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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동의 레인보우패밀리] 육아#36. 자식이란?: 전생(前生)에 목숨을 구해주고 은혜를 베풀어준 빚쟁이!

행성인 2025. 4. 19. 13:43

여기동(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기획의 말

행성인의 오랜 회원인 여기동님이 필리핀에서 안부를 전합니다. 2015년 한국에서 결혼식을 하고 남편의 나라로 가서 살림을 꾸리는 여기동 님은 딸 '인보'를 입양하여 육아일기를 쓰고, 최근에는 성소수자 연구들을 리서치하며 공부에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

 

 

딸내미, 너는 누구냐?

 

 

 

“자식은 부모가 전생에 빚을 많이 져서 빚 받으러 온 사람이라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내가 살고 있는 소도시 발렌시아에서 만난 조은숙 선생님(교육심리학 박사)이 들려주었습니다. 이 선생님을 인보는 은숙이모라고 부릅니다. 

 

어느 날 우리는 함께 저녁을 먹고 운동 삼아 거닐며 부모-자식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자식은 전생에 내 목숨을 구해준 생명의 은인이래요”이라고 동생 훈이가 예전에 해준 이야기를 건넸어요. 그랬더니 은숙이모 왈, “자식은 빚 받으러 온 빚쟁이래요”. 

 

이 이야기들을 듣고 저는 불가(佛家)에서 내려오는 두 의미를 합쳐 곰곰이 생각해 보았어요. 내 딸내미 인보는 ‘전생에 나에게 은혜를 베풀어준 은인이요 빚쟁이’였습니다. 그런 연유로, 이 녀석이 나를 힘들게 할 때마다 ‘전생에 내 목숨을 구해주셨다는데’ ‘빚 받으러 오셨다는데’ 라고 궁시렁대면서 친절을 베풀어야겠다고 마음을 고쳐 먹었답니다.

 

 

엄마, 미안해

 

찰스 아빠가 새벽 6시면 일터로 나가야 하기 때문에 저는 아침부터 아이를 돌봐야 합니다. 

 

어느 날 아침 아이 아침밥을 차려 놓고 먹이려고 하는데 이 녀석 딴짓만 부려서 포기한 채 돌아서야 했어요. 설거지를 하면서 혼잣말로 “엄마가 인보 아침밥 맛있게 차려 식탁에 준비했는데 먹지도 않고…피곤해 죽겠는데…(뭐라고 뭐라고)” 궁시렁댔습니다. 

 

그런데 이 녀석 갑자기 저에게 다가오더니 “엄마 미안해” 하는 겁니다. 뭐가 미안하냐고 물으니 자기가 밥을 먹지 않아서 미안하다네요. 이 녀석 내가 투덜거린 말을 듣고 이해했던 겁니다. 미운 네 살을 먹으니 이렇게 눈치가 빤해진 거지요. 

 

저는 이 사과의 의미가 이제 우리 아이가 부모와 협상이 가능하다는 신호탄으로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그럼 다음부터는 엄마가 밥 먹자고 하면 잘 먹는 거야” 하고 손가락 걸고 약속했습니다. 어긋날 것이 불을 보듯 뻔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커갈수록 점차 지켜지는 약속이 많아지길 바라면서요.

 

 

새 학년 올라가기(Moving Up)

 

필리핀의 학년은 4월에 끝이 납니다. 5월 여름방학을 마친 후 6월에 새 학년으로 올라갑니다. 

 

무빙업(Moving Up) 행사는 어린이의 학업 성취를 축하하고 새 학년 맞이를 기념하는 행사입니다.  이 행사를 위한 드레스 코드를 맞추기 위해 마트에 들러 하얀 드레스와 검정 구두를 샀습니다. 그리고 어린이집에서 사진을 찍었습니다.

 

이달 말경, 발렌시아의 24개 공립 어린이집 원생들이 체육관에 모여 무빙업 행사가 열린답니다. 녀석이 요즘 유치원에서 매일 율동을 연습을 하고 있다네요. 어떤 공연이 펼쳐질지 사뭇 궁금해집니다. 

 

 

네 살 먹어요

 

돌아오는 4월 29일이 인보의 생일입니다. 어느덧 네 살을 먹게 됩니다. 아이 생일에 아일린 할머니, 도동 할아버지, 큰 고모와 사촌 오빠가 오기로 했습니다. 

 

찰스 아빠와 저는 생일 선물로 수영복을 주문했습니다. 필리핀 해변에 햇볕이 너무 따가워서 피부를 보호하기 위해 아이가 좋아하는 핑크색의 긴 팔과 긴 바지로 장만했습니다. 이제 선크림은 얼굴과 목에만 발라도 괜찮을 듯합니다.

 

아이 생일이 돌아오면 가장 설레는 이가 찰스 아빠입니다(사실 저는 예산을 짜면서 남편과 한바탕 전쟁을 치른 일이 많았어요). 필리핀의 부모는 빚을 내서라도 자식의 생일잔치를 챙길 정도로 아이이 생일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필리핀 이웃사촌들은 자신들의 자녀 생일잔치 또는 (필리핀에서 피에스타Fiesta라고 부르는 마을 명절) 삐에스따에 저희 가족을 초대해 줍니다. 덕분에 저희 가족은 맛있는 음식을 먹어요. 이에 보답코자 저희도 인보의 생일날 이웃과 친구들을 초대하여 잔치를 벌입니다. 이런 문화적 경험으로 인해, 저는 딸내미 생일을 축하해 주는 마음과 이웃들이 베풀어준 은혜에 보답한다는 마음을 갖게 되었어요.

 

 

행성인 동지 여러분,

 

‘12. 3 서울의 밤’ 내란의 밤으로 많이 놀라시고 힘드셨지요? 탄핵투쟁하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리고 고맙습니다.

 

동지들, 한 겨울 내내 지친 몸과 마음을 봄 꽃의 향내음과 포근함으로 달래 보셔요. 

탄핵 정국에서 우뚝 솟았던 무지개 깃발의 아우라가 대선 정국에서도 진보적이고 좌파적인 정치와 함께 찬란하게 휘날리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그리하여 성(性)정치의 물결이 퀴어들에게 자유, 평등, 해방을 한 아름 안겨주길 기도드립니다. 

 

성정치가 퀴어에게 밥먹여준 다는 마음으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