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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소수자와 노동

[코로나19와 성소수자] 코로나 사태 속에서 성소수자 노동자로 존재하기

by 행성인 2020. 4. 14.

슈미 (성소수자노동권팀) 


요즘 전 회사 지침에 따라 마스크를 쓰고 근무합니다. 그 날도 마스크를 쓰고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근데 평소와 뭔가 달랐습니다. 아침부터 숨이 따뜻했고 점심을 먹는데 맛이 없었고 오전 근무를 마치고 자리에 앉았는데 몸이 물에 젖은 것처럼 무거웠습니다. 평소라면 타이레놀을 먹고 근무했겠지만 이번엔 그럴 수 없었습니다. 이미 뉴스와 회사 게시판이 코로나와 관련된 정보로 범벅이 된 상태였거든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부서에 구비된 체온계로 체온을 측정했습니다. 무려 39.2도였습니다.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습니다. 당장 오늘 처리해야 되는 업무들은 어쩌지? 원래 부서가 후덥지근한데 마스크까지 끼고 근무해서 열이 나는 게 아닐까? 코로나 확진 받으면 어쩌지? 그러다 불현듯 코로나 확진자는 동선이 공개된다는 사실이 떠올랐습니다. 서둘러 스케줄러를 확인했습니다. 절망적이었습니다. 며칠 전에 행성인 사무실에 방문했었더군요. 최대한 자연스럽게 빈 회의실에 들어가 찬물을 마시고 선풍기를 강풍으로 틀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체온을 측정했습니다. 마찬가지로 결과는 39.2도.

부서에 보고하고 선별 진료소에 가는데 마음이 착잡했습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긴급 재난 문자를 처음부터 다시 읽어보았습니다. ‘N번째 확진자 (31세/여성/OO동 거주) 13:30~15:50 XX 커피, 13:10 AA 마트, 14:00~20:30 OO동 시댁 저녁 식사’ 이제까지 가볍게 읽고 넘어갔던 짤막한 문자엔 이름만 적혀있지 않을 뿐 참 많은 정보들이 들어있었습니다. 

회사는 소문이 엄청 빠릅니다. 누가 코로나 확진 판정을 받았는지 찾는 건 금방이죠. 자꾸 머릿속에 최악의 상황이 그려졌습니다. 코로나 확진 ⟶ 회사에 내가 코로나 확진자라는 사실 통보 + 긴급 재난 문자를 통해 행성인 방문 공개 ⟶ 직원들이 내가 성소수자라는 사실을 알게 됨. 하필 행성인은 이름도 '행동하는 성소수자 인권연대' ⟶ 소문의 주인공 ⟶ 쑥덕쑥덕 ⟶ 퇴사. 열이 아니라 생각이 많아서 머리가 아팠습니다. 극한의 순간이 오면 인생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간다는데 지난 저의 인생이 뭉텅뭉텅 떠올랐습니다. 

다행히 검사 다음날 코로나 음성 통보를 받았습니다. 기쁘고 슬펐습니다. 코로나 음성이라는 사실이 기뻤고 어제와 같은 상황이 낯설지 않다는 생각에 슬펐습니다. 항상 전 조심했습니다. 주말에 행성인 행사에 참여해서 신나게 놀았어도 직장 동료들이 주말에 뭐했냐고 물어보면 집에서 잤다고 말했고 직장 동료가 성소수자 혐오 발언을 하면 애써 침묵했습니다. 회사에선 성소수자의 시옷도 꺼내지 않았습니다. 에둘러서 페미니즘 스티커가 잔뜩 붙은 노트북을 회사 책상 위에 올려두거나 그들의 빻은 소리에 깊은 한숨으로 대답하는 등의 방식으로 불편함을 표현했었죠. 근데 국가는 공공의 알 권리라며 강제적으로 코로나 확진자의 내밀한 정보와 생활을 공개하고 누군가는 그 정보들을 토대로 코로나 확진자를 비난하거나 추측하는 지금의 상황을 지켜보며 숨이 턱턱 막혔습니다. 

어떤 설문 조사에 따르면 10명 중 8명이 확진자 동선 공개를 찬성한다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지난 메르스를 겪으며 누구보다 투명한 정보 공유를 원했던 저이지만 지금의 동선 공개 방식은 성소수자에게 위험하기에 복잡한 마음입니다. 성소수자이자 회사에서 노동자로 살아가는 저에게 코로나는 여러 가지 고민을 안겨주었습니다. 코로나 사태로 모든 논의가 삭제된 요즘 다른 분들의 생각이 궁금합니다. 빠른 시일 내에 대화를 나눌 자리가 마련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때까지 우리 각자의 자리에서 잘 지내요.

 

 

To. 나의 벗에게

 

코로나 19로 우리의 많은 것을 바꾸었어요. 학습지 선생님이었던 벗은 수입이 뚝 떨어져 당장 카드값을 걱정하고 작은 여행사에 근무하던 벗은 여행사 폐업으로 졸지에 실업자가 되었어요. 

 

요즘 벗은 어때요? 일터는 괜찮은지, 무언가 달라지거나 바뀐 건 없는지 궁금해요. 혹은 지금 벗이 느끼는 감정이나 생각도 좋아요!

 

행성인 노동권팀은 앞으로 우리가 무엇을 하면 좋을지 생각할 수 있도록 지금 우리의 목소리를 남기고 웹진에 공유하려고 해요. 답장 기다릴게요. 

 

From. 행성인 성소수자노동권팀

 

<답장 보낼 곳>  ★★ 4월 24일까지 보내주세요!

- 행성인 노동권팀 메일 rainbownodong@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