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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적지향 · 성별정체성/여성 성소수자

육십 평생을 사람으로, 여자로, 동성애자로 살아왔습니다

by 행성인 2015. 10. 13.

60대 레즈비언 윤김명우
 

테마송♪ - I've Never Been To Me (Charlene)

 

 

10월 10일 대한문에서 개최된 여성성소수자 궐기대회에서는 6명의 연사들이 성소수자 여성으로서 자신의 삶과 존재를 외쳤습니다. 행성인 웹진에서는 이들의 발언을 게재하고자 합니다. 다양한 세대, 다양한 성적지향을 갖고 있지만 동시에 여성으로 연결되는 이들의 이야기를 함께 나눠봅시다. (무대에서 발언 당시 각각의 연사마다 테마송이 지정되어 있었습니다. 테마송을 들으며 발언문을 보면, 연사들의 발언을 더욱 생생하게 느끼실 수 있습니다! 위 테마송 링크를 클릭하시면 해당 노래의 유튜브로 연결됩니다.)
여성성소수자 궐/기/대/회 <나는 여성이 아닙니까> 스케치 바로가기

 

 

 

육십 평생 여성으로 살아온 난 여성이 아닙니까? 왜 아닙니까? 왜 아니어야 합니까!!

나는 윤김명우입니다


레즈비언 클럽 ‘레스보스’를 운영했었고, 지금은 레즈비언 바 ‘명우형’을 운영하고 있는 60대 레즈비언입니다.
 
제 이야기를 하려고 보니, 너무도 일반적인 삶인데 ‘동성애’라는 단어가 앞에 붙어버리면서 매우 복잡하거나 특이한 삶이 되어버린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복잡하면서도 특이한 삶을 윤김명우라는 사람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리고 어떻게 살아갈 지에 대해 이야기하겠습니다.
 

첫 번째 아웃팅


중학교 때쯤으로 기억되는데, 그 무렵 제가 친구에게 느끼는 감정이 일반적인 소녀들이 갖는 우정이 아니란 걸 알았지요. 두근거리는 마음을 제가 좋아했던 친구한테 고백한 것이 화근이 돼 인생의 첫 번째 아웃팅을 경험했습니다. 그 친구가 선생님께 일러 부모님께 전해졌지요. 당시는 이웃집 숟가락이 몇 개 인지까지 알던 터라 동네에 소문이 순식간에 퍼져 아주 난감한 상황이 처했어요.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아찔합니다.
 


명동의 여성 전용 다방 ‘샤넬’


제가 어렸을 적엔 ‘레즈비언’ 혹은 ‘동성애’라는 말이 아주 생소해서, 혼자 남들과 다른 나에 대해 속앓이하며 굉장히 비관적으로 살았어요. 18살, 처음으로 ‘여성 전용 다방’인 ‘샤넬’이라는 공간을 접하게 됩니다. 그 당시 레즈비언 선배들을 만나고 나서는, 하루라도 안 나가면 너무 그립고 보고 싶어서 잠을 못 잘 정도였지요. 내가 상상하고 그리워했던 것이 실제로 있고 나 같은 사람이 또 있다는 것이 얼마나 신기했던지 모릅니다.
 
가출


본격적으로 이반의 삶을 살았던 건 가출 이후의 삶이었던 것 같아요. 남부럽지 않은 집안의 둘째 딸로 귀여움을 받으며 생활했던 저에게 가출 이후의 생활은 180도 다른 삶이었습니다. 그때 시대적 상황이 여자들이 직장을 갖는 게 보편적인 상황도 아니었기에 그 고통은 더 했지요.
 
‘남장 여인’의 삶


그 당시 여자의 업무라는 것은 ‘경리직’ 정도였어요. 게다가 여자는 직장의 꽃이라고 불리던 시기였기 때문에 일명 ‘바지씨’에 속한 남장여인이었던 제가 선택할 수 있는 직장은 더욱 한계가 있었지요. 제가 속한 ‘바지씨’는 요즘 언어로 ‘부치’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 당시에 이반(동성애자)은 바지씨와 치마씨로 구분했는데, 사실 바지씨는 트랜스젠더에 가까웠다라고 생각하시면 될 겁니다. 지금은 레즈비언 관계에서 고정적인 역할이 많이 사라졌지만, 우리 때는 너무나 일반적인 이성애 커플모습이 익숙한 데다 다양한 커뮤니티가 없다 보니 항상 ‘남자’와 ‘여자’의 역할모델을 따라 행동했던 것 같습니다.
 
주민등록번호 ‘2’


직장을 구하려니 주민등록번호 ‘2’라는 숫자를 단 남장여인으로써 어려움이 참 많았어요. 지금 생각해보니 정식으로 면접을 봐서 신분증을 확인하는 직장을 가져본 건 모회사 자재과에 들어간 것을 제외하고는 없는 것 같군요. 전문직도 아니고 승진을 보장 받는 안정적인 직업도 아니었기 때문에 하루하루가 정말 까마득했어요.
 


레즈비언 바 ‘레스보스’


1996년도에 우리들의 쉼터를 만들자는 생각에 레즈비언 바인 레스보스를 마포 공덕동 어느 지하의 조금한 공간에서 시작했어요. 초반 레스보스가 생겼을 때, 우리나라 최초의 레즈비언 인권단체 ‘끼리끼리’라는 커뮤니티의 정기모임이 있는 날이면 정기모임이 있는 시간까지는 레스보스에 손님이 하나도 없을 정도였어요. 그때는 동성애자 인권에 엄청난 갈증을 안고 있었던 시기여서 이반들이 자연스럽게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것 같아요. 이후로 레스보스는 신촌을 거쳐 홍대로 넘어가면서, 클럽으로 바뀌게 됩니다. 레스보스는 2009년에 문을 닫기까지 여기서 다 소개하지 못할 정도로 수많은 레즈비언들과 같이 웃고, 울고, 이야기를 나누고 삶을 공유했습니다. 지금의 ‘명우형’이라는 공간을 압구정에서 열게 된 가장 큰 이유도 그들을 잊지 못해서입니다. 좀 더 다양한 곳에서 우리 이반들이 단단한 커뮤니티를 이루고 있을 때, 세상에 대한 이야기와 문제제기가 더 나오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처음과 같은 마음으로 우리들의 쉼터가 되길 바라며 ‘명우형’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참 열심히 살았어요


이렇게 돌아보니 참 열심히 살았네요. '변태' 혹은 '정신병자'로 불리면서 이겨내야 하는 그 심정은 아마 당해 보지 않고서는 이해하기 어려울 겁니다. 내 삶을 조금 더 일찍 계획할 수 있는 시대적 환경이었으면 보다 당당하고 멋진 삶을 살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도 드네요. 물론 지금의 제자리에 대해 후회하는 것은 아닙니다.
 


나이 듦


20살 때 만났던 선배들은 지금은 70살이 넘고 80살이 넘어요. 파트너랑 40여 년 같이 사는 선배도 있는데 보통 30년 넘게들 삽니다. 저도 15년 동안 산 사람이 있었고요. 명절이나 기념일등을 챙기며 서로 모여 밥을 먹는 등 모임을 가집니다. 어느새 저도 부모 세대의 나이가 되었고, 이제는 후배들이 제게 찾아옵니다. 안부를 묻으려 연락하기도 하고, 고민을 털어놓으려 절 찾아오기도 합니다. 후배들에게 저는 말합니다. 사회 속의 한 사람으로써 당당히 자신의 인생을 설계하라고요.
 

 

여성가족부에 묻습니다


마지막으로 여성가족부에 묻습니다. 육십 평생을 사람으로, 여자로, 동성애자로 살아왔습니다. 동성애자인 내 주민등록번호도 2자로 시작합니다. 그 숫자 2, 내가 붙였습니까? 국가가 날더러 여성이라며 붙여놓은 숫자가 아닙니까? 그래놓고 이제 와서 날더러 여성이 아니라고 하는 겁니까? 내가 동성애자여서 그렇습니까? 동성애자인 나는 여성이 아니란 말입니까? 언제까지 동성애자인 나는 이런 차별을 받으며 살아야 합니까? 국가는 왜 동성애자이자 여성인 나를 이토록 짓밟는 겁니까? 다시 한 번, 여성가족부에 묻습니다. 육십 평생 여성으로 살아온 난 여성이 아닙니까? 왜 아닙니까? 왜 아니어야 합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