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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V AIDS

레드파티 기획후기- ‘무거움’과 ‘엄숙함’을 넘어 ‘노는 게 기부다’로

by 행성인 2015. 12. 9.

재성(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지난 12월 5일, 한국 유일의 HIV/AIDS 예방과 감염인 인권증진을 위한 기금 모금 파티인 ‘레드파티’가 성황리에 개최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세 번의 레드파티 중 가장 많은 분들이 행사장을 찾아주셨고, 덕분에 파티는 성공을 거둬 기금 조성을 위한 결산만을 앞두고 있습니다.


저는 늘 그랬듯 레드파티의 기획 단계부터 전 과정을 함께했습니다. 올해는 규모가 커질 것으로 짐작했던 만큼 이전과는 다른 기획이 필요했습니다. 파티의 ‘컨셉’을 잡아야 했던 것이죠.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바로 이번 파티의 슬로건, ‘노는 게 기부다’ 였습니다.
 


많은 분들이 ‘기부’라 하면 왠지 어렵고 진지해야만 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가집니다. 가뜩이나 ‘기부’라는 말만 들어도 묵직해지는데, 거기에 ’HIV/AIDS 이슈’까지 낀다면? 그 무게감은 정말 장난이 아니겠죠. 그래서 2013년 9월쯤, 제 입에서 '파티해요' 한마디가 나왔을 때, 소망 중 하나는 '더 이상 에이즈 이슈를 무거움 일변도로 다루는 것에서 벗어나, 어깨에 힘 좀 빼고 커뮤니티 한복판에서 색다른 방식으로 다뤄보자'는 것이었습니다. ‘무거움’을 벗기 위해 ‘파티’를 생각해낸 것이었죠. ‘노는 게 기부다’ 슬로건은 제 생각과 궤를 같이 하는 것이었습니다.
 
무거움으로부터 벗어나 '노는 게 기부다'라는 명쾌한 슬로건에서 나온 것이 바로 올해 레드파티 준비기간을 뜨겁게 달궜던 ‘레드셀카 캠페인’이었습니다. HIV/AIDS 예방과 감염인 인권증진을 지지하는 마음이 딱딱한 활자만이 아니라 헐벗은 섹시 바디에도 있음을 증명하는 캠페인. 그야말로 HIV/AIDS 이슈가 일종의 '엄숙주의'에서 벗어나 '축제'의 장으로 승화된 순간들이었습니다.
 
누군가는 섹시 바디 컨테스트 같은 ‘레드셀카 캠페인’ 때문에 HIV/AIDS 이슈가 희석되고 경박해진다고 비판할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다르게 생각해보면, 진지하다 못해 '엄숙주의'로 치닫는 HIV/AIDS 이슈에 대한 태도는 좋을 게 뭐가 있을까요. 이제 HIV/AIDS는 죽을병이 아니라, 관리만 잘하면 건강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일종의 만성질환이 되었습니다. '엄숙함'만을 강요한다는 건, 어쩌면 '에이즈는 죽을병'이라는 편견을 은근히 재생산해내는 것일지도 모르죠.
 
이번 레드파티 준비기간에는 의미 있는 시도도 있었습니다. 바로 게이 그림 모임인 ‘GREAM’과 협업하여 ‘콘돔 케이스’를 제작한 것이었죠. 이전까지 HIV/AIDS 관련 활동에서는 예방기관이나 성소수자 인권단체들이 주축이 되어 무언가를 만들어 낸 적은 많았지만, 커뮤니티에서 자발적으로 에이즈와 관련된 결과물을 내놓은 적은 없었습니다. 커뮤니티가 먼저 나서서 에이즈 관련 활동을 제안한 것은 그것만으로 이미 큰 의미를 갖습니다.

 

 


 
원화를 받아 스캔을 하고, 도면을 만들고, 그것을 인쇄해 실제 콘돔 케이스를 만들어 내는 과정. 비록 첫 시도라 절차상의 미숙함은 있었지만, 이제 커뮤니티에서도 에이즈 이슈에 대해 공감하고 자신들의 역량을 활용해 함께 무언가를 만들어내고자 한다는 열망을 확인했다는 점에서 또 하나의 결실이라 하겠습니다.
 
녹록하지 않은 여건, 짧은 준비기간, 치밀하지 못한 커뮤니케이션 등으로 많은 난관이 있었지만, 지난 12월 5일, HIV/AIDS 예방과 감염인 인권증진을 지지하며 행사장을 방문해 주신 수많은 분들의 즐거운 표정을 보며 그 동안의 어려움은 그야말로 눈 녹듯 사라지는 느낌입니다.
 
레드파티는 연차가 쌓이면서 커뮤니티의 자산으로 거듭나고 있습니다. 이 자산을 더욱 멋지게 키우는 데 일조해야 할 1인으로서, 어깨가 결코 가볍지 않다는 걸 요즘 들어 많이 느낍니다. 단순히 더 많은 사람들이 오고 흥행이 잘 되는 파티를 넘어, 많은 분들의 후원으로 운영되는 파티인 만큼 절차의 정확성이나 투명성에 대한 커뮤니티의 높아진 요구에도 부응해야 하죠. 일단 저부터 내/외적으로 많은 역량 강화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깊이 통감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감정이 교차했던 준비과정, 그리고 파티의 환희. 많은 과제들이 뒤에 남겨졌지만, 분명 내년은 올해보다 더 힘들고 큰 도전과제들이 던져지겠지만, 내년에도 저는 네 번째 레드파티를 준비하고 있을 겁니다. 할 때는 완전 힘든데 일단 한 번 하고 나면 또 하고 싶어지는 것들이 있잖아요? 이게 그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