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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 이야기/오리 꽥꽥

[오리의 인권이야기]연대하는 이유

by 행성인 2012. 9. 24.

본 칼럼은 동성애자인권연대 회원 오리가 인권오름에 연재한 글로서 오리와 인권오름의 동의를 얻어 웹진 랑에도 공동연재 합니다.


무지개깃발을 들고 찾아간다. “어디서 왔어요?” “동성애자인권연대요.” 잠시의 머뭇거림 후, 왜 여길 왔나? 하는 표정이다. 나도 뭔가 이유를 찾아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된다. 성소수자가 찾아온 이유에 답해야만 할 것 같은 압박감. 그것도 모두가 고개를 끄덕일만한 대답을 해주고 싶은 마음. 그건 어디서 오는 걸까. 


보통 대답은 “우리도 차별과 억압을 받고 있고, 당신들의 투쟁을 지지합니다. 약한 사람들끼리 뭉쳐야 이길 수 있습니다. 함께 합시다.” 정도로 끝나는 것 같다. 그렇지만 이렇게만 말하면 뭔가 안일하다는 느낌도 든다. 한때는 자본주의의 문제로 혹은 가부장제의 문제로 성소수자의 이슈가 다른 운동들과 엮여 있고 함께 해결해야 한다는 ‘논리’를 펼치려 했지만, 너무 거칠었고 내가 그걸 섬세하게 다듬을 재주는 없었다. 게다가 내가 그 ‘논리’ 때문에 투쟁현장을 찾아간 것 같지는 않다.



무지개깃발을 들고 연대하러 간 쌍용차 투쟁 그리고 강정마을(출처: 동성애자인권연대)



공통된 경험에 대해 생각을 한다. 성소수자 이슈의 현장에 내가 있을 때는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요구받지도 않는다. 그것은 나의 경험이기도 하고, 내가 받는 차별이기도 하니까. 혐오의 시선들, 나를 보이지 않는 것처럼 다루는 사람들, 설명하지 못하는 억울함, 대놓고 무시하는 세상에 대한 분노, 나를 드러내면 싫어하거나 동정하며 마무리되는 상황들, 이걸 바꾸고자 하는 힘…. 아마 이런 것들이 공유되고 있기 때문일 거 같다. 


그런데 성소수자가 ‘다른’ 투쟁에 찾아갈 때에도 마찬가지이지 않을까. 내가 동성애자여서 운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동성애자이기에 받은 차별로 운동을 하는 것처럼, 나는 그들이 받는 차별에 공감하고 함께하고 싶은 게 아닐까.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말을 속에만 담아두고 자기 탓만 했던 이야기를 들으면 내 청소년 시절과 겹쳐져 눈물이 난다. 어쩌면 어느 정도는 내 문제처럼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


그리고 실제로 내 문제이기도 하다. 나는 노동자이기도 하고, 군대 없는 평화를 바라기도 하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장애인으로 살아가거나, 여성으로 살아간다. 


그럼에도 내가 성소수자라는 이름을 쓰면서 연대하러 가는 건, 동성애자인 나로서 인정받고 싶은 거 같다. 나와 같은 경험을 공유하는 당신들이라면 내 이야기를 더 들어주지 않을까. 불쌍히 여기지 않으면서 함께 싸울 수 있게 되지 않을까. 그리고 그렇게 된다면 그건 정말 신나는 일이다.



* 아래는 연대하러 가서 했던 우리의 발언들입니다. 


<4월 초 방문한 제주 강정마을에서 오리의 발언>

그래도 찾아왔어요. 목소리를 내지 않으면 여기 있어도 없는 게 되고, 우리를 향한 편견과 차별이 바뀌지 않으니까요. 평화를 이야기하지 않으면 아무도 그냥 지켜주지 않으니까요.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이 없는, 전쟁과 군대 없이 평화로운 세상을 위해서 우리 모두가 함께 싸우는 세상을 꿈꾸면서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연대하겠습니다.


<4.20 장애인차별철폐투쟁문화제에서 병권의 발언>

성소수자와 장애인이 같이 싸워야 할 이유는 아주 많습니다. 우리는 차별과 낙인을 끊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같이 꿈꾸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우리는 같이 싸워야 합니다. 우리는 존재로서 대우를 받아야 합니다. 우리의 조건과 형태에 맞도록 제도와 법적인 보장이 만들어져야 합니다. 교육과 노동, 주거, 의료 등 사회적인 시스템에 우리에게 맞도록 갖춰져야 합니다. 이런 이야기는 어찌 보면 먼 이야기일 것 같지만, 우리가 이렇게 거리로 나오고 투쟁한다면 쟁취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7월 21일 정리해고・비정규직・국가폭력 없는 세상을 위한 범국민 공동행동에서 달꿈과 형태의 발언>

스물둘, 그것은 단순한 숫자가 아니었습니다. 성소수자들도 이름 없는 그리고 얼굴 없는 죽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한국 사회에서 성소수자들에 대한 편견과 혐오가 적지 않은 성소수자들을 죽음으로 내몹니다. 죽어서도 함부로 얼굴을 보일 수 없고 함부로 이름을 밝힐 수도 없습니다. …… 그렇기 때문에 “어디에나 우리들이 있다. 여기 노동자가 있다. 더 이상 죽이지 말라.” 이 말처럼 “노동환경 안에 성소수자가 있다. 더 이상 존재를 부정하지 말라.” 이렇게 말하는 것이 다르지 않은 투쟁이라고 생각합니다. 노동자의 권리를 노동자의 권리로, 성소수자의 권리를 성소수자의 권리로, 평등하게 대하는 세상을 희망합니다. 평등한 사랑, 평등한 노동을 위한 세상을 위해 함께 웃으면서 끝까지 투쟁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