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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우당 문학상15

육우당 문학상 우수작 - 어느 교실의 풍경 어느 교실의 풍경 배주호 "코끼리는 자신의 때가 다할 때쯤, 코끼리 무덤이라는 곳에 가서 홀로 죽음을 맞이한다고 한다는 말이 있지. 들어본 사람 많을 거야……." 하라는 수업은 안하고 또 딴소리 하고 있다, 저 사람. 국어 선생이면 국어를 가르쳐야 하는 거 아닌가 모르겠다. 아니 고3 교실에 들어와서, 저게 무슨 장광설이냔 말이다. 언어영역 성적이 안 나오는 것도 짜증나 죽겠는데.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단다……." 물론 내 성적이 낮은 이유는 따로 있다는 걸 잘 알고 있다. 내가 공부를 안 한다는 거? 지금도 내 국어 공책은 낙서로 가득 차 있고, 더 채워지고 있다. 백지를 버릴 수는 없으니까. 뭐 그래도 국어선생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속 편하다. "사실 이건 밀렵꾼들이 지어낸 이야기야. 상아를 .. 2014. 4. 30.
육우당 문학상 우수작 - 다리에서의 크리스마스 다리에서의 크리스마스 박선용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 내가 어른이 되기 전에 맞는 마지막 크리스마스이브. 눈이 온다. 맞으면 마음속까지 치덕치덕해지는 싸락눈이 온다. 얼마 입지도 않았는데, 동물의 가죽을 엉성하게 뜯은 것처럼 낡아빠진 코트가 그나마 그 더럽고 미묘한 기분을 그나마 막아준다. 하지만 당장에라도 벗고 싶다. 눈이 코트 위에 앉아 녹으면 녹을수록 무거워져서 어서 벗고 싶다. 안 된다. 내가 가려고 하는 곳까지는 벗을 수 없다. 잘하지는 못하지만 나름 힘들여서 다림질한 셔츠를 입었으니까. 마지막 순간이나마 깔끔한 나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던 마음으로 다림질한 하얀 셔츠니까. 방금 여자 친구에게 헤어지잔 말을 했다. 그 애는 뭔가 알고 있었다는 듯이 예전 크리스마스와는 달리 죄다 검게 입고 날.. 2014. 4. 30.
육우당 문학상 우수작 - 거리에서 거리에서 강요한 배가 고파서 그래, 사실 아파서인지도 모른다 손을 잡고 걷는 길 위로 수 만 개의 시선이 나를 무는 것 같아서 질식할 것 같다 그림자는 이미 발밑으로 숨어든 지 오래 네 손도 날 꽉 물고 있다 몸 전체가 너무 저릿한데, 백지 위를 걷는 기분이다 끝없이 발을 놀려도 자꾸만 주저앉게 돼 배가 고파서 그래, 네 손을 문다 흘러내리는 건 나와 똑같은 살이야 새싹같이 곱게 자리한 더듬는다 나를 앙 물고 있음에도 놓으면 사라질까, 놓으면 날아가 버릴까 네 입술은 나비를 닮았다 네 입에 나비 한 마리를 더 맞대면 거리 사람들이 나비와 날아가 버릴까, 입 맞추면 날아가 버릴 것 같다 꽉 잡으면 건네지는 한 마디의 신경 쓰지 마 2014. 4. 30.
육우당 문학상 우수작 - <2009.4.18 1950 - 2009.11.30 0142> 2014. 4. 30.
육우당 문학상 우수작 - 그렇게 우리의 시간은 익지 못했다. 그렇게 우리의 시간은 익지 못했다. 양진솔 1. 연락을 끊었다. 이곳으로 오며 한국에서 알고 지냈던 대다수와. 하지만 몇몇은 남겨두기로 했다. 그렇게 정리하고 정리해서 남겨둔 이들의 대략 120명에서 20~30명으로 팍 줄어버렸다. 알고 지내도 별 상관없는 사람들이 100여명이라니, 지우는 내내 신기하고 허탈해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렇게 주소록을 정리하다 보니 애매한 번호들이 몇 개 남고 말았다. 아, 이 번호들을 지워야 할지, 아니면 그냥 놔둬야 할지.. ‘삭제’에 대한 확인을 승낙하기가 어렵다. 겨우 번호 몇 개 때문에. 나는 그 번호들의 주인들을 찬찬히 떠올렸다. 그렇게 찬찬히 되새겨 보니 지우는 번호가 또 늘었다. 그러다 보니 또 줄어든 번호들을 보며 난 손톱을 자근자근 씹었다. 가족도 아니고 .. 2014. 4. 30.
제1회 육우당 문학상 당선작 <깊은 밤을 날아서> 작가와의 대화 제1회 육우당 문학상 작품집 출판 기념 문학의 밤 "깊은 밤을 날아서"에서는 당선작과 우수작 수상작가들이 참여해 낭독과 대화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그 가운데 문학상 기획자 웅과 당선작가 이은미 씨의 대화를 지면에 소개한다. 웅: 인터뷰 기사를 보니 작품을 상당히 오래 전에 집필하셨다고 나오더라고요. 7년 전 쯤이었나? 사실 육우당문학상을 시작하고 아쉬운 점이 응모기간이 촉박해 작품을 쓸 시간이 별로 없었다는 건데. 접수를 받으면서 느낀 점은 육우당문학상을 노리고 쓴 글 같지 않았던 작품들이 많이 보였다는 거에요.(웃음) 뭔가 자기 고백적인 이야기들, 평소 하고 싶었던 이야기들. 작가님은 처음 어떤 동기로 쓰게 되신 건가요? 이은미: 대학에서 문예창작을 전공했어요. 초고는 소설 전공 시간에 과제로 쓴 .. 2013. 12. 25.
[제1회 육우당 문학상 기획후기]늦었지만 새로운, 서투르지만 절실했던 쓰고 읽는 실천의 장 웅(제1회 육우당 문학상 기획자) 동기의도는 단순했다. 먼저 육우당을 두고 이야기할 때마다 회고되는 익숙한 기억들- 일테면 시조시인이 꿈이었다는 것과 떠난 후 남겨진 몇 편의 시조와 일기를 책으로 엮었다는 사실이 하나라면, 10주기 즈음부터 그의 글을 진지하게 읽고 되새기는 시도들이 많아지고, 그들 중 누군가로부터 청소년 성소수자의 이야기들이 좀 더 많으면 좋겠다는 요구가 나온 것이 또 하나의 동기였다. 이를테면 청소년에게 동성애가 해악하다는 구호와 캠페인이 대대적으로 조직되는 소위 ‘문용린시대’에 청소년성소수자의 목소리가 좀 더 울림을 가지면 좋겠다는 바람들, 아니, ‘청소년’, ‘성소수자’라는 당사자성에 대상을 좁히지 않더라도 누구든지 청소년성소수자의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다면 좋겠다는 요구가 높아.. 2013. 4. 23.
[당선작]<깊은 밤을 날아서> 이은미 “오공육 둘, 칠오일 셋.”“칠공일구 다섯.”여기, 소년과 나무가 있다.소년은 길 건너 ‘로얄고시원’에 살고 있고 나무는 ‘여기’ 살고 있다.사람들은 몸통에 621번 은빛 번호표가 박힌 나무를 가로수(街路樹)라고 부른다.소년은 날마다 여기서 가로수인 나무와 지나가는 버스 수를 센다.“칠공이오 넷, 아니 다섯인가?”“이제야 오는군. 칠공육은, 둘.”이 ‘지루한 놀이’를 처음 하자고 한 건 나무였다.“뭐야! 방금 칠공이이 지나갔어. 왜 안세는 거냐?”“아, 미안 칠공이이 셋.”소년이 버스 세기에 집중하지 않으면 나무는 까칠해진다. 버스 세기는, 이 ‘지루한 놀이’는 나무의 유일한 취미인 것이다.그건 그렇고 그게 언제였더라? 이 ‘지루한 놀이’를 시작한 건, 이 년 전 늦은 여름이었다.소년은 땅바닥을 .. 2013. 4. 23.
[우수작]<병균> 이재영 “왜 나한테 온 거니?”밖에 비가 온다는 이유로 에어컨을 가동하지 않아서 일까, 아니면 내가 여자였기 때문일까. 경찰서 안은 남자들의 땀 냄새가 둥둥 떠다녔다. 나는 굳이 내 앞에 선 소년에게 땀과 함께 묻어나오는 짜증을 감추려 애썼다. 퇴근이 한 시간 남은 시점이었다.소년의 손엔 검은색 접이식 우산이 들려있었지만 사용하지 않은 듯 작은 몸에선 아직도 비가 내리고 있었다. 소년이 거쳐 온 바닥마다 빗물이 고여 있었다.“경찰 아저씨들은”소년이 잠시 고민하다가 단어 하나를 골라냈다.“무섭거든요.”난 빗물에 잠긴 네 다크서클이 더 무서워, 얘, 하려다 꾹 참았다. 소년의 얼굴이 진짜 겁을 먹은 듯 하얗게 질려가고 있었다. 내성적인 성격이구나. 소심한 아이들은 참 다루기 쉬웠다. 이거 공무집행 방해죄인거.. 2013. 4. 23.
[우수작]<아프로디테의 소년> 노랑사 다리 위에 서있는 남자의 모습이 가까워지고 있다. -그는 내가 알고 있던 특정한 인물이 아니다. 단지 나의 감각을 자극시키는 신체적인 조건들을 충족한 하나의 대상일 뿐으로 우연히 나의 시야에 포착되었다.- 남자의 셔츠위로 드러난 가슴 굴곡에 나는 셔츠 아래 가려진 그의 단단한 육체를 가늠할 수 있었다. 그의 넓은 어깨와 발달된 팔의 근육은 그를 견고하고 정밀한 하나의 구조물처럼 보이게 했다. 그 구조물 사이엔 내 몸의 구멍을 채우고 나를 희열에 차게 할 단단하고 거대한 물건이 달려있을 것 같았다. 그와 나 사이의 거리가 가까워지면서, 그의 육체가 내 시야에서 부피를 키워가면서 나의 욕망도 부풀었다. 하지만 나의 욕망과 그의 육체는 평행하는 운동이었다. 이내 허전함과 외로움이 그로부터 나를 차단하였.. 2013. 4. 23.
[우수작]<아직 말할 수 없어> 김현중 1보도블록 위로 점점이 멍이 들기 시작했다. 초저녁부터 으스름이 깔리는가 싶더니 이내 비가 쏟아졌다. 혹시나 해서 들고 온 우산을 펼쳤다. 여름 더위가 아직 덜 여물었는지 바람이 제법 차갑다.야간 자율학습도 빼먹고 곧장 집으로 달려갔다. 집안에 들어서니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오후 다섯 시, 주택가 아이들의 목소리가 놀고 있었다.주인도 못 알아보는 썰렁한 거실을 지나쳐 방으로 들어가 교복을 벗어 던졌다. 오랜만에 잡힌 약속이라 그런 지, 들뜬 기분에 설레어 그만 어수선하게 옷장을 뒤집고 말았다. 이리저리 여유 부릴 시간은 없었다. 청바지와 늘어난 티 하나를 걸치고, 거울 앞에 서서 머리를 대충 넘기다가 새까맣게 그은 팔뚝을 보았다. 축구를 할 때면 소매를 어깨까지 걷어 올리는 버릇 탓에, 여드름 .. 2013. 4. 23.
[우수작]<아메리카노> 낌 청명한 여름이었다. 하늘은 시퍼런 물감을 풀어 놓은 것 같았고, 흰 구름이 손가락으로 찍어 바른 양 툭툭 떠다니는, 그런 좋은날에, 나는 시원하다 못해 추운 카페에서 덜덜 떨고 있었다. 추워서 떠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이제 곧 있으면 B가 올 것이고, 곧 닥칠 그 만남이 나를 혹독한 긴장에 몰아넣고 있었다. B는 7년째 함께인 친구이다. 중학교 1학년, 같은 반인 그 애를 처음 본 순간 토끼가 한 마리 떠올랐다. 피부는 분필가루마냥 하얗고 커다란 눈망울은 겁에 질린 토끼 같았다. 내가 나의 정체성을 좀 더 일찍 알았더라면, 나는 내가 그녀에게 반했다고 생각할 정도로 그 애는 내 시선을 끌었다. 나는 그 애와 친해지려했고, 친해졌고, 그 만남은 지금까지도 순수한 우정으로 이어지고 있다. 7년 동안 우.. 2013. 4. 23.
[우수작]<에스컬레이터가 좋더라> 외 모리 에스컬레이터가 좋더라 너와의 키 차이는 19센티 정도라서뽀뽀하는 순간마다 네 목이 안 아플까그래서 형은 말이야, 에스컬레이터가 좋더라 벚꽃 길 용기 주말이 피크라기에 남산에 가기로 했는데벚꽃은커녕 아직 추우니 기상청이 야속하다손잡고 걸을 용기가 벚꽃 길에선 날 텐데. 서점 서점은 책장이 많아 뽀뽀하기 좋더라.열심히 일하는 서점직원 이쪽으론 오지마요.간고등어 헬스책은 보지마요 내사랑. 영등포구청역 저녁으로 곱창 먹어서 냄새날 거래도당신 냄새 살 냄새 코 뭍고 맡고 싶어얼른 와요 내사랑 영등포구청에 있을게요. 치과 웃을 때 왼쪽 앞니 귀여워 죽겠는데그 앞니도 내꺼니까 교정 안하면 안 되나요하겠다면 그 전에 뽀뽀라도 많이 해요 2013. 4. 23.
제1회 육우당 문학상 심사평 육우당이 떠난 지 10주기가 되는 해에 마침내 그의 이름을 딴 문학상이 제정되었습니다. 어쩌면 조금 늦은 감도 있지만 아마도 그건 비로소 우리가 그의 삶과 죽음을 동시에 껴안을 수 있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육우당이 스스로 삶과 죽음을 뒤바꾸며 우리에게 남기려 한 것이 슬픔이나 좌절이 아니라 분명 모두가 평등한 세상이 가능하다는 열망과 의지의 메시지였음을 기억하려 합니다. 시인이 되고 싶었던 그의 살아 생전의 꿈을 ‘문학상’을 통해 더 많은 이들의 꿈으로 나누려 합니다. 이런 차원에서 첫 회라 많이 생소하고 작은 문학상에 63편이라는 기대치를 뛰어넘는 많은 작품이 들어와 놀랍고 기뻤고, 그래서 무엇보다 작품을 보내주신 모든 분들에게 심사위원으로서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물론 전반적으로.. 2013. 4. 23.
故육우당 10주기 기념 사업을 준비하며 - 2013년 故육우당 10주기가 갖는 의미, 그리고 청소년 성소수자 인권활동 정욜, 상근 (동성애자인권연대) 1. 육우당 육우당은 동인련 청소년 회원으로 2003년 4월25일 사무실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유서에도 남길 만큼 마지막 3개월은 동인련과 함께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03년 4월 국가인권위원회는 동성애가 청소년보호법 시행령 상의 청소년유해매체물 심의기준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 차별이라고 삭제권고를 내렸지만 한기총은 '국가가 앞장서 동성애 확산을 조장 하냐'며 반박성명을 발표했다. 이즈음 육우당은 우리를 떠났고 유서에 기독교에 대한 강력한 비판을 담았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고 그의 죽음을 100% 교계의 책임으로 넘길 수는 없겠지만 청소년 성소수자로서의 삶을 온전히 살아야만 했던 그는 분명 열악하고 비참했던 청소년 성소수자 인권의 상징으로 남아있다. 이후 매.. 2013. 3.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