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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문화읽기

잔인한 일상, 극단의 가벼움

by 행성인 2008. 10. 30.
> 동성애자인권연대 웹진 '너, 나, 우리 랑' 10월 호    

 

'침묵은 분노의 가장 효과적인 표현이다.'

                                               -칼릴 지브란





‘안’과 ‘최’ 이후, 연예계에 종사하는 혹은 준비하는 이들의 비보들. 그리고 주변 친구들의 슬픈 소식들. 지금의 웬만한 우리나라 사람들이라면 얼마 전까지 내 앞의 일은 아니리라 생각했던 문제를 받아들이는 자세가 조금은 달라졌을지도 모르겠다.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다보면 유난히 올해는 떠나는 이들이 너무 많아 이젠 충격도 예전 같지 않다는 말을 종종 듣는다. 하지만 상황은 좀더 비극적이다. 하루가 무섭게 많은 이들이 세상에 작별을 고한다. 그야말로 극단의 선택이자 영원한 망각으로 향하는 찰나의 순간은 우리에게 일상의 선택 정도로 가벼워진 것이다.



  극단의 선택을 부추기는 상황들


에밀 뒤르켐의 저서 『자살론』의 일관된 논조처럼, 자살은 혼자만의 선택이 아니다. 비슷한 맥락에서 영화 <타인의 삶>은 자살이라는 사회현상을 통해, 통일 직전 동독의 모습을 그려낸다. 어디에도 숨쉴 틈을 열어두지 않는 그곳은 체제에 대한 어떠한 비판과 표현의 여지도 허용하지 않는다. 치밀한 감시는 살아가는 데 있어 필요한 선택 자체를 몰수한다. 오로지 그들 자신의 올곧은 의지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일 뿐, 그럼에도 지배이데올로기의 존속을 위해 자살율은 철저하게 은폐된다.


양상은 조금 다르지만 숨 막히는 상황은 경기침체와 카드빚, 취업난과 등록금에 허리가 휘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살고 있는 우리들의 현실로 연장되어 반복된다. 한국사회에서 생계형 자살은 통계의 상당수를 차지한다. 주변에는 무력한 사람들로 넘쳐나고, 도대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자문하고 나면 무엇보다 막막함이 뒤따른다. 반농담조로 ‘현 정권 덕에 운동판이 커졌다.’고 이야기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만큼의 지배에 반작용으로 일어난 일시적인 현상이라는 속성 또한 부인할 수 없기에 무작정 고무되어 반기기만 할 일은 아닌 것 같다.

  이데올로기와 가난이 물심양면으로 우리 삶을 짓누른다. 여기서 극단의 선택은 무거운 삶을 견디지 못하는 이들의 영원한 침묵을 의미한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침묵의 선택이 너무도 흔해졌다. 그리고 생계비관과는 무관한 예가 수두룩해졌다. 자살의 선택에 대응될만한 중압적인 원인을 찾아내기 어려워진 상황에서 여전히 무거운 삶과는 달리, 주위의 죽음들은 어딘지 가볍게 취급된다. 일시적인 충격만 주고 쉽게 망각되어버리는 극단의 가벼움, 무엇이 극단의 선택을 가볍게 한 것일까.


출처 없는 ‘말’들은 진공상태의 공간을 돌아다닌다. 근거 없는 이야기들은 불시의 순간에도 여지없이 달려들어 삶의 무게를 갉아먹는다. 이 시대에 난무하는 소문과 편견들 속에서 고립과 소외는 훨씬 쉬워진 듯하다. 악플이 사람도 잡는다고 했던가. 하지만 가벼워진 세상에서의 극단적 선택이 개개인의 양심 탓으로만 돌려질 문제는 아님에 틀림없다. 언론과 방송에 정치까지 합세하고 나면서 상황은 돌이킬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영화보다 잔인하리만치 가벼운 현실


이렇게 우리의 현실은 세기말을 보여주는 영화 속 상황보다 심각하다. 죽음이 은폐되던 영화의 배경과 달리 우리사회에서 자살은 가늠하기 벅찰 만큼 흔하게 노출되어 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누군가의 사고 소식들이 곳곳에서 터진다. 심지어는 뉴스와 연예 프로그램, 파다한 사이트의 리플들이 일시에 그것을 부추기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더 이상 우리는 단지 소식을 듣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으레 생각하듯 소문을 만들고 루머를 옮기는 것은 이차적인 행위에 불과하다. TV가 보여주는 현장은 나와 아무 상관없는 이의 죽음을 내 곁에 나란히 놓는가 하면, 그걸 보는 사람들은 이모티콘 리본을 달아주고는 망자의 이야기를 거리낌 없이 밥반찬과 술안주로 꺼내놓고, 관련된 이들의 치부를 검색순위에 떡하니 올려놓는다. 경우에 따라서 그들의 죽음은 제2, 제3의 사건들로 재현된다. 유행병처럼 번지는 자살, 그보다 조금 느리긴 하지만 최근에 한국에도 나타나는 묻지마 식의 범죄들. 어김없이 사건현장의 감흥 없는 긴박감을 전달하듯 파닥거리는 카메라 플래시들.


‘최’를 하늘에 뿌린 지 일주일 남짓 지나자 미리 준비라도 한 듯 곧바로 특별다큐가 나오고 출연작들이 방송되고 있다. 방송 뿐 아니라 이제는 고인의 이름을 법조항에 떡하니 명시해놓고 네티즌들의 숨통을 쥐게 될지도 모를 상황이다. ‘남편의 죽음으로 10억이 생기’고, ‘죽음으로 장사하지 않겠다.’는 광고가 횡행하는 사회. 지금의 사회는 죽음까지도 장삿속으로 끌어들이는 건 아닌지.



  여지없이 극단의 선택에 사로잡히는 소수의 존재


죽음들이 보란 듯이 공개되어 의미가 퇴색해버린 현실은 지금 우리 사회 성소수자들의 입지와 오버랩 된다. 방송을 타고 어느 정도 향유 가능한 위치에까지 올라온 듯 보이지만 성소수자의 입지는 구조적인 변화에 앞서 기호식품처럼 소비되어진다. 커밍아웃도 하나의 엔터테이먼트가 됨으로써 온갖 잡색의 리얼리티 쇼들로 버무려지게 될지도 모를 상황- 아직 보수적인 이 나라에서는 상상만 가능한 일이겠지만. 친교모임 내에서 화려한 끼의 향연을 벌이다가도 주변인들에게 아웃팅 당하거나 좁은 커뮤니티 안팎에서 출처 모를 소문의 주인공이라도 되었을 때면 그야말로 깊은 침묵을 강제적으로 ‘선택’해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현실은 극단과 가벼움을 아무렇지 않게 섞어버린다.


우리의 삶과 죽음이 소비되는 것. 이에 대해 시비를 따지거나 오랫동안 망인에 대한 기억을 간직했던 옛날로 돌아가자는 주장을 하겠다는 건 아니다. 외려 긴 시간동안 슬픈 감정을 가져가면서 망인의 흔적을 되새기는 것 자체가 지금의 사회에는 쉽지 않은 일이다. 깊은 상념에 잠겨있기에는 사방으로 정신을 팔아야할 걱정들이 태산이다. 일시적인 충격효과에 그칠 만큼 주위에는 죽음이 산재하고, 또 쉽게 증발되어버린다. 쏟아지는 사건들에 인이 배겨 얼마만큼의 내성이 생긴 덕에 이를 받아들이는 데 있어 익숙해진 것일까. 어쩌면 우리는 단단히 마음먹는 것에 익숙해져 모든 것에 무뎌지도록 내버려진 세상에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수많은 말들이 방전하는 이 사회에서 침묵은 자신을 지켜내기에 힘이 부친다. 동시에 사방에서 명멸하는 아우성 속에 정말로 필요한 요구들이 묻히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염려도 든다. 의미가 표백되어버린 사회에서 우리는 뻔뻔한 속물이 되어가는 건 아닌지. 공중을 휘젓는 옅은 전파의 울림에도 파르르 떨리는 가느다란 안테나를 달고 있는 이들의 극단적 선택은 언제부턴가 잘못 달려오고 있는 사회의 징조를 보여준다. 대개 과녁은 소수자나 사회적응에 어려움을 겪는 이들로 설정된다. 존재의 가벼움은 계속되어온 차별구조로부터 괴리되지 않은 것이다.


한편으로는 ‘최’ 자신이 그녀를 둘러싼 루머에 콧방귀 뀌면서 차기작을 사채업자 역으로 맡았다면 소위 귀 얇은 대중과 언론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 상상해 보기도 한다. 꼭 그녀의 경우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공동체와 연대를 만들고 투쟁을 하며 스스로 자신의 삶을 요구한다. 사회운동에 뜻이 없는 이들일지라도 각자 나름의 마인드를 가지며 매순간 전략적인 제스처를 취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이에 앞서 모든 것을 사소하게 만들어버리려는 조금은 무서운 현실에서 선행되어야 하는 것은 우리 자신들 내면의 컨트롤은 아닌지 생각해본다. 선택에 임하면서 우리는 귀에 가득 찬 소음을 빼내야 하는 것은 아닐까. 눈을 감고 스스로를 바라보자.






아무쪼록 그 누구도 안타까운 선택을 하지 않기를.




웅 _ 동성애자인권연대 걸음[거:름] 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