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회원 이야기/행성인 활동가 편지

[활동가 편지] 행성인, 그 커다란 이정표 아래에서

by 행성인 2016. 9. 19.

주원(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사진 촬영: 주원

 

활동이라는 단어가 민망할 정도로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이하 행성인)에 한쪽 발만 담그고 있는 주원입니다. 행성인 웹진팀과 퀴쓰 스터디 소모임에서 얼굴을 비치고, 지금은 성소수자 운동사 구술 아카이브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사회 정의 구현에 관련된 공부를 하던 대학 시절, ‘과연 나에게 활동(activism)이란 무엇일까’ 라는 고민을 많이 했어요. 인종차별 반대의 역사, 여성운동의 흐름, 성소수자 운동과 퀴어이론, 관련 비평들을 읽고 공부할수록 우리가 매일 싸우는 이 투쟁이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항상 인지하고, 그 싸움에 나도 동참하고 있다 확신했었죠. 그리고 이 싸움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각자 다른 능력으로 운동을 풍성하게 만들 수 있다 믿었고요.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 얼굴 보이는 것이 어려웠던 저에게 활동이란 공부하고, 연구하고, 지지의 목소리를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믿음과 신념이 뚜렷하던 미국 유학 생활을 마치고, 군대라는 제도에 마지못해 편입하게 되었을 때, 활동은 또 다른 숙제로 다가왔습니다. 학교에서처럼 마음과 뜻을 같이하는 친구를 쉽게 찾을 수 없었고, 지적 연구를 할 수 있는 환경도 순식간에 사라져버렸기 때문이죠. 그들의 부재뿐 아니라 제가 혼신을 다해 거부하는 국가 폭력과 젠더 폭력이 함축된 그곳에서 활동이란 불가능하다 느껴졌습니다. 의식의 끈을 놓지 않기 위해 쓰던 일기와 블로그도 점점 뜸해지고, 어느 순간부터는 사회 문제를 외면하게 되더군요. 국가가 군대라는 시스템으로 시민에게 가하는 최종 목표란 이런 것이겠죠. 국가의 억압에 절대 굴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는데, 혼자라는 고독감 속에 몸에 배어있던 습관 (비판적 인식과 채식) 들로만 사회적 실천을 겨우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점점 한국 사회와 군생활에 적응을 해 나가고, 정신을 다시 가다듬었을 때, 내가 원래 하고자 했던 그 일을 하고 싶어졌습니다.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목소리를 내고 싶었습니다. 그 때 처음으로 찾아간 곳이 행성인이었죠. 어릴 때부터 동성애자인권연대라는 이름으로 익히 알던 곳이기도 했고, 대학시절 학사 논문 쓰면서 인터넷으로 웹사이트도 방문해서 친숙했거든요. 한국에는 적을 두고 있는 네트워크도 없고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 지 모르던 터에 행성인은 한국 성소수자 운동과 문화의 중심이라는 느낌도 들었어요. 성소수자의 다양성을 인지한 단체명 개명도 저에겐 중요한 요인이었고요.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무엇을 잘 할 수 있는지 모르는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행성인은 저에게 활동에 대한 방향을 다시 제시해주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행성인 활동이 이제 10개월이 되었네요. 군인 신분으로 참가했던 신입회원 모임으로부터는 벌써 1년도 훌쩍 넘었고요. 낯을 많이 가려 처음에는 두렵고 용기가 많이 필요했지만, 지금은 그래도 많은 분들과 친해지고 익숙해져서 마음을 더 열게 되었습니다. 특히, “나는 글만 써야 해.”라는 무의식의 압박 속에서 걱정하던 중, 이번 구술사 프로젝트는 저에게 새로운 기억과 감동을 안겨주었어요. 무엇보다 어린 시절 이름으로만 알던, 한국 성소수자 운동의 중심에 계시던 분들과 같은 공간, 같은 시간 속에서 과거를 회상하고 역사를 적립하는 순간들은 감격스러운 동시에 저를 많이 부끄럽게 했습니다. 아직도 많이 어렵지만 현장에 더 많이 참여하고 이를 토대로 이론화하는 것의 중요성을 새삼 느끼게 된 계기였죠. 사회 정의를 위해 각자 할 수 있는 능력과 재능이 다르다는 생각을 해왔고, 사람이 두려웠던 저는 책과 이론에만 집중했었거든요. 물론 여전히 각자 할 수 있는 일이 다르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지만, 실제로 변화하는 이 사회가 그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활동가의 물리적인 노력과 현장 투쟁으로 이루어진다는, 다소 교과서적인 사실을 새삼 깨달았어요. 글만 읽고 쓰면서 ‘나 아니면 누군가가 하고 있겠지’, ‘과연 이렇게 싸운다고 달라지는 것이 있을까’ 하는 생각들을 끝없이 번갈아 하던 저에게 깨달음과 부끄러움을 가져다 준 것이죠. 이런 성찰의 기회를 갖게 해준 행성인에 감사의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확실히 저는 소위 말하는 길거리 활동가의 성격은 못 되는 것 같아요. 많은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이 어색하고, 두렵고, 부담스러울 때가 많아요. 소규모 모임이 편하고, 순간적인 판단이나 직관적인 언쟁은 여전히 어려워요. 집회장소는 말할 것 없이 힘들고요. 그래서 다른 활동가들이 보시기에 어떻게 생각하실지 걱정도 많이 됩니다. 하지만 저는 저 나름대로, 제가 가지고 있는 능력으로 활동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저에게는 그게 글과 연구인 것 같아요. 권력은 끊임없이 우리의 존재를 지우고, 침묵시킵니다. 제 사명은 이 “사라짐”을 다시 파헤치고, 보여주고, 드러내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이런 일에 대해서는 잘 해왔음을 학창 시절에도 증명했고 앞으로도 더 잘 할 자신도 있어요. 연구와 글쓰기에 있어서는 욕심도 많고요. 이게 저의 활동이라고 생각해요. 행성인 안에서는 현재 하고 있는 활동의 내실을 다지고, 기회가 나는 대로 다른 팀 모임에도 참여할 계획이에요. 이번에 구술 아카이브 프로젝트를 하면서 노동권, HIV/AIDS, 청소년 성소수자 인권이 모두 연결되어있다는 사실을 새삼 느꼈거든요. 좀 더 적극적으로 회의에 나가 볼 생각입니다.


지금도 많은 일을 하고 여러모로 바쁜 행성인에 바라는 딱 한가지가 있다면, 저 같은 내성적인 신입회원들이 항상 얼굴을 비추진 못하더라도, 행성인에 발을 끊지 않을 수 있도록 초반에 관심을 가져주셨으면 해요. 신입회원 모임 이후에 행성인에서 주최하고 후원하는 모임에 몇 번 나갔었는데 아는 사람도 없고 말 붙이기도 어색해서 쭈뼛쭈뼛 댄 적이 잦았거든요. 저는 그래도 기회가 닿아 활동을 하게 되었지만 웹진팀에서 먼저 연락 주시지 않았다면 아마 저도 행성인에 발을 굳히기 힘들지 않았을까 싶어요. 많은 회원들이 관심은 많지만 처음 활동을 시작하고 무엇을 어떻게 어디부터 해야 하는지 난감한 경우가 많은데, 이때마다 새로 참여하는 얼굴들을 기쁘게 맞아주고 쉽게 새로운 그룹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하는 기제가 행성인 안에 있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이후에 활동을 꾸준히 하는 건 물론 개인의 선택이지만 말이에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앞으로 신입회원 모임에도 종종 나가야겠어요!


연휴의 마지막 날, 이 글을 마무리합니다. 행성인과 함께 할 수 있어서 기쁘고 뿌듯하네요. 어느 분들에게는 힘들었을, 또 누구에게는 휴식이 되었을 이번 추석, 모두 건강히 지내셨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