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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V AIDS

은유로서의 질병, 에이즈를 말하다 _ 6월 호

by 행성인 2008. 6. 21.
함께살아가기 : People living with HIV/AIDS! HIV/AIDS 감염인과 더불어 함께 살기


강 석 주(한국 HIV/AIDS 감염인 인권연대)

 

  우리의 삶은 질병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최근 건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질병은 일상대화에서도, 수많은 매체보도에서도 다뤄진다. 아프지 않고 건강한 삶을 살고자 하는 것이 모든 사람들의 바램이 듯 매체를 통해 건강에 대한 정보를 얻는 것은 매우 쉬어졌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는 수천, 아니 수만 가지의 질병들이 있고 그 질병들을 앓는 사람들 또한 매우 많다. 우리는 이런 질병들을 앓고 있는 사람을 환자라고 말한다. 환자들은 말 그대로 아픈 사람이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질병 그대로의 아픔보다 더 큰 고통이 있다. 그것은 바로 사회의 차가운 시선과 질병에 대한 편견이다.

  수전 손택의 “은유로서의 질병”이란 책은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질병의 은유와 많은 상상들이 그 질병을 가진 사람에게는 얼마나 고통스럽고 힘들게 다가오는지 잘 설명하고 있다. 또한 질병에 덧 씌워지는 은유를 통해 사람들이 질병을 질병 그 자체로 보는 것이 아니라 ‘다른 무엇’으로 바라보게 하는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쉬운 말로 풀어서 이야기 해 보자면, 질병은 하나의 치료를 받고, 원인을 찾아내야 하는 단순한 것인데 이러한 질병에 우리의 편견과 공포, 무지가 개입되어 가면서 은유의 기능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말을 자주 쓰고 접한다. ‘꿀 먹은 벙어리’나 ‘암적 존재’, ‘편집증적 사회’ 등 여러 가지 분야에 다양한 질병의 이입을 통하여 자신의 주장을 명확하게 보여주고자 한다. 이러한 말들은 해당 내용을 질병에 비유함을 통해 명확하게 문제점을 부각시켜 준다는 장점이 있다. 특히 최근에 가장 이슈가 되고 있는 광우병의 문제에서 알 수 있듯이, ‘에이즈보다 무서운 광우병이 몰려오고 있다.’라는 식의 문구를 통하여 광우병이 얼마나 공포스러운 질병인지 부각시키고 있다. 하지만 이런 표현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에이즈라는 질병에 대해 갖고 있던 선입견이 쉽게 개입되게 만든다. 오랜 세월동안 개개인의 삶 속에 녹아져 있었고 사회의 암묵적인 동의를 통해 존재했던 질병에 대한 편견이 다른 질병과 비교됨에 따라 편견과 은유의 벽은 더욱 공고해진다. 또한 이러한 내용은 우리의 생각을 통해서 언제든지 뿜어져 나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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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월 초 촛불집회에서 민주노동당 서울시당 학생위원회가 인터넷에서 보고 출력해 온 선전물
찾아가서 에이즈보다를 삭제해줄 것을 요청, 결국 삭제는 했으나 그 자리에는 '흑사병보다'라는 말이 채워졌다.



은유로서의 질병, 에이즈

   에이즈 이야기를 해보자면, 에이즈는 더 이상 치명적이고 무서운 질병이 아니다. 27년 전만해도 에이즈는 공포의 질병이었다. 에이즈에 대한 치료법도 알려지지 않았고, 원인을 알기도 어려워 ‘제 2의 흑사병’이라고 불려지며, 전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1986년 미국에서 최초의 에이즈 치료제인 지도부딘(zidobudone)의 개발로 인하여 에이즈 치료의 희망을 주었다. 이후에 여러 가지의 치료제가 개발이 되었고, 일명 칵테일 요법이라고 부르는 3제 병용요법을 통하여 에이즈는 치료 가능한 질병이 되었다. 아직까지 완치제는 개발이 되지 않았지만, 에이즈를 당뇨와 고혈압처럼 적절한 치료를 통하여 관리가 가능하게 된 것이다. 현재에도 다국적 제약회사들은 더 좋은 치료제와 완치제를 개발하기 위해서 돈을 쏟아 붓고 있다. 물론 새로운 치료제가 개발되어도 모든 환자들이 접근조차 못하고 있지만.

   에이즈의 치료제 개발과 의료기술의 발달로 환자들은 ”에이즈로 인한 죽음”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고, “치료를 통하여 일상생활”이 가능해졌다. 하지만 에이즈 환자들의 현실로 돌아오면 모두 꿈같은 이야기다. 일상생활이 가능해졌다고 하지만 감염인들은 자신의 질병이 알려질까 두려워 꼭꼭 숨긴 채 살아가고 있다. 이것은 사회가 만들어 놓은 에이즈에 대한 은유와 공포 때문이다. 정부가 앞장서 에이즈에 덧 씌어 진 은유를 벗어내기 위해 노력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이런 분위기에 편승해 HIV/AIDS 감염인들을 끊임없이 관리하려 든다. 언론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에이즈 관련 기사를 통해 “공포, 환자판명, 접대부, 매춘, 성관계, 격리수용, 색출, 동성애, 관리대상자”와 같은 단어들을 접한다는 것은 결코 어렵지 않다. 매 분기마다 몇 명의 감염인들이 발생했는지, 감염인 증가 속도에만 관심을 기울이지 편견을 해소하거나 감염인들의 인권을 개선시키려는 노력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 자신의 질병을 떳떳하게 이야기 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이것이 바로 감염인들이 해답 없이 더 숨어들게 만드는 이유다.

 

  질병에 대한 은유는 한 사람을 죽음으로까지 내몰 수 있다. 질병을 질병 그 자체로 보지 못하고, 그에 대한 은유와 상상을 덧씌울 때 그 질병은 더 이상 의학적으로 판단할 수 없게 된다. 치료제로 생명을 연장하고 일상생활을 가능하게 했다고 하더라도 질병을 은유로 말하기 시작할 때 연장된 삶에 대해 한탄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너무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질병을 그 자체로만 이해되어야 한다. 에이즈가 예방 가능한 전염병이고, 치료제를 복용하면 일상생활이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을. 은유보다 질병을 명확히 보는 눈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 2006년 9월 편견에 맞서 에이즈 감염인들이 직접 삶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_ 민중언론 참세상 사진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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