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같았으면 월요일 아침 답답한 출근길 생각에 즐겁지 않은 일요일을 보냈을 법한데, 지난 한 달은 모아온 탄원서를 헌법재판소에 제출한다는 생각에 조금은 가볍게 한 주를 시작한 듯하다. 월요일 아침이어서인지 몰라도 인사동에 위치한 헌법재판소 앞은 생각보다 한가하였다. 도착할 무렵에는 맑은 하늘이 무색할 정도로 엄숙한 분위기의 헌법재판소 앞을 몇 명의 사람만이 지나가고 있었다. 한쪽에선 기자회견 준비로 바삐 움직이는 활동가들의 모습이 보였다.

군형법 92조의 위헌성

군형법 92조는 동성애자를 차별하며 처벌하고 있는 대표적인 법률로서 이미 개정되거나 폐지됐어야만 했다. ‘계간(鷄姦) 기타 추행을 한 자는 1년 이하 징역에 처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는 이 법률은 지난 몇 년간 성소수자 단체는 물론 인권, 법조, 여성계로부터 끊임없이 개정 요구를 받아왔다. 국가인권위원회도 2006년 국가인권정책기본계획(NAP)을 통해 해당 조항이 동성애 혐오와 편견에 기초하고 있음을 밝히고 법의 정비를 권고한 바 있다.

여기서 ‘계간’ 조항은 남성 간 성행위를 의미한다. 우리 사회에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특정 성행위 자체를 동물과 비교하며 폄하하고 있는 것도 문제지만 더 나아가 추행이라는 표현과 바로 연결되어 있어 동성애가 얼마나 혐오스러운지를 설명하고 있다. 또한 폭행, 협박이나 위계, 위력 등의 강압적 요소가 없는 행위마저 범죄로 규정하고 있어 법률존치의 필요성과 타당성에 심각한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합의에 의한 이성 간의 성적 행동이 이 조항으로 처벌받고 있다고 보기 어려운 상황에서 추행죄를 유지하는 것은 바로 동성애자 군인의 성적 자기결정권과 평등권,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를 침해할 소지가 충분히 존재한다. 

국방부는 이 법률이 폐지되면 군 기강이 흐트러져 혼란이 야기되고 군대 내에서 동성애가 전면적으로 허용될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 역시 객관적인 사실을 고려하지 않은 억측일 뿐이다. 동성애자의 군복무를 허용하고 있는 유럽 국가들과 캐나다, 호주, 이스라엘, 대만 등에서는 동성애자의 존재가 부대의 전투능력과 단결을 저해하지 않는다는 여러 연구결과가 나와 있고 동성애라는 존재와 감정의 문제를 허용과 불허라는 단편적인 잣대로 판단할 수 없음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오히려 이 조항이 유지됨에 따라 군대 내의 고질적인 성폭력 문제는 해결되지 못한 채 동성애 혐오증만 부추겨 성군기 문란의 책임을 동성애자들에게 덧씌울 수 있다. 

1,500명이 함께 한 탄원서 작성 캠페인

끊임없이 문제점이 제기되어 온 군형법 92조가 다시 주목받기 시작한 건 2008년 8월부터다. 육군 22사단 보통군사법원은 해당 법률을 평등권과 성적자기결정권,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를 침해할 소지가 있다며 헌법재판소에 위헌법률심판을 제청하였다. 이 소식을 접한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와 동성애자인권연대는 공동으로 군형법 92조의 위헌성을 적극적으로 알려나가기로 했다. 작년 12월 헌법재판소 앞에서 법조, 여성, 성소수자, 인권 등 각계의 의견서를 제출한 이후 탄원서를 직접 조직하는 활동을 시작했다. 성소수자들이 많이 이용하는 온라인 사이트와 게이들이 주로 다니는 종로3가 포차거리, 업소를 돌아다니며 헌법재판소에 제출할 탄원서를 받았다. 자신의 개인정보를 자세히 적어야 했기 때문에 캠페인 자리를 피하거나 멀리 돌아가는 이들도 있었지만 3월28일과 4월4일 두 차례에 걸쳐 실시한 종로지역 캠페인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그 누구보다 성소수자들이 자신의 문제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짧은 시간에 더 많은 참여를 유도할 수 있었다. 1,500명 탄원서가운데 거의 1/3정도는 종로지역에서 받은 것이다. 탄원서 작성은 4,5월에 있었던 굵직한 행사들(여성영화제 등)과 집회현장(4월4일 국제반전공동행동, 5월1일 노동절 집회 등)에서도 이어졌다.

이렇게 모인 탄원서가 총 1,500장이다. 2003년 엑스존(www.exzone.com) 사이트가 청소년유해매체물로 규정된 것에 반대하기 위해 시작한 탄원서 캠페인(당시 약 3,000부 정도의 탄원서가 모였고 시가지나 대학가에서 직접 탄원서를 받았다.) 이후 6년 만에 시도한 이번 캠페인은 사회적으로 큰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많은 호응을 얻을 수 있었다. 아쉬운 점은 비교적 적은 활동가들이 캠페인 준비와 일정을 조정하다보니 시민인권단체 회원, 활동가들을 직접 조직하거나 간담회, 설명회, 토론회 등을 통해 군형법 92조의 위헌성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하였다는 점이다. 우리에게 좀 더 시간이 주어졌다면 성소수자들을 대상으로 한 다양한 캠페인을 기획할 수 있었을 것이고 그 공간에서 더 많은 탄원서를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군형법 92조 위헌판결 뿐!!





▲ 6월8일 1,500명 탄원서 제출 기자회견 사진



기자회견을 준비하는 사람 4명, 기자 4명. 조금은 썰렁한 분위기였지만 1,500명 탄원인들의 요구를 담은 기자회견이 힘차게 시작되었고 경과보고 및 성명서를 함께 낭독한 뒤 묵직한 탄원서는 헌법재판소에 최종 제출되었다. 위헌법률심판 제청이 1년이 다 되어가지만 헌법재판소에서 어떤 움직임이 있는지 아직까지 확인되지 않고 있다. 헌법재판소는 2002년 6월 군형법 92조에 대한 최초의 헌법소원 심리에서 '군대가정의 성적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해당조항이 존재해야 한다'며 해당 사건을 기각한 바 있다. 이번에도 우리의 기대와는 다른 결과가 나올 수 있다. 7년이 지났고 사회인식의 수준이 많이 변했다고 말하지만 법과 제도 안에서 성소수자들은 여전히 불건강하고 부도덕한 집단일 뿐이다. 최근 대법원의 2008년 5월 군형법상 ‘추행’ 판단 판결(2008도2222)에서도 동성 간 성적 행위를 “객관적으로 일반인에게 혐오감을 일으키게 하고 선량한 성적 도덕관념에 반하는” 것이라고 판시하지 않았는가?

군형법 92조의 위헌성을 알렸던 탄원서 캠페인은 결과와 상관없이 우리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었던 활동으로 기억될 것이다. 자신감은 개인의 삶을 변화시키기도 하지만 새롭게 등장하는 성소수자 관련 이슈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가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하는지 답을 제시해 주기도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감을 함께 경험한다는 것은 매우 소중한 일이다. 1,500명의 탄원서 제출은 활동의 마무리가 아니라 시작이 되어야 할 것이다. 군형법 92조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전향적인 판결을 기다리고 있는 것보다 이 사건을 계기로 동성애 혐오를 조장하는 법과 제도에 맞서 싸우기 위한 또 다른 행동들을 우리 함께, 만들어가자.


정욜 _ 동성애자인권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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