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현숙씨가 레즈비언임을 커밍아웃 하고 총선에 출마한 것은 기념비적인 일이었다. 더욱이 진보 정당의 후보로 나섰다는 것은 단지 동성애자(성소수자)의 공직 선거 출마라는 화젯거리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동성애자 운동의 전략에 대한 중요한 토론 지점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다큐 <레즈비언 정치도전기>를 보고 나는 호평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큐는 재미있고 감동적이었다. 무엇보다 먼저 최현숙씨와 선거본부 구성원(이하 선본원)들의 용기와 열정, 진지한 고민과 노력에 진심으로 박수를 보낸다. 감독들은 따듯한 지지의 시선으로 최현숙씨와 그녀의 도전에 함께한 이들을 바라본다. 아니, 처음부터 다큐는 그들을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하고 있었다. 참여, 이해와 공감이 다큐의 바탕이었다. 덕분에 선거 과정에서의 고민과 어려움, 기쁨과 활기가 생생하게 전달됐다. 나는 사건들을 내 눈으로 바라보는 듯했다.


나아가 <레즈비언 정치도전기>는 짜임새에서도 성공했다고 보인다. 110분의 상영시간이 과하게 느껴지지 않았고, 아마도 복잡했을 고민의 지점들과 논쟁들, 정신없이 흘러갔을 선거 기간을 잘 정리해서 보여준다. 다큐에 드러난 선본의 문제의식과 고민들은 동성애자 운동과 좌파 운동에 참여하고 그 둘을 연결하려는 나에게도 매우 공감 가는 것들이었다.


레즈비언으로서 국회의원에 출마했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서, 어떤 전략을 취할 것인지에 대해서, 사람들에게 무슨 얘기를 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선거 과정에서도, 선거가 끝난 뒤에도 고민은 계속되는 듯했다. 다큐는 레즈비언의 국회의원 출마라는 이슈를 넘어서 어떤 정치 전망을 제시할 것인지에 대해서 진지한 물음을 던지지만 명쾌한 답이 제시된 것은 아니다. 아마도 이 문제에 대해서는 토론이 계속될 것이다.


다큐는 선거 도전에서 최현숙씨 자신과 선본원들이 겪는 몇몇 갈등을 보여준다. 진보 정당 안에서도 드러나는 동성애혐오(또는 동성애혐오 사상에 맞서기를 회피하는 비겁함), 대면 유세에서 커밍아웃하는 것의 어려움, 레즈비언 후보라는 화젯거리를 넘어 대안적 정치 전망을 전달하고자 하는 욕구와 레즈비언 후보로서 섹슈얼리티의 다양성을 드러내고 사회의 편견에 도전하려는 욕구 사이의 긴장.


나는 마지막 문제가 가장 근본적이라고 느꼈다. 사실, 두 가지 문제가 따로 떨어진 대립된 문제는 아니다. 최현숙씨 자신이 커밍아웃한 레즈비언 후보이자 동시에 진보 정당의 후보였듯이 말이다. 선거 과정에서 후보는 레즈비언으로서 커밍아웃하고 이명박 정부를 비판하고 체제의 위선을 폭로하고 약자의 편에 서겠다고 외쳤다.


 

                                                 ▷ 인사동에서의 선거유세모습, <레즈비언정치도전기>의 한 장면



 

그러나 어느 순간 선본은 뭔가 부족하다고 느끼는 듯했다. 단지 군소정당 후보로서 겪는 무관심 때문은 아니었다. 레즈비언 후보로서 드러내기와 선거 공간에서 일반적 쟁점에 대해 말해야 한다는 것 사이의 긴장이 느껴졌다. 마지막 유세를 드랙쇼로 기획한 것은 그런 문제의식에 대한 나름의 해답이었을 것이다.


드랙쇼 유세는 매우 유쾌한 도발이기는 했다. 하지만 내가 가장 감동받은 장면은 다른 것이었다.(이 장면에서 상영 중에 유일하게 박수가 터져 나왔다.) 선거 유세 중에 투쟁 중이던 재능교육 노조의 농성장을 경찰이 침탈했을 때 달려가 함께 싸운 장면이었다. 최현숙씨가 소수자로서 세상의 모든 억압과 차별에 맞서겠다고 한 말이 현실로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이 장면은 레즈비언, 게이, 바이섹슈얼, 트랜스젠더(를 비롯해 이 사회가 인정하지 않는 섹슈얼리티를 가진 이들)의 정치 도전이 걸을 수 있는 하나의 길을 보여줬다. 그리고 나는 우리가 갈 길이 그런 모습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선거 운동이 성소수자 의제 중심으로 이루어지느냐 일반적 정치 쟁점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느냐는 오히려 부차적인 문제다. 어떤 정치가 성소수자에 대한 천대와 억압에 맞서 우리를 지킬 수 있느냐가 진정한 문제다.


물론 특정한 섹슈얼리티가 특정한 정치를 갖고 있다거나 가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성소수자 '운동'이라고 해서 반드시 특정한 정치를 갖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성적 다양성이 존중받는 세계를 위한 전망을 찾는 데서 정치를 피해 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레즈비언 정치도전기>를 보면서 나는 '정치'(선거와 국회라는 좁은 의미가 아닌)에 초점을 맞췄다. 다큐에서 너무 멀리 벗어난 것인지도 모르지만 다큐에 등장했던 인물들이나 성소수자 운동 진영에 있는 사람들과 나는 결국 그 얘기를 해야 한다고 느낀다.


커밍아웃하고 선거에 도전한 사건 자체로도 충분히 의미 있는 일일 테지만, 그것이 한나라당이나 민주당 후보로서의 도전이었다면(아직은 한국에서 있을 법하지 않은 일이지만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절대로 다큐를 보고 박수를 칠 일은 없었을 것이다. 송영선이 여성이라고 해서 여성들을 위한 정치를 하는 것이 아니듯 성소수자라고 해서 모두가 성소수자 해방에 이해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다.(해방의 덕은 볼 것이다. 송영선이 국회의원으로서 독한 말들을 쏟아 내는 것도 여성들의 권리 신장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테니까.) 그 도전이 감동을 주고 의미 있었던 건 어떤 '정치', 또는 '정치'의 단편 때문이었다. 다큐에서는 다소 불분명한 모습으로 드러나지만 말이다.


물론 이 다큐는 '정치' 문제를 떠나서 볼 만하다. <레즈비언 정치도전기>는 20년이 안 되는 한국 성소수자 운동의 역사에서 중요한 한 지점을 기록하고 있다. 최현숙씨의 개인사나 커밍아웃으로 인해 겪은 가족과의 문제들도 우리의 현실과 고민의 지점들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앞서 말했듯이 유쾌하고 고무적이다.


다큐 말미에 선거가 끝난 뒤 촛불집회에서 무지개 깃발과 함께 행진하는 최현숙씨의 모습이 비춘다. 그녀의 그리고 우리의 도전이 계속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의도하고 무언가를 말하거나 보여주려 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촛불집회 속 무지개 대열은 의미심장하다.


작년 한국 사회를 뒤흔든 촛불운동은 87년 이후 가장 거대한 대중투쟁이었다. 그리고 아마도 처음으로 그런 운동 안에서 무지개 깃발이, 즉 의식적으로 성소수자로서 참여한 사람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그 일부로서 존재했다.(수많은 LGBTQAI들이 남들과 똑같은 이유에서 무지개 깃발과 상관없이 운동에 참여했다는 사실과는 별개로.) 이것이 어떤 의미인지 아직은 제대로 정리되지 않았다. 나는 촛불운동 속의 무지개 깃발이 어떤 의미인지 우리 운동의 목표와 그 행동이 어떻게 연결되는 것인지 더 구체적으로 더 정교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우리는 어떤 길을 통해서 우리가 원하는 세상을 만들 수 있는지 물어야 하고 시도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의 '정치도전기'를 써 나가기를, 나는 바란다.





나라 _ 동성애자인권연대




  1. 찌난
    2009.05.01 01:14 [Edit/Del] [Reply]
    잘 읽었습니다. 그날 자리에 함꼐하지못한것이 안타깝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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