요. 그런 의미에서 진보 기독교 운동도 차세기연이라는 연대체에 참여하고 있다고 해서 성소수자 운동에 100%동의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차세기연 안에서도 분명 어려운 면이 있지요. 예컨대 최근에 우리가 모금을 해서 한겨레신문에 낸 광고는 동성애자 인권을 지지하는 여러 사람과 단체들 가운데 하나이니까 상대적으로 부담이 없지만, 지난 5월 조선일보에 실린 동반국 성명에 기독교인 입장에서 직접적으로 반박하는 성명서를 내는 경우에는 부담이 되니까 이름을 올리려 하지 않는 단체들도 있고요. 이런 성명은 단체가 생각하는 바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거니까, 단체들도 후원자나 운영진, 이사진 등을 생각하면 부담스러워 지는 거죠.”

 

차별에는 반대하지만 널 인정하는 건 아니야, ‘불만스런 관용’에서 벗어나기

대표적인 퀴어 신학자인 테드 제닝스 교수의 방한 강연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한 마디를 꼽자면, ‘기독교운동과 성소수자 운동이 동맹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한국 사회는 우익 기독교의 동성애혐오가 두드러지다 보니 더욱 절실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테드 제닝스가 또 한 가지 놓치지 않았던 부분은 우리 내부를 향한 것이었다. 이른바 진보라 일컬어지는 기독교인들조차 동성애에 대해 ‘불만스런 관용 내지 수용’으로 그치고 마는 것을 지적한 것이다. 이런 뼈 아픈 지적에 대해 그녀는 어떻게 생각할지 꼭 듣고 싶었다. 성소수자 기독교인들과 삶 속에서 연대를 만들어나가고 공동체로 녹아들고자 노력하는 그녀에게서 어떤 단서가 발견되지 않을까하는 기대감에서 말이다.

 


“진보 기독교 교회와의 연대와 동맹 참 중요하지요. 저는 바닥에서부터의 운동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차별금지법이 문제가 처음 대두될 때에는 NCCK(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가 연대했었죠. 그 이후 차세기연이 장기적 활동을 위해 두 번 정도 초창기 모임을 하면서 결국에는 ‘불만스런 관용’의 태도 때문에 충돌이 빚어진 거죠. 차별은 안 되지만 동성애를 인정해야 하는 건지에 대해 의견이 부딪히면서 차세기연과 분리되었거든요. 그래서 차세기연에서는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찾아가는 강좌 같은 활동을 하려고 했었던 거고요. 드러내놓고 얘기해보자, 단숨에 이뤄질 것은 아니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해 나갔죠. 물론 여전히 한계는 있어요. 그것이 불만스런 관용일 수도 있고 어쩌면 ‘무반응’인지도 모르죠.”

 

“무반응이 더 무섭잖아요.”

 

“실컷 얘기하다가 다시 제자리로 오는 경우도 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으로 문제가 터져 나왔을 때에는 이 문제를 교단이든 진보 기독교 단체든 공을 던져 놓을 필요가 있지요. 누군가 말해야 해요. 그러면 거기서부터 시작할 수 있어요. 말을 아예 안한다는 것은 관심도 없고 인정도 안한다는 뜻이죠. 이번에 우리가 낸 신문광고 활동에서 서로 힘을 얻을 수 있던 까닭은, 어쨌든 발을 뻗고 손을 뻗으면 낮은 수준이라도 동의하면서 나아갈 수 있는 실체를 본 거니까요. 우리가 늘 완전히 대척점에 선 극우 단체들에 맞서 싸우겠지만, 또 마음이 갈등 가운데 있을 때는 이렇게 희망의 길과 연대하는 사람들이 자꾸 늘어남을 우리가 보고 깨달을 수 있도록 안내하는 것도 중요한 것 같아요.”

 

삶 속에서 어우러지는 공동체를 위해 교회가 꼭 넘어서야 할 것들에 대해,

‘안 보인다 안 보인다 하지 마라, 보지 않으려 하는 것이 누구인가?

“삶 속에서 어우러지며 공동체를 이끄는 것은, 뭐랄까요...”

그녀는 잠시 뜸을 들였다가 곧 이야기를 이어갔다. 어쩌면 가장 중요할 질문이다.

 

“커밍아웃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여전히 커밍아웃에 대한 두려움을 갖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그래서 커밍아웃 하기를 여전히 두려워하는 사람을 비난할 수만은 없는 거죠. 우리 공동체 같은 경우에는 본인이 커밍아웃을 하고 관계를 맺어나가는 용기 있는 분들이 있는 한 이런 관계들을 맺기에 주저하지 않는 사람들이 계속 나타날 거라고 생각해요. 그러면서 삶 속에서 느끼는 것이 뭐겠어요? 다를 바 없다는 것 아니겠어요? 보통 우리 교회 교인들도 처음에는 ‘내 주변에는 그런 사람 없다’고만 이야기하거든요. ‘본적이 없다’고요. 모임에 동성애자가 함께 함을 알게 된 몇 분이 저에게 얘기해요. ‘어휴, 저는 이렇게 가까이 같이 있던 적은 처음이에요’라고 하죠. 그 분들의 솔직한 심정이에요. 제가 2년 전쯤 하늘뜻펴기를 하면서 주일날 설교를 했어요. ‘안 보인다 안 보인다 하지 마라. 보지 않으려 하는 것이 누구인가?’ 이렇게 물었죠. 동성애자에게 드러내지 않으니까 몰랐다고 하는 건 타인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거죠. 보려고 노력하지 않고 보여도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던 것이 바로 우리 안에 있지 않았느냐고 물었던 거죠. 스스로 보려고 하는 것은 여간해서 쉽지는 않겠지요. 동성애자를 보기 위해 노력하고 함께 살아가는 것이 어떤 것인지 깨달으려면 일종의 나눔이나 연결고리를 교회가 제공해야 하는데 한국은 그런 경험이 없어요. 예컨대, 일본에서 목사안수를 받을 때 본인이 게이나 레즈비언임을 밝힌 바가 있어요. 그 문제로 교단이 내홍을 겪으면서 결국 동성애자들이 목사 안수를 받을 수 있게 된 진보적 교단이 있죠. 한국은 어떤가요? 시도조차 할 수 없는 건 물론이고 모두가 (자신의 성정체성을) 말하지 않고 안수를 받게 되죠. 아니면 아예 공부를 하거나 외국에서 안수 받는 다른 경로를 택하죠. 어떤 이슈로 부딪힐런지는 두고봐야겠지만요. 안수 문제로 불거질지 아니면 교회 안에서 동성애자를 직접적으로 차별하는 문제가 생겨 쟁점이 붙을지 어떨지 지켜봐야죠. 언제든지 불거질 가능성이 있어요.”

 

그녀는 교회에서 또 불편해하는 문제, ‘가족주의’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갔다.

 

“한번 가족주의를 깨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그 얘기가 아주 불편했다는 후일담을 들었죠. 모든 교회에서 가족은 여전히 절대적이에요. 하지만 그것이 ‘기독교’라서 그렇다고 봐야 될지는 잘 모르겠어요. 물론 이 사회가 이성애 중심적이고 가족주의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고, 그것의 역사적 배경이 자본주의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 봐요. 기독교도 제도화되면서 맥락을 똑같이 하고 있지요. 구체적으로는 대체로 그런 부분을 인식 못하는 경우가 많아요. 작은 언행에서부터 그렇죠. 예컨대 결혼하지 않고 동거할 수도 있는 건데도, 암암리에 ‘왜 결혼을 하지 않아? 같이 살면서.’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거죠. 보통 사람들이 결혼 제도를 흔들리지 않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죠. 그렇다면 동시에 제도상의 결혼이 아닌 그 밖의 관계들에 대해서는 편견을 가지게 되는 거잖아요. 그러다보니 교회에서는 흔히 어버이 주일이다, 어린이 주일이다, 가족 단위로 움직여라, 이런 구분이 자연스러워 지는 거죠. 참 어렵죠. 하지만 이것을 넘어서지 않는 한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불만스런 관용의 끈을 끊어내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아요.”

 

많은 한계를 인식하게끔 하는 답변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희망의 끈도 발견해본다. 이제껏 이야기도 되지 않았던 것들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생겨났고, 불편할 이유도 없던 것들이 불편해졌다. 그렇게 본다면 한 발자국 전진한 것이 분명하다.

 

그대들이 있었기에.

나는 마지막 맺음말과 함께, 차세기연이 야심차게 준비하고 있는 10월 30일의 무지개 축제를 널리 알려달라고 부탁했다. 성소수자들이 준비하는 무지개 예배와 축제의 장이라니, 생각만 해도 멋지지 않은가!

 

“지금 이런 변화가 바로 그대들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는 얘기를 하고 싶어요. 되돌아보면 아픔이고 상처이죠. 그렇게 해서 죽은 사람도 있고, 타살당한 사람도 있고, 그런 아픈 역사들이 지금까지 이어졌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지금, 여러 억압의 연결고리들이 만들어내는 이 지점에 우리가 서 있다는 책임감도 있고요. 그런 것을 되뇌일 때마다 전율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이 고민하고 실천하는 사람들일 수록 비장해지기도 하죠.”

 

“당사자도 있고 아닌 사람도 있겠지만 성소수자로서의 자긍심을 갖게 되는 예배가 되면 좋겠어요. 내가 정말 하나님의 생기를 부여받은 생명체이자 창조물로서 그것을 마음껏 누릴 수 있는 예전이 지금껏 얼마나 있었을까를 되돌아봐요. 그 생기를 끌어내고 그에 대해 감사하고 새로운 마음과 몸 다지기를 할 수 있도록 예전을 짤 거예요. 무지개 상징물도 물론이고 양초 하나도 정성들여 불을 밝힐 거예요. 우리의 생기에 새로운 불을 붙여 나간다는 의미를 담을 것이랍니다. 다시 한 번 세상을 향해, 내가 없는 존재가 아니라 이렇게 존재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결의랄까요? 세상을 향한 선포랄까요? 그런 것들을 담아내려고 해요.”

 

그녀와 함께하는 차세기연 공동체의 ‘이道저道 무지개 축제’가 동성애 혐오 아래 고통받던 성소수자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에 새롭고 따스한 불 하나를 켜주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인터뷰를 마친다.

 

이경 _ 동성애자인권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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