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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소식/해외 인권소식

너와 나의 경계를 넘어서 - 미국 트럼프 정권의 중동 출신 이민자 입국 금지 행정 명령을 보며

by 행성인 2017. 2. 2.

주원(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웹진기획팀)

 

전국이 그렇게 호들갑을 떨던 설이 끝났다. 예상치 못한 정신적 스트레스로부터 탈피하려는 나는 설 이튿날 버스에 몸을 싣고 무작정 집 밖으로 나왔다. 연휴의 아침이라 그랬는지, 아니면 눈이 와서 그랬는지, 버스 안은 한산했고 잠시나마 내 마음을 조용히 들여다 볼 수 있었다. 고요한 버스안과 달리, 살며시 들여다 본 내 마음 속은 이미 아침에 잠깐 본 미국 소식으로 가득했다. 

 

현지시간으로 지난 금요일, 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는 중동 7개 국가 출신의 이민자들의 미국 입국을 금지하는 행정 명령을 내렸다. 미국 시사잡지인 ‘더 아틀란틱 The Atlantic’에 따르면, 이 행정명령은 난민들을 향후 120일 동안 미국으로의 입국을 금지하고, 시리아 난민들의 경우에는 무기한으로 입국을 금지한다. 더욱이, 이 행정명령으로 중동 국가 7개국 출신의 사람들 중 합법적인 비자와 영주권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의 입국 마저 금지한다는 것이다. (시민권 소유자는 영향을 받지 않는다) 이 행정명령이 도입되자마자 당장 미국으로 입국하던 수많은 중동 국가 출신 이민자들은 공항에서 구류되거나 입국이 거부되었다. 가족은 생이별을 해야 했고, 이민자와 난민들은 삶의 터전을 하루아침에 잃어버렸다.

 

 

이슬람혐오 (Islamophobia)와 배제의 언어

 

트럼프 정권의 이러한 행보는 미국 내에 펴져있는 이슬람-무슬림 혐오 (Islamophobia)에 기인한다. 미국 2001년 9.11 사건을 필두로, 수 년간 국제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이슬람 국가(ISIS)’라는 이름의 무장단체 테러 위협까지, 이슬람이라는 종교를 ‘올바른 시민의 평화’를 위협하는 ‘절대적인 악의 테러리스트’로 규정짓는 담론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ISIS는 이슬람 종교의 일부인 극단적인 무장 세력으로 이슬람 전체를 대표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ISIS의 실제 피해자의 대부분이 무슬림이다. 또한 2013년에 발표된 프린스턴 대학교 연구진의 연구에 따르면, 미국 내에서 일어나는 테러리즘의 오직 6%만이 이슬람 극단주의자에 의해 행해졌다.  나머지 94%는 다른 조직이나 개인에 의해 일어난 테러리즘이라는 말이다.

 

 

그림 1. 이슬라모포비아

 이미지 저작권: Albert Mestre 

 

일부 극단 세력의 행보로 전체 종교를 판단하고 특정 종교와 이를 실천하는 사람들의 삶을 국가차원에서 규제하는 것은 종교를 기반으로 한 차별이다. 미국 내에서 온갖 혐오 발언으로 유명한 웨스트보로 침례교 (Westboro Baptist Church)의 행동으로 전체 기독교인의 삶이 정부에 의해 규제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또한 ‘외국인의 유입을 막는다면 테러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발상은 위험하다. 보이지 않는 상상되는 ‘적’을 상정해 놓고 그들을 격멸시켜야 한다는 논리는 역사를 통해 수도 없이 반복되었다. 기득권층의 이득을 위한 전쟁과 무고한 희생이 그 역사의 결과였다. 이 행정 명령을 정당화 하는 구호 역시 ‘테러리즘으로부터 (백인) 시민을 보호한다’는 것인데, 위의 통계에서도 알 수 있듯이 테러리즘과 무슬림 인구는 상관성이 낮으며 특정 국가 출신의 이민자를 규제하는 것은 테러 예방에 효과적이지 않다.

 

 

국 배제의 역사 – 주변의 관점에서 

 

트럼프 정권의 행정명령이 충격적이기는 하지만 이민자들에 대한 차별적 배제는 미국의 역사에서 처음 있는 일이 아니다. 1882년 미국 연방 정부는 중국인의 이민을 법으로 금지하는 법을 통과시켰다. 1850년대 미국 대륙 횡단철도 공사를 위해 노동력이 필요하던 시기에는 적극적으로 중국인들의 이민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공사가 완공되고 노동력의 수요가 낮아지자 이미 미국에서 생활을 하던 중국인들에 대한 혐오적인 담론 (‘중국인 남성은 남성성이 결여되었다’, ‘중국인들은 개, 고양이, 쥐를 먹는 야만인이다’ 등)이 형성되었고 출신국가와 인종을 기반으로 한 이민 차별이 합리화 되었다. 오랜 기간 노동으로 인해 미국에서 삶의 터전을 갖게 된 수많은 중국인들은 가족을 불러 올 수도, 시민권을 획득할 수도, 미국 내에서 다른 직업을 가지거나 결혼을 할 수도 없게 되었다. 이 법안은 제 2차 세계대전 시기인 1943년 까지 지속되었다. 


 

그림 2. 일본인 억류 캠프: 아칸소 주 제롬에 위치한 일본인 억류 캠프장 전경, 1942년

 

제 2차 세계 대전 동안 미국 태평양 해안에 주로 거주하던 일본인들은 ‘미국과 전쟁하는 일본의 스파이의 위험으로부터 미국인을 보호한다’는 명분하에 정부에 의해 강제로 색출되어 정부가 지정한 장소에 억류되었다. 그 숫자는 11만명을 넘었으며, 이중 3분의 2 가량은 미국 시민권 소지자였다. 그 당시 미국 정부에게 일본계 미국인들은 전쟁으로부터 보호해야 할 ‘미국 시민’이 아니었다. 1942년 2월에 실효된 이 법안은 우리도 잘 아는 루즈벨트 대통령에 의해 가결되었으며 구류된 사람들은 좁고 허름한 공간에서 1946년 까지 약 4년간 삶을 지속해야 했다. 

 

이번 무슬림을 대상으로 한 행정 명령이 새롭지 않은 것은 미국 사회 소수자에 대한 억압의 역사가 반복되기 때문이다. 지난 대선 기간 동안 도널트 트럼프는 미국 내 거주하는 무슬림 미국인들과 거주자들을 국가가 등록, 감시할 수 있는 무슬림 등록법안을 주장했는데, 이 때 이 주장에 반대하는 연대의 목소리를 낸 집단이 일본계 미국인 공동체였다. 결국 이 역사의 반복은, 대상만 계속해서 달라 질 뿐, 언젠가는 다른 타자화 된 집단이 억압 받을 것임을 시사한다. 이 역사의 굴레에서 탈피하기 위해서는 근본적으로 ‘나’와 다른 집단과 개인에 대한 타자화로부터의 탈피를 요구한다. ‘나’의 경험이 ‘너’의 경험이 될 수 있고, ‘너’와 ‘나’를 향한 억압은 그 궤를 같이 하기 때문이다.

 

 

이민자 혐오와 한국 사회

 

이러한 이슬람과 이민자 혐오는 한국 사회에서도 만연하다. 단적으로 지난 국회의원 총선 때 기독당이 동성애 반대 구호와 함께 이슬람 반대를 내걸었고, 이민자들이 범죄와 마약을 갖고 들어온다는 편견 역시 확산되어 있다. 이민자들의 자녀는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한국사회의 동등한 구성원이지만 사회에서 배제 당한다. ‘불법’ 이주민들은 국가 보험이나 복지의 어떠한 혜택도 받을 수 없으며 인간으로 살아가는데 필요한 기본적 권리 조차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 ‘싫으면 너네 나라로 돌아가라’는 태도는 미국 트럼프 정부의 그것과 다를 것이 없다. 


이러한 배제의 언어는 언론에서도 쉽게 접할 수 있다. 최근 제주에 늘어나고 있는 외국인 관광객 범죄 중 중국인 관광객의 비중이 70%에 달한다는 기사를 접했다.  이에 대한 대책으로 언론은 중국인들의 비자 발급을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을 소개했다. 이러한 주장은 ‘범죄가 중국인이기 때문에 발생했음’을 가정한다. 상관관계는 인과관계를 뜻하지 않는다는 통계의 기본적인 원칙을 무시한 이러한 언급은 혐오를 조장하는 배제적 언어의 전형적인 예시이다. 국내 범죄 분석에 있어서는 다양한 범죄 유형과 동기, 상황 등을 분석하여 체계적으로 문제에 접근하려고 하지만 외국인 범죄에 있어서는 단순히 수치화 하여 출신 국가 문제로 환원한다. 이런 방법으로 특정 집단 전체를 규제하는 것은 범죄율을 낮추는 데 효과적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인종차별적이다.

 

 

타자화의 경계를 넘어서 

 

이슬람 혐오, 이민자 혐오의 기저에는 타자화와 배제의 언어가 숨어있다. 타자화는 ‘나’로부터 다름을 강조하여 ‘너’라는 존재를 만들어내는 과정이다. 이 과정은 ‘나’라는 존재가 A라는 존재의 특질을 이용하여 나와의 이질감을 강조한다. A라는 사람의 존재를 A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예를 들어 흑인 A, 장애인 A, 여배우 A등의 명명을 통해 A의 존재를 단순하게 환원시키거나 왜곡한다.

 

이 타자화 과정에는 ‘나’와 ‘너’를 구분하는 경계가 생긴다. 이슬람과 이민자를 ‘우리’가 아닌 ‘너희’로 상정한다. 이렇게 타자화 된 집단은 그 집단을 규정 짓는 특질 (예를 들면 아시아인, 여성, 트렌스젠더 등)과 상관관계가 없는 편견과 혐오를 만들어 낸다. ‘흑인은 춤을 잘 춘다’, ‘여성은 깨끗하다’, ‘무슬림은 테러리스트다’ 등이 우리가 흔히 접할 수 있는 타자화를 통한 편견이다. 또한 타자화는 특정 그룹 안 개인의 다양성을 지우며 어떠한 행동을 그 특질로 환원한다. (운동을 좋아하는 여성의 존재가 무시당하거나 흑인 가수의 노래 실력을 흑인이라는 사실 탓으로 환원시키는 경우) 타자화된 집단은 스스로를 표현하고 개개인의 다름을 보여줄 주체성을 빼앗긴다. 주체성을 상실한 타자화 된 집단은 존엄성 또한 상실한다. 이렇게 대상화된 집단은 너무나 쉽게 ‘우리’의 ‘적’이 되고, 배척 대상이 되고, ‘죽어도 되는 사람’이 된다. 이슬람 혐오와 이민자 혐오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근본적으로 이 경계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나와 다른 사람이 ‘우리’가 되고, 무슬림이 동료가 되고, 이민자가 이웃이 될 때, 우리는 배제의 역사의 악순환을 끊어낼 수 있다.


 

그림 3. 국경 사진: 텍사스 프로그레소 호수 남부의 미국-멕시코 국경 벽, 2016년 3월

이미지 저작권: Rebajae 

 

타자화의 경계, 즉 ‘너’와 ‘나’의 경계를 허무는 접근방식으로 이슬람 혐오와 이민자 문제를 들여다 보면 타자화의 언어가 이민자 혐오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사회 중심부에서 주변으로 대상화되는 집단들에 대한 배제도 같은 맥락에서 접근 할 수 있다. 성소수자 역시 타자화되는 대표적인 집단 중 하나다. 타자화된 성소수자들은 동등한 사람으로 취급되지 않는다. 사회 중심에 존재하는 시스젠더 이성애자들에게 성소수자란 존엄성이 없는, 얼굴도 없는, ‘죽어 마땅한 존재’가 되기 쉽다. 성소수자들을 향한 폭력의 언어 역시 ‘나’와 ‘너’를 구분하는 경계로부터 나온다. 성소수자 혐오세력으로부터 쉽게 들을 수 있는 수많은 편견과 혐오적 발언들(‘성소수자는 더럽다’, ‘게이는 여성스럽고 레즈비언은 남성스럽다’, ‘바이섹슈얼, 팬섹슈얼은 문란하다’, ‘트렌스젠더는 정신병이다’, ‘HIV 감염인은 문란하다’ 등)은 이 경계 안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경계의 벽 너머에 있는 사실은 왜곡되고 이는 혐오로 이어진다. 주체성은 사라지고 대상화 된다.

 

타자화의 경계가 허물어지면 성소수자도 역시 이 땅에서 숨쉬고 살아가는 내 이웃임을 경험할 수 있다. 성소수자도 존엄성을 가지는 존재이며, 성소수자 중 누군가는 가족을 구성하기도 하고 하지 않기도 한다. 먹고 살기 위해 일하기도 하고, 학교에서 학업으로 스트레스 받기도 한다. 누군가는 데이트에 앞서 마음 설레지만 누군가는 연애에 별로 관심이 없다. 이러한 다름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이 사회를 함께 구성하고 있는 구성원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게 된다. 타자화의 경계를 극복함으로써, ‘나와 다름’이 배척되고 사라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공존하는 존재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다름에 대한 다양한 혐오와 그에 맞서는 투쟁이 서로 배타적인 일이 아닌 이유다.

 

 

서로가 함께하는 공동체를 위한 연대의 목소리

 

도널드 트럼프의 행정 명령 이후 미국 전역에서 일어난 시위와 조직력은 우리에게 시민의 힘을 보여준다. 뉴욕 존 F. 케네디 공항과 로스 앤젤레스 LAX 공항 등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은 이번 행정명령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사람들만 모인 것이 아니다. 이번 행정명령의 부당함을 인지하고 연대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 다양한 사람들이 모였다. 서로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웃이고 동지임을 소리 높인다. 로스엔젤레스에 살고 있는 나의 친구는 아랍어, 이란어, 소말리어를 할 줄 아는 통역가를 모집하고 있고, 내가 유학생활을 보냈던 오하이오 주 콜럼버스에서는1월 30일밤 2000명의 시민들이 주 청사 앞에 모여 이번 행정 명령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다. 미국 법무장관은 대통령의 행정 명령을 거부했고 몇 시간 뒤 해임됐다. 서로 얼굴도 모르는 시민들의 하나된 함성들은 국가의 인종차별적, 종교 혐오적 억압에 굴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여준다. 동시에, “Refugees are welcome” (난민들을 환영합니다), “You are my neighbors” (당신은 제 이웃입니다) 등의 피켓들은 타자화의 경계를 허물어 내려는 인류애를 경험하게 한다. 

 

이 글을 마무리 지으러 이동하는 지하철에서 두 자녀를 데리고 있는 한 부부가 눈에 띄었다. 아빠는 중국어로 어린 딸에게 열심히 무언가를 설명 한 뒤에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어 유창한 한국어로 통화를 했다. 엄마는 피곤한 듯 둘째를 무릎에 앉히고 눈을 부쳤다. 도널드 트럼프의 행정명령이 이 가족의 일상과 겹쳐졌다. 이 사람들이 누구인지, 무엇을 하는 지 전혀 알 수 없지만, 오늘 하루를 나와 같이 살아가는 내 이웃임을 새삼 절감했다. 나는 이 가족이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국제혼 가정이라는 이유로 억압받는다면, 공항으로 열일 제치고 이웃을 위해 싸우러 나온 미국의 변호사, 통역가, 그리고 다른 시민들처럼, 나도 그들의 삶을 위해 같이 분노하고 함께 싸울 것임을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