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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V AIDS

PL을 돌보는 여성과 여성PL의 이야기 - 여성은 갈 곳이 없다

by 행성인 2017. 12. 9.

편집자 주
HIV/AIDS 인권주간을 맞아 11월 30일 진행한 토론회 <그녀들의 이야기- 여성이 말하는 HIV/AIDS> 발제문을 웹진에 공유합니다.

원 글의 제목 PL에는 'People living with HIV/AIDS의 약자로 HIV감염인을 지칭한다.'각주가 있었습니다. 웹진 플랫폼 한계로 제목에 각주를 달 수 없어 이곳에 PL 의미를 적습니다.

 

 


권미란(한국HIV/AIDS감염인연합회 KNP+ 자문위원)

 


 

1. 첫 기억

2004년과 2006년에 세계에이즈대회를 참가한 경험만으로도 나의 시야는 다른 지역으로, 다양한 주체들에게로 흘러갈 수 있었다. 2004년에 성노동자, 노인, 어린이 감염인 등 한국에서는 낯선 주체들이 행진을 하면서 집단적인 요구를 하는 것 자체가 신기했고, 2006년에는 각 주체들이 왜 행진을 하는지 조금 더 궁금했다. 2006년에 내 남편이 제일 위험하다며 부시의 ABC정책을 비판하면서 성평등을 주장하는 걸 보았다.

 

 

○ “내 남편이 제일 위험하다”

 

콘돔만으로 에이즈확산을 막을 수 없는 증거들[각주:1]

2004714UN에서 '여성과 HIV/AIDS: 위기에 직면' 보고서를 발표했다. 그 보고서는 아프리카에서 결혼한 젊은 여성이 결혼하지 않은 비슷한 연배의 여성보다 더욱 위험에 처해있다고 전했다. 이것은 성불평등과 차별 때문이다. 특히 더 나이 많은 남편에게 콘돔을 사용할 것과 여성이 원하는 성행위를 요구하기가 쉽지 않다. 그리고 문화적으로 남편이 있는 여성보다 과부가 치료에 관한 정보를 찾기가 더 쉽다고 한다. 발표자는 부시의 에이즈정책 󰡐금욕, 순결, 콘돔을 사용하라(Abatain, Be faithful, Comdomise)‘를 비판하면서 성평등과 여성에 초점을 맞춘 정책이 없다면 국제적으로 에이즈에 대항할 수 없다고 말했다. 미국의 활동가는 부시의 정책에 대해 내 남편이 제일 위험하다고 표현했다. 사하라이남 아프리카에서는 감염인의 58%가 여성이고, 15~24세의 젊은 여성은 같은 나이의 남성보다 HIV에 감염될 위험이 2.5배나 높다. 대부분 재산권이 없는 그녀들은 에이즈치료제를 사먹을 수 없다. 그녀들에게 재산권과 성평등이 보장되지 않는 한 그녀들의 안전은 보장되지 않는다. 아프리카에서 여성운동진영이 에이즈운동을 하고, 에이즈운동이 여성에 의해 주도되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2. 맞이할 준비

HIV/AIDS인권연대 나누리+2004년부터 활동을 한 후 주로 만나게 되었던 감염인은 성인이면서 게이이면서 기초생활수급권자였다. 또 다른 고민은 성인 게이가 아닌 에이즈감염인을 만났을 때이다. (중략)

 

이 사연들의 첫 번째 공통점은 몇 다리 건너나누리+에 연락이 왔다는 것이다. 게이인 에이즈감염인은 동성애자인권연대나 에이즈감염인단체에 문을 두드려 볼 수 있다. 하지만 트랜스젠더이거나 이주민이거나 성노동자이거나 재소자이거나 여성이거나 청소년인 에이즈감염인의 경우 어디에 가서 함께 고민을 나누어야할지 난감할 것이다.

 

두 번째 공통점은 이 사연을 가진 이들의 어려움을 결국 해결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한국의 생존감염인수는 약 7천여명으로 인구대비 유병율은 극히 낮은 축에 속하여 정체성이나 사회적 처지별로 그룹화하기 어렵다. 작년 10차 아시아태평양에이즈대회에서 보았듯이 해외에서는 마약사용자, 성노동자, MSM, 청소년, 이주민 등 사회적 처지가 같은 에이즈감염인들끼리 그룹화하여 문제점과 해결책을 찾고, 조직적 대응을 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이것이 어렵다. 예를 들어 이주민 에이즈감염인이 처한 어려움은 이주민정책과 에이즈정책이 결합하여 낳은 결과이다. 따라서 이주민정책을 바꾸지 않으면 이주민에 대한 에이즈정책도 궁극적으로는 바뀌지 않을 것이다.(중략)

 

다양한 사회적 조건에 처한 에이즈감염인들이 실존하고, 한국의 에이즈정책속에도 존재한다. 취약한 집단에 대한 통제방식은 한국사회에서 그 집단의 사회적 지위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중략)

 

나누리+는 법과 에이즈에 관한 국제위원회의 보고서(2012) 내용을 빌어 1117~18일에 이주민, 재소자, 트랜스젠더, 성노동자, 성소수자, 청소년의 인권운동을 하고 있는 이들과의 간담회를 가졌다(이야기손님과 함께하는 시리즈간담회-“에이즈에 대해 얘기하기 좋은 날!” 20121117~18)[각주:2]


3. 수동연세요양병원 사건 뒤편, 그녀들의 이야기

20138월 수동연세요양병원에 간지 13일 만에 사망한 김무명. 그의 황망한 죽음을 계기로 3년간 에이즈수용소에서 벌어진 일들이 이 되어 쏟아져 나왔다. 질병관리본부는 201312월 그 병원과 위탁계약을 해지했지만 그때부터 장기요양이 필요한 에이즈환자들이 갈 곳을 찾기 위한 투쟁을 해야 했다. 에이즈환자를 돌보는 가족-어머니, 아버지, 누나, 여동생, 매형, 부인-을 처음 만났고, 이들은 모두 남성환자의 가족이다. ? 이들 중 지속적으로 상의를 할 수 있었던 가족은 여성들이었다. ?

 

그 병원에 있던 환자 56(20142월 기준) 중 여성은 6~7명인 듯하다. 여성환자의 가족은 만나지 못했다. 여성환자들은 그 병원에 있는 동안 다른 환자와 교류를 할 수 없어서 정보교류가 전혀 없었고, 그만큼 여성환자의 가족들도 정보에 접근하지 못했을 것 같다. 그 병원은 복도 등에서 환자들끼리 대화하는 걸 막았고, 위에 언급한 환자가족들은 여성환자를 거의 본 적이 없다고 했으며, 여성환자는 그 병원에서 나오게 된 이유를 모르고 있었고 다시 그 병원에 가게 될 줄 알았다고 했다. 그 병원에서 환자들이 다 빠져나온 것은 20152월인데, 여성환자들은 맨마지막에 나오게 된다. ? 현재 00병원 4베드외엔 여성환자가 갈 요양병원은 없다. 그나마 에이즈환자들이 가 있는 요양병원은 에이즈환자 병실을 별도로 운영하기 때문에 수가 적은 여성환자는 병실 베드수가 맞지 않아 여성병실이 없다.


○ 엄마가 아들 버리는데 사회에 뭘 바라느냐

故 김무명이 신촌세브란스병원에서 급히 수술을 받게 되면서 10여년간 떨어져 지낸 어머니와 만나게 되었다. 2013년 11월 ‘에이즈환자는 왜 사망했는가’ 증언대회를 하루 앞두고 어머니는 아들의 죽음에 대해 말하지 말라며 증언대회를 하지 말라고 전화했다. 증언대회 당일 염안섭은 어머니의 자필 서신이란 것을 들고 왔다.  


○ 가족대책위는 없니?

2014년 봄 질병관리본부가 수동연세요양병원과 위탁계약을 해지하고는 대체병원을 마련하지 않아 환자들이 쫓겨날 판이어서 긴급토론회를 했다. 토론회에 참석한 한 활동가가 나에게 보낸 문자. “가족대책위는 없니?” 그 활동가는 상황모르고 문자 보냈다며 미안해했다.


○ 결정권 없는 어머니

아들이 이른 나이에 HIV로 인해 요양병원 신세를 져야했다. 그는 몸이 호전되었지만 2015년에 그 요양병원에서 나온 후 아직까지 집에 가보질 못했다. 가고 싶지만 아버지가 못 오게 하기 때문이다. 병원에 올 때도 아버지는 어머니를 바래다주고는 차에서 기다릴 뿐 병실에 들어오지 않았다. 어머니는 밤낮으로 눈물바람이다. 어머니는 아들을 집에 데려오고 싶지만 결정권이 없다. 아버지도 큰 아들도 어머니의 얘기를 들어주지 않는다.


○ 제사상 차리는 여자

구정에 혼자 있을 그녀생각에 겸사겸사 갔다. 그녀는 찐하게 술을 사주겠단다. 그 전에 가야할 데가 있다며 떡집으로 간다. 제사떡을 맞춰야한다고. 남편은 수년전에 HIV양성 확진을 받자마자 아내를 못 알아보게 되었고 2년간 아내가 돌보다가 지금은 요양병원에 가있는 셈이다. 그녀는 남편의 형제자매들이 병문안 한번 안 오는 게 섭섭하고, 울화통이 날 때면 병실에 누워있는 남편사진을 형제자매들에게 일부러 보낸다고 한다. 남편 돌봄은 모두 그녀의 몫이고 경제적으로 체력적으로 많이 소진되었지만 며느리 역할도 해야 한다.  


○ 아이를 키워야만 하는 여자

유엔에이즈가 믿질 않아서 와서 직접 보라고 했다. 국립중앙의료원에 장기입원해있는 환자들의 병실을 돌았다. 환자들의 어머니, 언니, 부인들도 와서 유엔에이즈에 자신의 이야기를 내놓았다. 유엔에이즈가 그녀 남편의 병실에 들어섰을 때, 그녀는 자신은 아이를 키우고 있어서 병원에 와서 간병을 할 수도 없고, 집에서 남편을 케어할 수도 없다고 말했다고 했다. 그리곤 나에게 아이를 키우고 있다고 거짓말했다고, 그래야 남편을 요양병원에 보내야하는 당위가 설 것 같았다고 했다. 나는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아이를 낳고 키우지 않는다고 여자가 아무것도 안하는 사람, 할 일을 안하는 사람인게 아니라고, 나도 아이를 낳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 후에도 그녀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아이를 키우고 있다고 말했단다.


○ 열녀문

지속적으로 만나고 있는 가족은 어머니, 부인, 언니다. 그녀들의 마음은 복잡했고, 그녀들 간에 위치에 따라 미묘한 긴장이 있었다. (남성)간병인들은 남편을 돌보는 부인들에게 호의와 고마운 마음에 ‘열녀문’을 세워줘야 한다고 농담을 했다. 


○ 세 달 동안 말을 안했어

3개월마다 남편 약을 타러 병원에 오는 어느 날은 우리 집에서 자고 가라고 했다. 그녀는 정말로 세 달 동안 집밖에 나가지도, 누구와도 말을 하지 않았다고 했다. 연락 오는 사람도 없었다. 새벽 3시가 넘어가자 내가 거의 쓰러져서 이야기가 중단되었고, 다음날 눈뜨고서부터 그녀가 갈 때까지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다. 


○ 2016년 2월 10일 일기

00병원으로 갈 날짜 잡으라고 연락이 왔단다. 다행이다. 000 어머니한테도 연락이 갔을 것이라 짐작하고 전화를 했다. 간병비 부담 때문에 000의 아버지를 찾아갔다가 언덕에서 미끄러져 인대를 다쳐 석고 기브스를 했단다. 2주가 지났단다. 예전에 어머니가 지금도 아이 아버지를 찾고 싶은데 아이를 잘못 키워놔서, 할 말이 없어서 찾지도 못해. 재산 상속이라도 받아서 형편에 보탤까 싶은 생각도 해보지만 에이즈 걸렸기 때문에 찾지도 못해.”라고 했었다. 찾아가는 마음도 그랬을텐데, 가다가 다쳐서 119를 불러 병원을 가게 되고, 막상 갔더니 아들의 아버지는 올해 1월에 돌아가셨단다.......00병원에 가서 엎드려 절이라도 해야 할 판이다. 에이즈환자는 언제까지 자비를 구걸하고 자비에 목숨을 걸어야할까. 그 시간을 어떻게 견디며 살아낼까 싶다.


○ 언니들이 어떤 결정을 하더라도 욕하지 않을 거예요.

보호자들은 에이즈가 한국에서 가장 천대받는 병이라는 사실을 온 몸으로 느끼며 살아간다. 어디를 가든 찍소리도 못 내고, 늘 부탁을 하면서, 안절부절 못하면서 사는 게 몸에 배었다. 수동연세요양병원에 있을 때도 명절이면 떡이며 음식을 해서 날랐고, 병원에서 매몰차게 대해도 말은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눈물만 나왔다. 넉넉하진 않았지만 남한테 아쉬운 소리안하고 남한테 피해안주고 살았던 내신세가 추락하게 되자 환자를 원망하기도 했다가, “나 아니면 아무도 돌봐줄 사람이 없는환자에 대한 연민에 가슴이 저미기도 한다. 보호자들은 하나같이 환자와 같이 죽었으면 좋겠다고 말했고, 그럴 마음을 먹은 적도 있다고 했다.

 

인터뷰의 말미에 조심스럽게 물었다. 만약 환자들이 건강한 상태라면 지금보다 상황이 나을 것 같으시냐고. HIV라는 바이러스를 가지고 있을 뿐인, 지금보다 건강한 상태의 가족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지를 묻는 가정적 질문이었다. 하지만 보호자들은 자신들이 그 상황에서 환자를 떠나지 않을지, 혹은 환자 자신이 가족으로부터 버려지는 상황을 두려워하며 먼저 떠났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이 질문에 대한 보호자들의 답이야 말로 사회적 낙인 속에서 HIV감염인과 그들의 가족이 처한 현실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보호자들은 하루에도 수없이 지옥같은 상황을 끝낼 수 있는지를 스스로에게 묻는다. 그녀들의 어떠한 선택에도 우리가 비난할 수 있을까?[각주:3]


○ 그녀의 집은 어디인가

결혼직후 남편 유학위해 그녀는 직장 그만두고 외국으로 갔다. 8년을 뒷바라지하고 같이 귀국했다. 한국 오자마자 갑자기 걷지 못하고 말도 못하게 되어서 큰 병원에 갔는데 HIV확진을 받았다. 세상이 다 무너지는 것 같았다. 7년간 남편은 지방에 따로 살면서 직장생활을 하고, 그녀는 결혼안한 남동생집에서 친정어머니와 셋이서 살았다. 고향 살던 친정어머니가 그녀를 돌봐주러 올라온 것이다. 2010년 수동연세요양병원으로 간 후로는 줄곧 병원생활을 하고 있다. 남편은 비감염인이다. 그녀는 보호자란 말을 계속 썼다. 보호자는 엄마와 남동생이란다. “보호자에 남편은 포함되지 않는다. 남편 본지 4개월 지났다. 바쁜 거 뻔히 알아서 오란 소리 못한다.

 

 

수동에서 매달 병실비를 백얼마를 낸 거를 나중에 동생한테 들었다. 동생이 다 냈다. 그래서 장애판정을 받았다. 2급인가. 그걸 받으면 병원비가 싸진다고 해서. 병원비가 싸졌다고 하더라. 남편한테는 병원비 내달라는 말 못했다. 내가 병실비 보태지 말라고 했다. 남편이 수동에 따로 기부하니까. 몇천만원씩 한 것 같다. 나 잘봐달라고.

 

자궁적출수술 했다. 자궁내막증, 자궁근종이 있어서 생리혈이 너무 많고 나프록센만 들을 정도로 배가 아팠다. 국립의료원에서는 곧 갱년기가 온다고 호르몬제 먹으면서 좀 버티자고 해서 그렇게 했다. 00에서 간호사가 피 많이 나오면 안봐준다고, 수술하라고 해서, 케어 못받을까봐 했다. 엄마는 오빠 손주 봐주러 가고 동생은 이사를 갔다. 여기서 케어안해주면 갈 데가 없다.

 

(감염내과랑 산부인과 다니는 거 말고 아픈 거 없으니까 예전처럼 집에서, 간병인 불러서 지내는 건 어떤가)

 

민폐다. 돈도 많이 들고. 남편 빨래하고 밥하는 거 보면 신경쓰여 안보는 게 나아. 나 혼자 생활 못해서 민폐다. 나는 소뇌가 위축되어 특정행동을 하면 손이 떨린다. 밥을 먹거나 아침 배변때나 머리빗을 때 세수하고 얼굴 닦을 때 또 화나거나 흥분했을 때 손이 막 떨린다. 오른손이 더 심하다.

 

(남편은 지금도 자기가 청소하고 빨래하고 밥 다 할텐데 당신이 안해줘도 되지 않냐)

 

엉망으로 하고 있을 건데 보면 신경쓰이고 안보는 게 나아.

 

 

○ 그녀는 어디로 갔을까

결혼생활 도중 갑자기 2001년에 사지마비와 경련이 와서 치료를 받다가 미안해서 헤어졌다. 치료비를 다 감당해줘서 재산분할이나 위자료 같은 건 안받았다. 처음에 언니와 지내다가 고향에 내려갔다. 가족이 나를 감당할 수 없어 정신병원에 살다가 다시 언니네 집에서 지냈다. 혼자 지내기 어려워서 응암동에 있는 시립병원(서울시립은평병원, 정신과 종합전문병원)으로 옮겼을 때가 2006-7년경. 그때 HIV확진을 받고 집에서 지내가다 살 의욕이 없어서 약도 안먹고 자살시도 하고. 그러다가 중곡동 정신병원(국립정신건강센터?)에 갔는데 거기서도 몇 달 지나서 내가 에이즈라는 것을 알자 독방에 넣었다. 감옥 같아서 언니에게 부탁해서 나가게 해달라고 했다. 그 이후로 수동연세요양병원으로 갔다. 거기서 4년 지내다가 20153월에 00병원에 왔다. 지금 00병원에서 나가야 할 것 같은데 건강한편이라. 그러면 입주해서 청소하는 모텔같은데 취직하려고 한다. 더 이상 언니에게 기댈 수도 없고. 지금도 신경치료제를 계속 먹고 있다. (201610월에 그녀를 만나고 왔는데, 현재 그녀는 00병원에 없다.)

 
4. 그녀들의 복잡한 맥락

수동연세요양병원 사건 뒤편에서 만난 여자들, 201411HIV감염을 이유로 체험홈에서 쫓겨나게 된 장애여성의 이야기는 내가 에이즈운동을 그만두지 못한 이유 중 중대한 하나이다. 내가 겪었던 성폭력, 가정폭력, 불평등한 대우, 강요되었던 성역할이 그녀들의 이야기에 있었고, 그것들이 그녀들의 목소리를 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 복잡한 이야기를 어디서 누구와 상의할지조차 고민스러웠는데, 2017년 초 마침 여성정책연구원에서 연락이 왔다. 여성감염인 9명 심층인터뷰, 해외자료(유엔에이즈의 HIV전략과계획 수립시 젠더주류화 강조), 기존 연구 및 요구사항들을 연관시켜 보고서를 제출했다. 이 연구과정자체가 여성감염인의 처지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여성가족부에게 연구의 필요성을 설명하는 자리에서 ‘1000명도 안되는데 정책의 성과를 기대할 수 있나요?’라는 질문. 결국 채택되긴 했으나 단독연구는 아니었다. 설문조사를 시도한 적이 있으나 불가했다는 상담간호사들의 이야기, 애초 15명 인터뷰를 예정했으나 9명으로 마무리해야했던 이유 등. 하고 싶은 말이 많다. 같이 고민하고 싶은 이야기도 많다. 오늘은 그 시작이다.

 

 ① 성적낙인

동성애자들의 기이한 성행태=무서운 에이즈라는 낙인이 강하다. 여성에게도 더러움이란 이미지와 함께 창녀란 낙인이 형성되었다. 한국에이즈정책의 측면과 언론을 통해 여성이 가시화된 측면이 여성감염인에 대한 성적낙인이 형성된 경로라고 할 수 있다. 1985년 첫 HIV감염인이 신고되자 정부는 곧바로 1986년 일부 성판매여성 대상으로 HIV검사를 시행했고(3명 감염 확인), 1987년부터 등록된 특수업대부대상 검진 시작했으며, 19878월부터 모든 등록 여성에게 검진 확대했다.[각주:4] (1996년까지 성판매여성 감염인은 15명으로 전체 감염인의 3%)[각주:5]. 성병검진규칙(1978년 제정)에 HIV검사가 포함되었고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여성의 이야기는 거의 가시화되지 않는데 반해 언론을 통한 보도는 2017년만 보더라도 “창원 20대 여성 HIV감염 확인, 최근까지 성매매 추정....소재 파악 중, 감염확산 방지 등 지역보건 ‘비상(경남신문. 2017.5)”, “[단독] '에이즈' 감염 여중생 성매매…성매수 남성 추적 중(MBC. 2017.10)”, “[단독] 에이즈 보균 20대 女, 부산 전역서 성매매(부산일보. 2017.10)” 등 에이즈와 성매매를 결부시킨 보도뿐이다. 성폭력사건이 대부분 안면 있는 관계에서 발생하듯이 여성들은 대부분 친밀한 관계(파트너, 남편)에서 HIV감염이 되지만 ‘에이즈=창녀’라는 성적낙인이 강하여 성불평등과 HIV감염의 연관성, 여성이 처한 상황이 드러나지 못한다. 
 

② 성역할.성규범, 젠더기반폭력은 여성의 욕구, 바램, 목소리를 죽인다

여성감염인은 아픈 것이 미안하고, 미안해서 이혼하고, 혹은 가정폭력에 시달리더라도 HIV감염 때문에 이혼하지 못한다. HIV진료비를 감당하라는 요구를 남편에게 하지 못하고, 아들을 잘 못 키운(HIV에 감염되었으므로) 어머니는 아들의 아버지에게 도움을 청하지 못한다. 아이를 낳지 않은 여성은 남편을 요양병원에 입원할 수 있게 해달라는 요구를 못한다. 여성감염인은 갈 곳이 없고, 말도 잃었다. 


③ 여성의 지위는 제도접근을 어렵게 한다.

사회, 경제, 문화적, 인적 자원을 가지지 못한 여성은 자력화와 역량강화가 어렵고, 정보접근이 차단되고, 제도에 접근하기 어렵고, 고립되며, 치료를 지속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기도 한다. 부산 여성뿐만 아니라 우리가 만났던 혹은 인터뷰했던 여성들의 상황(혹은 생애)을 들었을 때 복합적인 어려움에 처해있는데 어디서부터 시작해야할지 막막하고, 인간은 총체적인 한 사람인데 각각의 지원제도는 지원하는 한 부분만 보니까 그 인간을 이해하기 어려운 제도이다. 장애인지원제도, 성폭력/ 가정폭력/ 성매매 피해 지원제도, HIV감염인 지원제도가 있지 않았냐고 반문할 수 있지만 이 제도들은 각각 분절되어있다. 현재 있는 제도와 지원들이 한계가 있을지라도 이용해볼라치면 별로 도움이 안된다. 무엇보다 HIV에 대한 공포와 편견은 이 제도들에 대한 접근을 가로막는 장벽이 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

○ 여성에게 에이즈란: 막판, 포기, 남아있지 않다, 여한이 없다

 

- (HIV확진받고) 처음에는 죽고 싶었죠. 근데 그때 당시에 결혼 생활을 하고 있었고 그 사람(남편)만이 저를 데리고 살 수 있겠거니 라는 생각 때문에 거기에만 매달려 있었어요. 그 사람한테만. (29)

 

- 지금은 뭐 아무생각 없어요. 진짜로 사귀고 싶다 이런 건 없어진지 좀 오래된 것 같아요. (그게 에이즈하고 관련이 있어요? ) 일단은 좀 표현이 좀 그렇긴 한데 주제 파악을 한다고 해야 되나? 누가 봐도 못났는데 못난 것을 지금 이제 실제로 자각하기 시작했다고 해야 되나 그런 거죠 뭐. 지금 제가 한발짝 떼기도 좀 힘들거든요. 근데 전동휠체어를 타기 전까지는 제가 그나마도 조금은 걸었었어요. 이제 타고 나서부터는 점점 자신감이 떨어지는 거죠. 자신감이 떨어지고 있는 상태에다가 (HIV)이거까지 걸려버리니까 더 급속도로 떨어지면서 이제는 지금은 남아 있는지 안남아 있는지도 모르겠네요. 그래서 그런지 사람들 앞에 나서기가 겁도 나고 그래요. (37)

 

- 아프고 그러니까 무당을 찾아갔지. 사람들이 병원가도 맨날 그렇고 그러니까 그런데 가보잖아. 다들 신기가 있니 어쩌니 그래. 내가 신기가 있고 무당기가 있으면 날 무당 시켜달라고 그랬지. 몸이라도 좀 그거하면 해보려고 한 거지. 이 병도 정말 없어질 수 있나 생각도 드는 거고. 나도 시범삼아 했고. 어차피 막판이니까. 그 병을 얻었으니, 막판이니 갈 곳도 없고 어디 취직해도 그렇고. (58)

 

-(성전환수술하러) 가는데 그 비행기에 타서 활주로로 탁 올라가는데 왜 죽을 때 그런다고 하는데 희한하게 지금까지 살아왔던 과정이 파노라마처럼 탁 지나가더라고. 뭐라 그래야 되나 죽을 수도 있다라는 생각에서 갔으니까. 보통 마음가짐이 아니었으면 어차피 가지도 않았을뿐더러 내가 아픈 상태에서 갔기 때문에 여기서 죽어도 여한이 없다 식으로 갔어요.(50)


 

성적낙인: 창녀

 

- 고시원 총무가 문을 따고 들어와서 성관계를 맺는 도중에 제가 거절을 하고 밀치고 뛰쳐나오긴 했거든요. 신고를 했는데 처음에 경찰서에서는 그쪽에서 당연히 잘못했다 이런 식이었는데 검찰청에서 무슨 조사 같은걸 다시 받으러 오라고 해서 갔는데 남자분들만 한 대여섯명 있고 저 혼자 앉아서 있는데 그 분들이 너는 HIV니까 너가 일부러 꼬신 거 아니냐 이러면서 제 지병을 들먹이면서 너는 싸구려다 라고 표현을 제가 들었어요. 그러면서 너는 그냥 합의봐라 윽박지르니까 저는 이제 무서워서 그냥 지장 찍고 나왔거든요.(29)

 

- 병원에서도 어떻게 감염되셨어요? 나는 여자니까 그걸 물어봐요. 예를 들면 병원 채혈실에서, 그 분들이 너무 놀래. 나같은 사람이 없거든. 그러니까 병명 확인하라고 옛날에는 병명이 다 떴는데 요즘에는 병명 확인 요망이라고 컴퓨터화면에 그렇게 뜨더라고. 자기들이 몰래 볼 수가 있나봐 환자 병명을. 그럼 깜짝 놀라갖고 어떻게 되신 거예요? 하고 조심스럽게 물어봐. 애기 아빠 때문에 감염됐다고. 그러면 애기아빠가 아니고 내가 어디서 옮아와갖고 감염된 거면 나는 완전 범죄자야? 힘내라고 얘기하는데 나는 그런 것도 스트레스에요. 만약에 그 상황이 아니라 내가 어디 가서 술집 창녀라서 내가 옮았으면 나는 완전히 진짜 범죄자예요? 그런 것도 어이가 없잖아요. 바꿔서 생각해도 어이없잖아요. 그렇게 해서 위로 받는 것도 위로가 아니었어요. (45)

 

- 내가 죄를 진거는 없거든 그거 밖에는. HIV. 남들이 생각할 때 그걸 하면 그걸 하니까. 그걸 꼭 대놓고 얘기할 수 없는 말이니까. 아직까지 우리나라는. 이거는 안 되는 거야. 나는 그런 말만 나오면 스트레스 받는 게 위안부사건만 들으면 혈압이 올라가.(58)

 

 

[참고1]

제    목 생활체감정책: HIV 여성 감염인의 차별 방지 및 건강권 강화 제도 개선
대상기관 보건복지부, 식품의약품안전처, 질병관리본부, 국방부, 여성가족부, 법무부, 국토교통부, 교육부, 인사혁신처
연구기관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여성가족부 발주)


□ HIV여성감염인의 인권 보장을 위해 다음의 내용에서 개선이 필요함.
 ○ 강제검진 폐지
 ○ 직업제한 타당성 검토 및 개선
 ○ 보호시설 감염인 차별 조치 개선 및 성병 검사 항목 삭제
 ○ HIV감염인 처벌규정 폐지
 ○ 의료차별 개선
 ○ 진료비 지원방식 개선
 ○ 강제적 역학조사 폐지
 ○ 출산 및 수직감염 예방 지원
 ○ 기초생활수급제도 개선
 ○ 주거 지원
 ○ 청소년 상담, 치료 및 성교육
 ○ HIV여성감염인 자조모임 활성화 및 참여 방안
 ○ 성별정정 제도의 문제점 개선
 ○ 성전환 수술의 어려움 개선
 ○ 돌봄지원서비스 연계 및 지원의 어려움 개선
 ○ 외국인 의료비 지원
 ○ 상담간호사 인력 충원


  1. 권미란. 국제에이즈회의 참관기- 캐나다에서 에이즈를 말하다. 2006. [본문으로]
  2. 권미란. 에이즈, 또는 에이즈에 걸린 ‘사람’-법과 에이즈, 한국 에이즈운동의 고민. 2012.12.1. http://lgbtpride.tistory.com/501 [본문으로]
  3. 보다 자세한 이야기들은 <인권오름>에 올린 호림의 글 “[방치된 자리, 수동연세요양병원] “죄인 아닌 죄인이 되고, 약자 아닌 약자가 되고”-에이즈 환자 보호자들의 목소리”에서 찾아볼 수 있다. 링크: http://hr-oreum.net/article.php?id=2731 [본문으로]
  4. 신규 HIV/AIDS 신고현황. 질병관리본부 [본문으로]
  5. 박정미. 한국 성매매정책에 관한 연구. 2011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