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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 이야기/회원 에세이

역전의 OB! Come Back 행성인!

by 행성인 2015. 6. 10.

Tei.J (행동하는 성소수자 인권연대)

의무감을 가지고 무언가 하고자 마음을 먹었을 땐, 관심도 없던 일들이 재밌어진다. 시험기간에는 TV에 나오는 다큐도 재밌고 어려운 일을 하는 중에는 괜히 친구들의 안부가 궁금해진다. 웅님의 원고 청탁 문자를 받고 마감 쫓기듯이 노트북을 열어서 글을 쓰는 와중에 괜시리 책장 한켠에 꽂힌 책들이 궁금해져서 뒤적뒤적 거리기 시작했다.

개중에는 82년에 발간된 나랑 나이가 비슷한 책부터 무려 15년 전 친구에게 빌려서 되돌려주지 못한 책, 그리고 1편만 훑어보다 도저히 어려워 읽지 못했던 책들도 있다. 옛 추억의 간접적인 기록들이 한 켠에 고이 모셔져 있었다.

 

 

 


잠시나마 잊고 있었던, 나름대로 치열하게 살아낸 20대에  나는 어떤 고민과 어떤 생각으로 살아왔던가에 대한 즐거운 추억여행.

계기란 것이 그렇다. 옆에 있어도 멀리 있는 것처럼 관심도 없던 것이 우연한 계기로 다가와 많은 생각을 가져다 준다.


“역시 넌 사만다가 어울림”


페북에서 뭘 썼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유결의 뜬금없는 문자로 이어진 썰은 ‘(구)동인련 OB들 한번 모이자~’에서 ‘끼망새 재결합 유력설’로.. 끼망새에서 기동이형 결혼식으로, 마지막으로는 결혼식때 ‘끼망새 공연하자’라는 이야기로 흘러갔다.

‘미처 생각지도 못했다’ 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 당시에 여러 의미로 복잡한 마음이 들은 것이 사실이다. 인권캠프를 시작으로 동인련과 함께 했던 십 수 년을 몇 해 전 일어났던 논쟁의 제공자가 되어 나와버리고 참으로 지독하게 멀리한 이후 ‘나에게 ‘자격’이라는 것이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으니 말이다.

유결이 넌지시 던진 “끼망새” 덕분에 난 그 이후로 결혼식까지 민중가요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다. 무한도전의 토토가가 한동안 우리나라를 옛 추억으로 물들인 것 마냥, 대학교때 문선패를 맡으면서 내 삶을 함께 했던 노래들은 잊고 있던 그날의 고민들을 소환했다.


“친구여 그대는 무얼 위해 사는가? 일신의 안락을 찾으려고 사는가?”


노래를 부르며 장난스럽게 끼를 내뿜지만 민중가요 속엔 정말 많은 고민이 숨어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사실 듣는 것을 즐기는 것과는 별개로 그 노래들은 나를 많이도 괴롭혔다. 듣는 내내 “너 지금 뭐하니?” 라고 묻고 “이렇게 살도록 노력하지 않았어?” 라고 지도를 받았다. 사람은 실수를 할 수 있고 실수를 했다면 그에 대한 비판을 받고 그에 대한 고민을 함께 하는 과정이 필요했는데 그러한 절차를 나는 외면해 버렸다. 그렇게 멀어졌던 동인련.

유결(너무 많이 등장하는데 어쩔 수 없어.. 너때문이야..)의 문자 이후 결혼식까지의 한달 간 고민을 좀 더 구체화할 수 있는 기회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첫 스타트는 아이다호. 일이 있어서 회사에 들렸다가 조금 느지막히 올라와서 맞이한 서울역 광장. 광장 안에서 내가 일원이 되어 목소리를 내고 있는, 익숙하지만 오래된 그 느낌은 나를 굉장히 흥분시켰다(그 흥분 말고...). SNS에서 간접적으로 소식은 들었지만 현장에서 우리를 향해 쏟아지는 혐오의 발언은 아직 내가 분노할 수 있는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었다(그런 면에선 고맙습니다. 다른 건 무지개 반사).

 


행사가 끝난 후 난 상당히 신이 난 상태였다. 참여라는 것 자체 만으로도 이렇게 뿌듯한 일이었던가? 누군가와 함께 힘을 합쳐 우리가 원하는 세상을 위해 발걸음을 디뎌 나가는 것이 이렇게 든든한 일이었나? 행성인 뒷풀이를 사무실에서 할 거니 참석하고 싶으면 하라는 말에 다른 답은 있을 수 없었다. 좀 더 얘기하고 싶었고 함께 하고 싶어서 짐도 함께 나르고 뒷풀이 장소로 따라가는 것은 내 머리보다 몸이 한 발짝 빨랐다. 그 곳에 있었어야 할 것 같았다. 원래 있었던 것처럼.


“이제 행성인이니까 빨리 가입해”


그렇게 친정에 돌아오게 되었다. ‘이제는 문제에 물러서지 말고  맞서자’라는 다짐과 함께. 다행인지 당일 옛 얼굴들이 많아서 적응이 어렵진 않았지만 사실 처음 보는 친구들의 생각이 듣고 싶었다. ‘지금은 어떠한 다양한 생각들이 쏟아지고 있을까?’ 내지는 ‘그동안 내 생각은 어느정도나 뒤쳐져 있을까?’ 하는 이유에서 였지만 빈속에 맛있는 맥주를 쏟아부었더니 그 의도는 곱게접어 하늘위로, 안드로메다로 향해버렸고... 뒷풀이는 뒷풀이 답게! 끝내버렸다. (기억상실)

너무나 고맙고 너무나 기분좋게도 난 과거의 추억을 되짚어보고 찾기만 한 것뿐만 아니라 현재와 연결시키는 행운을 누리게 되었다.


“랄라랄라 랄라라, 아리랑 아라리요”


모든 사단의 근원이었던 결혼식 당일. 끼망새가 마지막 축가를 맡았지만 한분은 일이 바빠서 못오시고 나머지 둘은 연습 한 번 안했다. 이만저만 걱정을 안고 들어간 무지개 빛 천이 곱게 나빌거리는 행사장(식장?)은 너무 마음에 들었고 마이크 에코는 더더욱 마음에 들었다.

한숨 놓고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역전의 OB들이 속속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10년이 지나도 늙지 않는 외모들. 이는 비단 우리가 같이 늙어가고 있어서 뿐만이 아니라, 아직 열정이 살아 있어서리라 믿어의심치 않는다. (물론 주름이 조금 생기기 시작하고, 피부 탄력도 조금 떨어지는 것도 같고, 배도 좀.. 이건 많이 나온거 같고..)

무엇이 이들을 다시 모이게 한 것일까? 우리는 이 결혼식을 축하하는 하객이었을까? 아니면 이 ‘판’의 당사자였을까?

예상했던 바와 같이 1부에 잘 진행되던 결‘혼’식은 2부에서 결‘의’식으로 탈바꿈 했다. 축사는 발언으로 진화했으며 마지막으로는 ‘투쟁’이라는 말이 등장했다. 지킬 것보다는 싸워서 쟁취해야 할 것이 많은 우리의 결혼식은 그 자체가 차별에 대한 저항이자 투쟁의 ‘판’이 되었다. 보통의 결혼식을 3인칭 관찰자 시점에서 보는 경우가 많을 텐데 그날 열렸던 이 ‘판’에 참여한 많은 분들은 1인칭 주인공 시점에서 울고 웃고 때로는 분노했다. 너의 일이 아닌 우리의 일이었기에 그리고 시종일관 변치 않는 벗들이기에.


“끼망새 우리 민중의 노래를 불러주렴” 



 

분위기는 즐겁지만 무언가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다. 잘 들리지도 않았겠지만 혐오와 억압에 대한 차별, 그리고 해방. ‘세상이 험하고 힘들어도 너와 나 가는길 막지 못하며 그 어떤 것도 동지들의 사랑보다 따사롭지 못하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다. (되었을까요?)


“마무으리”

때로는 그대의 따끔한 말이 싫기도 했어 하지만 그건 그만큼의 뜨거운 사랑
나역시 그대가 지쳤을때에 힘이 되고파. 우리 한결같은 동지로 살자
- 우리나라 “한결같이”


쓴 글을 주욱 읽어보니 과거 쓰던 글들과 달리 눈에 띄게 딱딱해짐을 느낀다. 아직 끼가 부족한 것같아 더욱 정진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다시 컴백한 각오는 저 노래가사가 충분히 설명해 줄 수 있을 것 같다(직접 불러주고 싶은데...흐흐흐). 가출이 좀 길었지만 다시 돌아옴을 환대해준 여러분들게 감사드리고 이제는 결혼식추진위원회에서 해단된 OB모임의 건설적인 방향성 확립을 빌고 있다. 그리고 외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