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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조작단4

아홉 번째 편지 넌 늘 전 연인이 어떤 사람이었냐고, 정확히말하면, 전 남자친구가 어떤 사람이었냐고 물었지. 난 늘 두루뭉술하게 대답했어. 그냥 함께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고 말이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었다고, 주말이면 정오가 되도록, 낮게 코를 골며 자는 그 사람의 얼굴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고 말하고 싶었어. 하지만, 말하지 못했어. 그 사람은 남자가 아니었으니까. 그녀와 나는 오 년을 만났어. 우리는 같은 대학교, 같은 과를 나왔지. 내 대학교 졸업앨범을 보면, 그녀와 함께 찍은 사진이 있어. 너는 그녀의 얼굴을 보면서도, 무척 친했던 사이 같은데 왜 한번도 본적이 없느냐고 물었지. 아무말도 하지 않았어. 할 수가 없잖아. 너에게 전 연인이라고 말할 수가 없었어. 그냥 이제는 싸워서 더 이상 보지 않는다고 .. 2013. 10. 22.
여덟 번째 편지 넌 옆에서 잠을 자고 있어. 나는 지금 술에 취해 있고, 네가 자는 모습을 보면서 다시 맥주 한잔을 마시고 있어. 난 네가 짐을 싸서 나가버렸을 거라고 생각하고, 혼자 남은 집에 돌아오기 싫어서 이렇게 밖에서 술에 취하지 못해 안간힘을 썼는데 말이야. 미안해, 지금 네 머리에 놓인 베개를 치우고, 내 팔을 베게 하고 싶지만, 술 냄새가 너무 많이 나서 네가 깨버릴거야. 게다가 잠투정이 심한 너는 아마 다시 화를 내버릴지도 몰라. 화를 내지 않는 지금의 너를, 조금 더 보고 싶어. 넌 사흘째 나에게 말을 하지 않고 있어. 처음에는 네가 짐을 싸서 나가버리는 건 아닌가 걱정을 했다가, 나중에는 답답해서 내가 도망가버리거나 큰 실수를 저지를까봐 걱정했어. 혼자 안절부절하다가 밖으로 나가버린거였어. 미안해, 난.. 2013. 9. 5.
네 번째 편지 나에게 왜 이곳에 왔냐고 물었을 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바닥 만을 보았어요. 바닥에는 보풀이 일어난 빨간 카페트가 깔려 있었죠. 선생님이 내 답변을 기다리는 동안, 연습실 안에는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어요. 내가 질질 끄는 슬리퍼 소리만 가득했죠. 난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한참을 고민하다가, 고개를 숙였죠. 무슨 단어를 쓴다고 해도, 엄청나게 쏟아지는 비를 뚫고 이곳에 온 내 마음을 설명할 수는 없었을 거니깐요. 아니, 그 반대였어요. 입을 열기 시작하면 수많은 단어들이 쏟아져 나올 것 같았어요. 이곳까지 달려오는 지하철 안, 마을버스 안에서 나의 마음은 그랬어요. 버석거림, 삭막함, 외로움. 누군지 대상도 명확하지 않은 그리움이 가득차서, 비쩍 마른 쭉정이처럼 흔들거렸어요. 이렇게 비가 .. 2012. 11. 30.
세 번째 편지 스무 살이 되었을 때, 엄마는 내게 캔맥주를 꺼내면서 말씀하셨죠. 어른이 되었구나, 우리 딸, 축하해. 엄마는 한 여자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죠. 여자의 집에서는 올해 안에 결혼을 하지 않으면 집안에 있는 남자들이 모두 죽는다는 점괘를 받았다고 해요. 그 마을에서 가장 용한 점쟁이에게 말이죠. 여자의 집은 난리가 났더랬죠. 사대 독자가 죽고 나면 누가 집안을 이끌어 가겠어요. 그래서 집에서는 동네에서 결혼하지 않은 단 한 명의 남자와 서둘러 결혼을 시켰다고 했어요. 여자는 남자의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결혼을 해야 했죠. 남편에게는 늘 숨겨둔 애인이 있었고, 여자는 울면서 집을 지켰다고 했죠. 옷장에 여행 가방을 싸둔 채, 도망갈 기회를 엿보다가, 결국 도망가지 못하고 그 집에서, 남편은 여전히 집에 들.. 2012. 9.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