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회원 이야기/회원 에세이

구두를 싫어하는 신데렐라

by 행성인 2017. 5. 9.

루카(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소녀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소녀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축복 속에서 태어나, 누구보다 행복한 유년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너무나도 일찍 어머니가 하늘나라로 먼저 떠나게 되면서, 소녀는 새어머니와 두 명의 새언니를 식구로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새어머니와 두 명의 새언니는 재를 뒤집어쓴 아이라는 뜻의 ‘신데렐라’를 소녀의 이름으로 바꾸어버렸고, 갖은 집안일과 허드렛일을 도맡아 하도록 만들고야 말았습니다. 


어느 날, 소녀가 사는 나라의 궁전에서 큰 무도회가 열린다는 소문이 온 마을에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왕자의 신붓감을 찾기 위한 무도회였습니다. 새어머니와 두 명의 새언니는 화려한 드레스와 장신구로 잔뜩 치장한 채, 마차를 타고 궁전으로 향했습니다. 신데렐라는 산더미처럼 쌓인 집안일을 해결해야 했으므로, 무도회에는 갈 수 없었습니다. 


그런 소녀에게 요정은 도움의 온정을 베풀어주었습니다. 황금 마차와 마부, 어여쁜 드레스와 보석을 선물로 주었습니다. 그러나 선물에는 치명적인 단서 하나가 있었습니다. 자정이면 모든 것이 사라져버린다는 사실. 요정은 소녀에게 자정 전에 꼭 돌아와야 한다는 당부를 전하고는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렸습니다. 


무도회장에 나타난 소녀를 보자마자 왕자는 소녀에게 첫눈에 반해버렸습니다. 왕자는 소녀의 곁으로 다가가, 소녀의 손등에 입맞춤하며 함께 춤출 것을 권했습니다. 소녀는 미소로 왕자의 권유에 응했고, 소녀와 왕자는 흥겨운 음악에 맞추어 즐겁게 춤을 추었습니다. 노래가 끝나고 소녀는 왕자의 손을 놓으려 했습니다. 하지만 왕자는 소녀의 손을 좀처럼 놓아주려 하지 않았습니다. 


왕자는 고개를 숙여 소녀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개었습니다. 왕자에게는 무척이나 설레이고 달콤한 순간이었지만, 소녀에게는 무척이나 당황스러운 시간이었습니다. 소녀에게 달콤함을 주는 존재란 케이크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소녀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소녀는 자신에게 입을 맞추고 있는 왕자를 밀어내고 성밖을 향해 힘껏 뛰어 도망치기 시작했습니다.  


소녀를 놓치고 싶지 않았던 왕자는 근위대와 신하들에게 소녀를 데려오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근위대와 신하들이 소녀를 바싹 뒤쫓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소녀는 굽이 높은 유리구두를 신은 탓에 좀처럼 달릴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소녀는 유리구두를 벗어던진 채 맨발로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맨발의 소녀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른 달리기 실력을 보여주었습니다. 결국 근위대와 신하들은 소녀를 데려오라는 명령을 지키지 못했고, 왕자의 곁에는 소녀가 벗어던진 유리구두만이 남아있을 뿐이었습니다.  


왕자는 소녀를 영영 보지 못하게 될까봐 큰 시름에 빠졌습니다. 몇 날 밤을 고민한 끝에 왕자는 신하들에게 ‘나라의 모든 여성들에게 유리구두를 신겨보도록 하고, 유리구두가 딱 맞는 여성을 찾으면 바로 궁으로 데려오라’는 명령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시간은 흐르고 흘러, 어느덧 소녀의 집에까지 신하 한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새어머니를 비롯하여 두 명의 새언니까지 모두 유리구두를 신어보려 안간힘을 써보았지만, 그 중 유리구두의 주인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실망한 신하가 궁전으로 돌아가려던 찰나, 물을 길어 집으로 돌아온 소녀를 보게 되었고, 소녀에게도 왕자의 명령을 이행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요구에 소녀는 발을 내미는 대신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당신이 가져온 유리구두를 신지 않겠어요.”


소녀의 말을 들은 신하가 말했습니다.


“그럴 수는 없소. 이건 왕자 전하의 명이오. 누구도 어길 수 없소.”


소녀가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어쩔 수 없는 건 나도 마찬가지라서요.”


소녀의 말을 들은 신하가 물었습니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억지요?”


소녀가 반문했습니다.


“불시에 들이닥쳐 발을 내밀어보라 명령하는 것보다 더한 억지가 어디 있단 말입니까?”


소녀의 반문을 들은 신하가 다르게 물었습니다.  


“허, 이 아가씨 보게. 그래, 유리구두를 신을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이유가 도대체 뭐요?” 


소녀가 답했습니다. 


“구두를 신으면 재빠르게 도망칠 수가 없으니까요.”


소녀의 답을 들은 신하가 답답하다는 듯 말했습니다.


“나는 다른 이야기를 한 적이 없소. 그저 한 번 신어보기만 하라는 것이 내 말의 전부요.” 


소녀가 말했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이야기는 도망에 관한 것밖에 없는 걸요.”


소녀의 말을 들은 신하가 더 답답하다는 듯 말했습니다. 


“도망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오. 잘 알지 않소.”


소녀가 말했습니다.


“그렇지요. 제일 능사는 도망치는 사람을 쫓지 않는 겁니다. 그것만이 도주를 멈추게 하니까요.”


소녀의 말을 들은 신하가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더 이상 말장난할 시간 없소. 스스로 안 신겠다면, 강제로라도 신기는 수밖에.”  


소녀가 힘주어, 말했습니다.


“아니요. 더 이상 마부는 필요 없어요. 물론 마차도요. 궁전으로 갈 일은 없을 테니까요. 그러니 이제부터 나는 그저 맨발로 걷겠어요. 더 이상 무언가에 갇히고 싶지 않아요. 왕자의 입술이든, 구두든, 그 무엇이든 간에요.”


소녀의 각오를 들은 신하가 물었습니다.


“왜 부귀영화 얻을 기회를 스스로 포기하려 하는 거요? 케이크보다 달콤한 것들이 지천에 널린 곳이 바로 궁전이오. 부귀영화를 마다하는 소녀도 있단 말이오?”


소녀가 힘주어, 답했습니다.


“나는 케이크보다, 내가 좋아요.”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소녀는 신고 있던 신발을 벗어던지고, 궁전 반대 방향으로 힘껏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신하는 소녀를 쫓을 엄두조차 내지 못한 채, 제자리에 멍하니 서있을 뿐이었습니다. 소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계속해서 뛰었습니다. 숨이 턱 밑에 차오를 때까지, 멈추지 않고 뛰었습니다. 마을로부터 한참 멀어지고 나서야 소녀는 제자리에 멈춰서 숨을 골랐습니다. 숨을 고르며 소녀는 가슴 왼쪽에 두 손을 갖다대보았습니다. 소녀의 달리기가 멈춰도 소녀의 심장은 계속해서 달리고 있었습니다. 


소녀는 그렇게 영원히 달리는 법을 배웠습니다. 케이크 없이도, 왕자의 키스 없이도 계속해서 스스로의 심장을 뛰게 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소녀가 원하는 길을, 소녀가 원하는 대로 달리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렇게 잃어버린 이름도 되찾게 되었습니다. 


소녀의 이름은 바로,  ‘A’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