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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문화읽기

여성혐오와 게이혐오 - 한국 게이문화 용어에 관한 견해

by 행성인 2015. 12. 15.

주원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나는 메갈리아를 정기적으로 방문하는 이용자도 아니고 그저 메갈리아에서 오가는 대화들을 지나가듯 읽으며, 대한민국 여성들이 남성중심사회에 대한 불만을 제기하고 풍자하며 저항하는 모습을 기쁜 마음으로 바라보고 공감하는, 그저 외부인이라는 사실을 명시하고 이 글을 시작하고 싶다. 메갈리아는 가부장제 대한민국 사회에서 억압 받는 여성 집단의 감정과 분노가 표출되고, 여성혐오와 그에 저항하는 대한민국 여성들의 담론이 형성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해왔다고 생각한다. 그동안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았던 분노와 목소리를 가시화 했다는 점에서 획기적이었으며, 일부 전문가 집단이 아닌 대중적으로 여성 억압이라는 화두를 던질 수 있었던 공간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관찰자로서, 외부자로서 메갈리아 내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양상으로 대화와 분열이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처음부터 끝까지 어떤 내용으로 문제가 커져나갔는가 역시 정확히는 모른다. 다만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은 최근 메갈리아 내에서 남성 동성애자들에 대한 대화가 오갔으며 그 과정에서 특정 언어 사용이 메갈리아가 자부하는 “미러링”의 일부인지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인지 논쟁과 대립이 있었다는 것이다.

 

논란의 대상 중 하나는 남성 동성애자들의 여성혐오이다. 남성동성애자 문화 내에서 일반적으로 상용되는 용어들 중 몇 가지가 여성혐오적이라는 주장인데, 먼저 이에 대해서 내 견해를 간단하게 적어본다.

 

가장 이슈가 되고 있는 단어가 "끼순이"와 "뽈록이"이다. 내가 이 용어를 처음 듣게 된 건 미국에서 오랜 유학생활을 마치고 한국에서 군에 입대한 후 게이 친구로부터 이런 용어를 처음 듣게 되었다. 일단 "뽈록이"라는 단어부터 먼저 이야기해보겠다.

 

나는 이 용어에 심한 거부감을 느낀다. 사용은 당연히 하지 않을뿐더러 들을 때 마다 몹시 불쾌하다. 그 이유는 첫째로 한 인간의 집단, 여성이라는 집단을 대변하는 용어로 개인을 묘사하거나 평가하는데 사용된다는 점이다. 둘째로 그 대변하는 용어가 여성을 단순 대상화 (objectification)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용어에서 여성은 가슴과 엉덩이가 "뽈록"하게 튀어나온 인간으로 규정된다. 이는 여성의 주체성이나 어떠한 존엄도 고려하지 않고 단순히 여성을 사물화 한다. 어떻게 보면 이 표현의 여성혐오성은 너무나도 자명하다.

 

 

그렇다면 이성애자 여성들은 해당 용어를 게이문화의 일부로 용인해야 할까? 내 대답은 '그렇지 않다'이다. 이를 논하기 위해서는 남성 동성애자의 "여성성"에 대한 논의가 빠지면 안 된다. 남성 동성애자들 중 "전형적인" 여성성, 즉 표현력이 뛰어나고, 말주변이 좋고 수다스러우며, 빠릿빠릿한 특질을 지닌 사람들은 여성에 대한 친근함이나 가까움을 나타내려고 용어를 사용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지만 이분법적 젠더 구조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게이 문화에서 "여성적"인 게이들은 내부적으로 자신의 "여성성"을 인정함으로써 다른 여성과의 동질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여성에 대한 동경과 질투에 기인에 이런 표현을 사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한편으로 일련의 표현은 하위문화에서 동질한 특질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 외부에서 자신들에게 사용되는 비하 발언을 스스로 받아들이는 맥락으로 볼 수도 있다. 가령 미국 흑인들 사이에서 백인이 흑인을 비하할 때 쓰는 "Nigger"라는 용어가 통용되거나, 동성애자 사이에서 서로 친근감과 유대의 표시로 "호모자식", "게이새끼"라는 표현이 쓰이는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문화 현상에서 중요한 부분은 In-group과 Out-group의 구분이다. 만약 한 집단에 개인 스스로 소속되어있다고 생각하는 두 사람이 서로의 소속성을 받아들일 수 없으면 그 용어의 사용은 폭력일 수 있다. 예를 들어 한 이성애자 남성이 자신은 남성 동성애자 문화에 많이 포섭되었으며, 동성애자에 대해 굉장히 호의적(?)이라고 생각한다 가정해보자. 그는 수많은 동성애자 친구들과 자주 놀러 다니고 게이 문화에 익숙하여 자신도 동성애자 문화에 소속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가 자신의 동성애자 친구에게 "호모자식아"라는 표현을 친근감의 표현으로 했다고 상상해보자. 이는 친근감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가 아무리 게이 문화를 이해하고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그는 하위문화에서 상위의 권력을 갖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예의 권력 구조 안에서 그 언어는 좋은 의미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물론 예외도 있을 것이고, 개인적인 자리라면 다를 수 도 있겠지만 말이다.) 내가 미국에서 대학 생활을 할 때 한 백인 친구가 Nigger라는 단어를 써서 굉장히 놀란 적이 있다. 내가 지적하자 그는 자신이 흑인 친구가 많고 그들과 서로 그렇게 부른다고 해명했다. 그렇지만 나는 그의 논리가 그가 발담그고 있는 집단에서나 가능한 일일 뿐, 백인 중심 사회에서 상위층위의 권력을 갖고 있는 백인으로서 그러한 표현들은 일반화 되어 사용될 수 없다고 설명한 적이 있다.

 

"뽈록이"라는 표현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든다. 남성 동성애자가 아무리 자신이 이성애자 여성과의 동질감을 느끼고 가깝게 느낀다고 하더라도 그는 남성중심사회에서 남성이다. 그가 사용하는 "뽈록이"라는 표현이 여성의 신체를 대상화 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여성이 신체로 대변되는 언어를 자신에 대해 말하기 위해 사용되었다는 것을 인지하고 신체적인 모욕감과 불쾌감을 느낀다면 그것은 엄연한 성폭력이다. 발언의 화자가 남성 동성애자라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피해 여성이 성적 수치심을 느낀다면 그것으로 성희롱은 성립되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끼순이"라는 단어에 대한 견해를 설명하려 한다. "끼"라는 표현은 남성 동성애자들 사이에서 "전형적인 여성의 가치" 중 "남성이 가져서는 안 되는" 여성적 특질이나 표현방식, 예를 들면 "여성적인" 손짓이라던가, "어머, 어머나, ~니"와 같은 말투 등을 한데 아우르는 게이 은어이다. "끼순이"라 함은 이러한 특질을 표현하는 남성 동성애자를 지칭하는 표현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끼"나 "끼순이"라는 단어 자체가 여성 혐오적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분명히 나도 이러한 특질을 가지고 있고 남성과 여성, 그리고 간성 모두 어느 정도의 이러한 특질은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남성성과 여성성, 그리고 젠더는 퀴어적 해석에 따르면 누구나 "남성적" 그리고 "여성적"인 특질을 모두 갖고 있지만 사회의 성 정치, 성 규제로 인해 그러한 특질들이 규제된다고 설명한다.

 

이는 "여성은 수학을 못한다"는 편견과 유사하다. 최근 SNS에 올라온 남녀 평등에 대한 강의에서 한 교수는 남성과 여성의 수학실력은 차이가 없음을 증명한 연구 결과들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녀는 남녀평등 지수가 높은 국가일 수록 여성의 수학 성취 비율이 남성과 유사함을 피력한다. 결국 여성의 수학실력이 상대적으로 남성에 비해 낮은 국가는 실제로 여성이 수학을 못해서가 아니라 그 국가에서 "여성은 수학을 못한다"는 인식이 그만큼 뿌리깊게 박혀있기 때문이며 그 사회성이 여성들의 수학 실력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남성은 과묵하고 이성적이며 침착하고, 여성은 수다스럽고 감성적이며 흥분을 잘한다는 이분법적 사고는 실제가 아니라 사회성에 의해 발현된 허구이다. 남성도 충분히 감성적일 수 있고 수다스러울 수 있으며 흥분을 할 수 있고 여성도 그 반대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남성 동성애자들 사이에서, 특히 "끼순이"들 사이에서는 이 특질들을 감추지 않고 터놓을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된다. 일상 생활에서 그들은 자신의 여성성, 즉 "끼"를 숨겨야 하고 "남성적"으로 살아가야 하는 부담이 있다. 그러나 게이 커뮤니티 안에서 그들은 그 부담을 벗어 던지고 자신의 숨겨진 여성성을 숨기지 않고 표현할 수 있다. 나는 이 "끼"에 대해 성적지향과 상관없이, 모든 남성들은 자부심을 느끼고 이 여성성이 부끄러워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본질적인 문제는 "끼"에 대한 혐오이다. 끼에 대한 혐오는 즉 여성성에 대한 혐오이고, 남성이 "여성적"이라는 것에 대한 혐오는 여성에 대한 사회적 혐오를 반증한다. 이러한 끼 혐오는 이성애자 남성과 여성으로부터 뿐만 아니라 동성애자 커뮤니티 내에서도 심하다. 남성 동성애자 커뮤니티에서 "끼 싫어요," "끼 사절"이라는 표현은 너무나도 쉽게 발견 될 수 있으며, 소위 "일틱," 즉 "일반틱한 사람,” “이성애자스러운 사람"에 의해 소외된다. 커뮤니티 내의 분열은 소위 "이성애자로 패스pass되는 사람"이 이성애자 중심사회에 포섭되기 더 쉬운 특질을 가졌고, 그로 인해 같은 동성애자임에도 불구하고 "끼순이"들을 타자화하고 결국 또 다른 권력적 억압을 형성한다. 이와 유사한 양상은 다른 소수자 사회에서도 많이 나타난다. 미국 흑인 문화 안에서도 light skin (더 피부색이 밝은 흑인)과 darker skin (더 피부색이 검은 흑인)의 분열은 쉽게 찾아볼 수 있으며 이것 또한 젠더와 연결되어 다양한 담론들을 만들어 낸다. 소수자 그룹 안에서 상위 계층에 더 가까운 특질을 갖고 있는 집단은 그렇지 못한 집단을 타자화하고 분열을 만들어 낸다. 그 안에서 더 "비정상"적인, 더 퀴어적인 존재들은 더 고립되고 더 소외된다.

 

끼라는 용어 자체가 여성 혐오적이라는 의견에는 동의할 수 없다. 그러나 이 끼에 대한 혐오, 특히 동성애자 커뮤니티 내에 팽배하게 존재하는 끼에 대한 혐오가 결국 이 사회의 여성성 혐오를 반증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내용들을 전제로 할 때, 남성 동성애자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여성혐오적 생각이나 표현은 쉽게 목격된다. “뽈록이”라는 단어 사용과 같은 단적인 예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대화 중에 여성을 대상화하거나 일부 이성애자 남성들과의 친목유지를 위해 (그러나 자신도 동의하는) 폭력적인 언어사용이나 생각의 공유는 비일비재하다. 이는 분명히 비판받아야 할 가부장적, 소위 “꼰대” 의식이다.

 

분명히 게이 커뮤니티에서 여성혐오가 존재하고 이에 대한 비판을 하는 것에 대해서 전적으로 동의함과 동시에 메갈리아 내에서 나왔던 몇몇 게이 혐오 표현들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자 한다. 이 표현들을 보고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 표현들 중에 기억에 남는 것들은 “커밍아웃하지 않은 게이들은 소수자가 아니라”거나 “똥꼬충,” “에이즈충”이라는 표현들이다. 이번 달 초 12월 1일 에이즈의 날을 기념하여 HIV 감염인들을 위한 캠페인과 행사들이 많았는데 이러한 인식개선과 인권 증진을 위한 노력을 무색하게 하는 “에이즈충”이라는 단어에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게이 커뮤니티 안에서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여성혐오를 하는 사람들 있이 있다는 건 절대로 부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여성혐오적인 표현이나 생각에 대해서 비판하고 문제 제기하는 것 역시 분명 필요한 일이다. 남성동성애자들도 분명히 가부장제에서 (원하든 원하지 않든) 남성적 특권을 갖고 있으니까. 그러나 이러한 표현들은 남성 동성애자들이 성소수자로서 짊어지고 살아가야 하는 고통과 이성애 중심사회에서 외면 받고 소외되어가는 부분도 있다는 사실을 완전히 무시하는 가정이나 발언들이다.

 

“커밍아웃하지 않은 남성동성애자들은 소수자가 아니”라는 표현 뒤에는 커밍아웃 하지 않은 동성애자 남성들이 이성애자 남성과 같은 위치에서 사회적 억압의 피해자가 아니라는 전제가 깔려있다. 그러나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 중 하나는 커밍아웃은 한번 하면 끝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연예인이라면 모를까 성소수자의 커밍아웃은 주변사람들에게만 한다고 끝이 아니다. 인생을 살면서 끊임없이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데, 만나는 사람마다 커밍아웃을 해야 한다면 그처럼 어색한 것도 없다. 나도 누구에게 성적지향을 숨기지는 않지만 처음 만난 사람에게, “안녕하세요 저는 게이에요”라고 말할 이유는 전혀 없다. “커밍아웃을 한 사람”이라도 다른 누구에게는 안 했을 확률이 매우 높다. 성소수자를 커밍아웃 여부로 나눌 수 없고 나누는 것도 무의미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커밍아웃의 위험성이다. 한국사회가 변한다고 하지만 여전히 사회는 성소수자에게 폭력적이다. 친구와 가족으로부터 버림받을 수 있다는 고통을 끌어 안으면서까지 커밍아웃을 감행하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다. 나도 주변 사람들에게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숨기려고 하지는 않지만 군생활을 하는 동안에는 어쩔 수 없이 숨길 수 밖에 없었고 그로 인해 원치 않는 거짓말도 많이 해야 했다. 성소수자라는 사실이 폭력으로 돌아오는 공간은 군대와 같은 극단적인 집단만이 아니다. 가정과 직장, 자신이 속한 종교 단체 등 자신이 가장 편하게 느껴야 할 공간이 커밍아웃으로 인해 폭력적으로 변할 수 있는 것이다. 커밍아웃을 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군대라든가, 가족이 호모포빅homophobic하다든가 주변 사람들이 호모포빅한 종교를 진실하게 믿는다든가) 그들의 안전을 위해 커밍아웃을 안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의 물리적인 안전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조차도 남성과 여성의 차이가 큰데, 실제로 여성 성소수자들은 커밍아웃을 하고 난 후에 “남자와 자보지 않아서,” “남자로부터 ‘제대로 된’ 성적 쾌락을 느껴보지 못해서”라는 말도 안 되는 폭력적인 논리로 남성 성폭력으로부터 남성보다 훨씬 더 많이 노출된다. 과연 이들에게 커밍아웃을 하라고 강요할 수 있는가? 커밍아웃을 하지 않은 남자는 이성애자 남성과 같은 층위에 있다는 가정은 이러한 이성애중심주의 사고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이성애 중심으로 바라보는, 어찌 보면 굉장히 오만한 관점이라고 생각된다.

 

“똥꼬충”이라는 표현이 남성적 특권을 이용하여 여성들을 혐오하고 여성들에게 폭력적인 게이 남성을 “미러링”하는 표현이 될 수 있을까? 절대 그렇지 않다. 이미 저 단어에서 비꼬고 있는 것은 남성 동성애자들이 많이 한다고 알려진 항문섹스이다. 항문섹스는 모든 남성동성애자들이 하는 것도 아닐 뿐만 아니라 성적지향에 상관없이 할 수 있는 성생활 중의 하나이다. 이러한 성행위 중 하나를 성소수자에게 대입하여 비꼬는 것은 남성 동성애자의 남성성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명백히 그들의 성적 소수자성을 비꼬는 것이다. 즉, 여성혐오에 대한 미러링이 아니라 단순히 동성애자에 대한 이성애자의 폭력이다.

 

 

 

“에이즈충”이라는 용어도 마찬가지인데, 이는 남성 동성애자들이 에이즈를 퍼뜨린다는 근거 없는 믿음을 퍼뜨리는 혐오적인 표현이다. HIV 양성, AIDS환자들을 비하하는 어조는 엄연히 편견에 의한 혐오이다. HIV/AIDS는 성접촉으로만 감염되는 것도 아닐뿐더러 여성 환자들도 분명히 존재한다. 설령 성적으로 활동적인(sexually active) 생활을 하다가 감염되었다고 한들 그들의 성생활을 문란하다고 누가 감히 이야기 할 수 있을까? 특히 사회적 성적억압과 성적 활동성에 대한 죄책감(slut shaming)에 대항하고 성적 욕망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누가 감히 이들의 성적 자유를 비판할 수 있을까? 성행위 방식이나 빈도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안전하게 자신과 상대방을 생각하면서 이 질병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는 것이 HIV/AIDS예방의 핵심이다. HIV 양성 환자들이나 AIDS환자들의 1위 사망원인은 자살이라고 한다. 현재 의학 기술로 HIV/AIDS 환자들은 만성질환을 갖고 살아가는 여타의 다른 사람처럼 관리만 제대로 하면 얼마든지 모든 일상생활이 가능하다. HIV/AIDS감염인의 사망 원인 1위가 자살이라는 것은 이 사회의 혐오가 그들을 고통으로 몰아가고 있다는 것 아닌가? “에이즈충”이라는 용어는 분명히 남성 동성애자들과 HIV/AIDS환자를 “더러움,” “문란함”이라는 편견으로 억압하는 표현이며 이 표현들은 가부장제의 남성 권력을 비평하는 것과 전혀 상관 없는 표현이다. “여성 혐오에 대한 미러링”이라는 명분으로 사용될 수 없는 이유다. 

 

마지막으로 남성 동성애자들의 “사기 결혼”에 대해 이야기 하겠다. 남성 동성애자들 중 시스젠더 이성애자 여성과 결혼하여 생활하는 사람들에 대한 여성들의 분노 역시 주목해야 한다. 남성 동성애자들 중에 커밍아웃을 하지 못하거나, 독신으로 살거나, 커밍아웃을 하여도 사랑하는 사람과 가정을 꾸리지 못하는 사람들은 여성과 결혼하는 경우가 있다. 이는 사실이다. 당사자들에게는 엄청난 불행이 아닐 수 없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결혼하는 동성애자 남성도 불행하지만, 결혼을 하는 그 여성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을 사랑하지도 않는 남성과 결혼하여 인생의 큰 부분을 거짓을 진실이라 보고 믿게 되는 것이다. 이에 분노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을까?

 

그러나 이 문제를 기득권층 남성이 여성을 이용하는 것으로 봐야 하는지 의문이 있다. 레즈비언 여성 중에도 분명히 남성과 결혼해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이 상황에서는 여성이 남성에 대해 기득권층이 아니지만 앞서 말한 문제와 같은 비극이 존재한다. 한 사람은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과 억지로 가정을 꾸리고 성생활을 하고 자식을 기르고 다른 한 사람은 거짓 사랑을 진실이라 믿으며 속아 살아가고 있다는 본질. 비극의 본질은 당사자가 남성이냐 여성이냐 보다 왜 그들이 사기 결혼까지 하면서 살아가야 하냐는 것이다. 물론 속은 사람들은 피해자이다. 그렇지만 사기결혼을 하기로 마음먹은 사람을 단순하게 가해자라고만 부를 수 있을까? 나는 오히려 그들도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한 이성애중심주의의 피해자라고 생각한다. 속은 사람들은 피해자로 인해 더 큰 상처를 얻는 2차 피해자가 아닐까? 비판해야 할 문제가 단지 그 남성 혹은 여성들의 이기심일까? 본질은 이성애중심주의에 의해 사회 저변으로 물러나간 동성애자들의 행복추구권이다. 그들이 사회적인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서 사기 결혼 하는 것이 맞다고 치자. 그러나 그들이 사회적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남을 희생시키는 것을 비난할 만큼 사회가 동성애자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장치들을 제공하고 있는지는 물어봐야 한다. 동성애자들이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과 정말 자신의 자식을 낳아서 대를 잇는 것에 관심이 있을까? (물론 그런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 만약 그렇다면 그들 역시 남성 가부장제에 절어 사는 피해자임과 동시에 가해자일 것이다 –그러니 가부장제는 반드시 타파되어야 한다!) 그들이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이유는 보통 커밍아웃이 사회적 자살이나 마찬가지라는 뼈저린 인식에서일 것이다. 인정도 받지 못하는 그들이 결혼은 고사하고 사랑을 공표할 수 있을까? 그들의 선택이 이기적임을 부정하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이기적이다. 절대로 옳은 일이 아니다. 비극적이다. 그러나 우리사회는 그들에게 그런 선택을 하는 것이 비난 받아 마땅하다고 손가락 질 할 수 있을 만큼 떳떳한가? 우리는 사기 결혼을 감행한 사람들을 비난 하는 것을 넘어서 이성애중심사회를 비판하고 성소수자가 안전하게 사랑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2차 피해자를 없애는 것이 더 근본적이고 효과적이지 않을까?

 

이성애중심주의에서 이성애자들이 갖는 특권은 무엇일까? 사랑하는 사람에게 공공장소에서 애정 표현해도 되는 특권, 길 가면서 사랑하는 사람과 손잡고 싶을 때 주변 시선이나 폭력에 두려워 하지 않아도 되는 특권,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서 주변사람들에게 편하게 말할 수 있는 특권, 평생 거짓말하면서 살거나 평생 새로 만나는 사람에게 끊임없이 커밍아웃 할 필요가 없는 특권, 자신의 종교가 사랑을 인정해주는 특권, 가족이 자신의 성적지향으로 인해 멀어질까 두려워 하지 않아도 되는 특권, 실제로 자신의 성적지향으로 인해 가족에게 버려지지 않는 특권, 주변 사람들에게 항상 자신의 성적지향으로 인해 거리둘 필요가 없는 특권, 항문섹스와 같은 성행위가 자신을 대표하는 말 (똥꼬충)을 들어야 하지 않아도 되는 특권, "네가 여자/남자를 안 만나봐서 그래"라는 말을 듣지 않아도 되는 특권, 자신의 성적지향으로 인해 그것과 전혀 상관없는 학교나 직장에서 따돌림 당하고 폭행 당하고 심지어 성폭행까지 당하고 퇴출당하지 않아도 되는 특권,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이라는 제도에 참여할 수 있는 특권 등. 이 사회에서 이성애자가 아닌 다른 성적지향을 가진 사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혹은 그러한 성적지향으로 정체화 한 사람들이 상상도 하지 못하는 특권들을 이성애자들은 갖고 있다.

 

이는 여성 이성애자들에게 국한되어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성애중심주의에서 시스젠더 이성애자라면 모두가 갖고 있는 특권이다. 페미니즘이 비판하는 부분은 동성애, HIV/AIDS가 아니라 가부장제와 남성이다. 게이 남성이 사용하는 여성에 대한 언어폭력, 여성혐오에 대해 어떠한 형태로든 그것을 비판하는 것. 그것이 감정적이든 이성적이든, 논리적인 글이든 정말 쌍욕을 하든, 그것은 남성중심사회에서 남성에 대한 저항이다. 그러나 그것을 비판하기 위해서 그들의 성소수자성 혹은 HIV/AIDS를 들먹이는 것은 명백한 혐오이다.

 

메갈리아라는 집단이 그 사용자 전체를 대변한다고 혹은 그 반대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메갈리아는 어떠한 목적을 위해 조직된 단체가 아니며, 남성중심주의에 대한 여성의 분노와 감정을 공유하는 솔직하고 용감한 사람들이 모인 커뮤니티이다. 커뮤니티 안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으며 다양한 의견과 생각들의 거침없는 표현들 덕분에 역동적인 대화와 문화를 만들어 낼 수 있었던 것 같다.

 

다만, 이 글에서 분명히 하고 싶은 것은 남성동성애자 문화 내에서 일어나는 두 가지 용어 “뽈록이”와 “끼순이”에 대한 견해와, 메갈리아뿐 아니라 온라인 곳곳에서 사용되었던 “똥꼬충”과 “에이즈충”이라는 표현이 성소수자 혐오발언이라는 주장이다.

 

남성 동성애자의 언어사용을 둘러싸고 이어지는 논의들은 여성 인권 신장과 성소수자 인권 신장에 아주 중요한 발판이라는 생각이 든다. 비록 이 글은 특정 단어에 대한 성소수자 혐오성을 설명하는 것때문에 논조가 한쪽으로 쏠린 느낌이 분명히 있다. 그렇지만 강조하고 싶은 것은 남성 동성애자 문화 내에 팽배한 여성 혐오 또한 분명히 지적 받고 비판 받아야 하며 고쳐져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남성 동성애자들도 남성 이성애자와 마찬가지로 페미니즘에 대한 공부를 해보거나 접한 사람 아니면 이 가부장제 사회가 제공하는 여성의 대상화나 여성 혐오에 똑같이 사로잡혀 그것이 폭력인지도 모른 체 여성들을 억압한다. 페미니즘에 대해 공부한 사람일지라도 (나를 포함하여) 가부장제에서 남성은 여성에 대한 억압의 가해자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성적지향을 떠나 남성은 끊임없이 남성으로서의 특권을 포기하고 단순히 개인적인 문제에서 벗어나 구조적인 문제를 관찰하며 사회적 약자로서 여성을 더 이해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