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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 이야기/마롱 쌀롱

용서로 가는 네 가지 길- 두 행성의 여자들

by 행성인 2015. 10. 4.

 

마롱(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웹진기획팀)

 

 

 

 

어슐러 K. 르 귄, <용서로 가는 네 가지 길>, (1995)

 

 

쌍둥이 행성인 웨렐과 예이오웨이. 신분제 사회인 웨렐과 웨렐에 의해 식민화된 예이오웨이.
웨렐은 예이오웨이에 대규모 농업을 도입하고 노예를 수출하여 예이오웨이에 웨렐보다도 더욱 복잡한 신분제 사회를 구축한다. 웨렐에서 예이오웨이로 끌려간 노예들은 노래만을 남긴 채 사라진다.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들과 노예 행성 예이오웨이의 노래가 작품 전반을 흘러다닌다.
 
계급과 신분이 웨렐과 예이오웨이를 지배한다. 영주 계급이 보스를, 보스가 노예를, 남자 노예가 여자 노예를 지배하는 복잡한 계층 사회. 두 행성 모두에서 여성은 계급의 최하층을 이룬다. 소유주 계급 여성은 푸르다를 하는 이슬람권 여성처럼 집 밖으로 나갈 수 없으며 외부인에게 모습을 보일 수 없다. 노예 여성은 같은 노예 남성과 소유주 남성의 성적 착취에 항상 노출되어 있다. 노예 여성은 모두의 노예이다.
 
예이오웨이의 독립 전쟁은 사실 노예 여성들이 남성들에게 저항한 데서 시작되었다. 여성들의 저항은 노예 전체의 저항으로 이어지고 저항은 전쟁이 되어 결국 예이오웨이는 웨렐로부터 해방된다. 그러나 독립 후의 예이오웨이는 내전으로 인해 독립 전쟁 시기 보다 나을 것이 전혀 없는 혼란 속으로 떨어지고 만다. 끝날 것 같지 않은 혼란만이 이어지고, 에큐멘이 웨렐과 예이오웨이 모두와 접촉한 시점에서도 여성은 여전히 예속된 존재이다.
 
솔리와 라캄은 각각 두 번째 이야기와 네 번째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솔리는 에큐멘에서 웨렐로 파견한 대사이며, 따라서 웨렐의 고위 인사들과 접촉하는 귀빈이다. 반면 라캄은 예이오웨이로 탈출한 웨렐 대지주의 노예 출신이다. 이 둘이 가진 공통점이라고는, 이들이 여성이라는 것 뿐.
 
웨렐에서, 혹은 예이오웨이에서 여성이라는 사실은 지워지지 않는 낙인이자 날 때부터 주어지는 신분이다. 신분을 나누는 피부색만큼이나 선명하게 여성의 성은 '드러나 있다.'
 
솔리, 행성들의 연합체인 에큐멘에서 파견한 대사인 그녀는 웨렐의 고위급 인사들과 접촉하고 토론하는 데 숱한 어려움을 겪는다. 웨렐의 인사들은 솔리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곤혹스러워 한다. 웨렐에서는 오직 여성 노예만이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데 이 외계인 대사는 노예가 아니다. 하지만 이 대사는 여성이다. 여성이 사람들 앞에 버티고 서서 토론하고 주장한다. 솔리는 남자처럼 입고 솔리 자신이 회의장에서 여성성을 잊듯 그들도 자신을 대접해주길 바랐다. 하지만 솔리를 하녀처럼 만지는 왕, 그녀를 경멸하는 경호원 테예이오, 그녀를 납치하고 창녀라고 부르는 납치범, 그들에게 솔리는 여성이었다. 웨렐인들은 여성을 남성과 동등한 사회적 존재로 인지조차 하지 못한다. 외계인 대사 솔리는 그들에게 혼란을 줄 뿐이다.
 
라캄, 그녀는 몸이었다. 대지주의 강간으로 태어나 소유주의 검은 피부를 가진 그녀는 성적으로 소유주 여성과 남성 모두에게 '사용'되는 몸이었다. 성적으로 착취당하는 노예 여성을 부르는 말인 '사용녀'라는 호칭이 보여주듯 노예 여성은 그저 사용되는 몸이다. 몸이 그녀를 정의한다. 웨렐의 대농장이 무너진 후 보스들이 그녀를 물건처럼 옮겨놓은 다른 농장에서도, 살기 위해 선택한 예이오웨이로의 이주에서도, 그녀는 몸이었다. 예이오웨이 시골의 농장에서 동료에게 글을 가르치며 마침내 그녀는 몸이 아닌 자신을 본다. 라캄과 동료들은 농장을 관리하는 남자들에게 자신들의 몫을 농장 안에서만 쓸 수 있는 대체 화폐가 아닌 진짜 화폐로 줄 것을 요구한다. 라캄은 남자 아이들만을 가르치라는 남자 관리인의 요구를 거절한다. 경제권과 독립성을 획득한 라캄은 도시로 떠난다. 에큐멘의 손길이 머무는 도시.
 
웨렐과 예이오웨이에서 상류층과 최하위층을 통틀어 여성은 갇혀있거나 방치되거나 착취당하는 사람들이었다. 노예가 착취당하고 여성이 강간당하고 사회의 혼란이 그 모든 것을 묵인하는 일은 항상 있어왔지만 그곳에 문명이 있다면, 사람이 있으려면 사회의 형태는 그래서는 안 된다. 에큐멘은 그것을 잘 알고 있다. 에큐멘의 대사들은 성인식을 빙자한 집단 성폭행 현장을 목격하고, 여성이라는 이유로 납치 감금된 상황에서 발언권을 무시당하는 등 폭력적인 예이오웨이와 웨렐의 성적 착취와 차별을 보고 움직이기 시작한다. 평화와 중립을 표방하는 에큐멘은 예이오웨이의 여성들과 연대하여 그들을 돕는다.
 
웨렐과 예이오웨이, 서로를 낳았고 서로를 닮은 두 세계의 구성원 절반은 그 후로도 오랫동안 억압받을 수 있다. 죽고, 강간당하고, 발언권을 잃고, 무시당하는 삶이 계속될 수 있다. 그런 그들의 삶이 에큐멘이라는, 정확히 무엇인지도 모르는 모호한 문명 집단에 의지하는 것은 어리석거나 심지어 위험한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에큐멘의 구성원들은 그것이 옳다는 이유만으로도 웨렐과 예이오웨이의 여성들을 돕는다. 신분제가 무너지듯이 성별에 따른 폭력이 사라지기를 바라며. 새로운 행성에 모빌을 보내듯이 조심스럽게. 조심스럽게 옳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 그것이 문명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