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우정과 애도의 틈새에서 – 2021년의 끝자락에 우리 곁에 머물다 간 공연과 전시들

무지개문화읽기

by 행성인 2021. 12. 24. 15:57

본문

 

남웅(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1

최근 번역 출판된 『무엇이 도시의 얼굴을 만드는가』(김수연 옮김, 현암사, 2021.)에서 저자인 리처드 윌리엄스는 도시가 특정 건축가의 작품으로 구성된다는 접근에 반발하면서 성원들의 노동과 문화, 성적 욕망과 폭력, 정치권력과 자본의 ‘프로세스’에 이해 역동적으로 구성됨을 주장한다. 그 일환으로 저자는 퀴어 친화성이 도시를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다각도로 살핀다. 일테면 퀴어 친화적 도시가 세계성의 지표가 되고 부동산시장 활성화에 동기부여가 되었는데, 샌프란시스코의 카스트로스트리트나 맨체스터 캐널 스트리트가 대표적 예시인 것이다. 아시아 근방에서는 타이베이의 시먼 홍루를 떠올릴 수 있겠다.

프로세스가 도시를 구성한다는 주장은 독자로 하여금 보다 일상의 층위에서 생활공간으로서 도시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한다. 물론 퀴어 친화성을 염두에 둘 때, 1세계를 표본으로 삼은 그의 독법은 우리에게 위화감이 없지 않다. 단적으로 퀴어 가시화보다 대중문화의 퀴어베이팅(queer baiting)이 좀 더 일상적인 한국에서 퀴어는 환대는커녕 스타일과 미감이 전유된 모습으로 표백되는 경우가 빈번하다. 표면적인 스타일과 형식만 착즙하는 가운데 정작 퀴어 당사자는 뉴스와 시사프로그램에서나 등장하는 실정에서 퀴어는 공적 역사와 상징적 장소마저 확보하지 못한다.

물론 이런 진단은 퀴어를 취약하고 차별받는 이들로만 프레임 짓는 반쪽의 분석일 것이다. 그러니까 어떤 방식으로든 퀴어는 참지 않는다. 대중문화의 통로가 제한되고 자원이 한정적일지라도 성원들은 주어진 자원과 네트워크를 확장하며 한시적이나마 전시와 공연, 집회와 토론을 꾸준히 잇는다. 이는 광장 위에 새로운 문화를 자생시키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기금을 받거나 사비를 털어 공적 공간을 대관하고 초대받고 점거하는 방식으로 자리를 확보한다. 계란으로 바위 치고 콩 주머니로 박 터트리는 게임이 언제 끝날지 모르지만, 적어도 당장 입을 벌릴 생각이 없어 보이는 바위 표면에 바짝 날 세운 무지개를 가득 힘줘서 제 존재를 꽂는다. 특히 우리는 11월부터 연말 사이 트랜스젠더 추모의 날(11. 20.)과 세계 에이즈의 날(12. 1.), 세계 장애인의 날(12. 3.)과 세계 인권선언기념일(12. 10.), 세계 이주민의 날(12. 18.)이 이어지는 동안 시도되었던 성원들의 퀴어적 실천과 개입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2

당사자성으로서 ‘퀴어’는 기실 정체성의 프레임을 견지하면서도 굳이 그에 매달리지 않는다. 퀴어 미술은 성소수자로 정체화한 이들의 것으로 한정할 수 없기에 우리가 주지할 점은 퀴어 당사자의 미술 너머 미술의 퀴어적 실천이 되어야 한다. 갤러리와 미술관이 시도하는 퀴어적 실천들은, 기획에 따라서 퀴어라는 당사자성과 소재가 특정 정체성과 성적 지향으로 국한하는데 나아가 장애와 노동, 생과 사의 틈새를 가로지른다.

 

《사실, 망자는 죽지 않았다》 1부를 진행한 '안성요기' 전시장 입구 ⓒ토탈미술관

 

토탈미술관 안성과 서울에서 1, 2부에 걸쳐 진행하는 《사실, 망자는 죽지 않았다》(안성: 2021. 11. 1- 12. 26./ 서울: 11. 30- 12. 31.)는 참여 작가들의 면면도 그렇거니와 안성 고삼저수지라는 장소성이 전시의 성격과 인상적으로 어울린다. 지리적으로 수도권 끝자락에 위치하지만 좀체 쉬운 접근을 허락하지 않는 전시공간은 폐건물과 창고건물, 저수지 수상좌대에 걸쳐 전시를 잇는다. 2019년 노르웨이 베르겐과 2020년 독일 슈투트가르트에 이어 제 3회를 안성과 서울에서 맞이한 베르겐 어셈블리의 일환으로 기획된 본 전시는 한스 D. 크리스트와 이리스 드레슬러의 총괄기획 외에도 노순택, 흑표범, 이정식 작가와 신보슬, 임수영 큐레이터가 코어멤버 그룹으로 함께 참여하여 한국적 맥락에 집중한다. 장애, 노동, 젠더를 화두로 죽음의 정치를 둘러싼 한국 상황을 조명한 전시는 도시의 경계면을 살아가고 살지 못해 잊혀지는, 잊혀짐을 강제당하는 이들이 망각의 역사에 저항하며 다시금 일어나 살아내는 모습을 담는다.

 

4층 전시장 일부. '실밥'(강영자, 곽수복, 권영자, 김용자, 복윤옥, 송해나, 유향순, 이강순, 이순희, 정의금, 조분순, 표영숙, 홍성삼)과 이네스 도우야크(Ines Doujak) 작업이 디스플레이 되어 있다.
수상좌대 전시장 내부. 굴뚝신문과 전태일신문, 잡지 꿀잠 등 비정규노동자의 집 '꿀잠'의 아카이브를 살펴볼 수 있다.

인상적인 것은 안성 고삼호수 인근 전시공간의 지리적 속성이다. 한때 호텔이던 건물은 객실이었던 방마다 작품을 배치하여 관객으로 하여금 전시와 함께 저수지를 조망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 만추의 단풍이 마지막 빛을 발하는 인적 없는 저수지는 수도권 끄트머리에서 죽어도 사그라지지 않는 함성을 고요하게 담는다. 경계의 함성을 삼키는 호수의 표면은 투명한 윤슬로 반짝인다. 저수지 위에 둥둥 떠 있는 수상좌대에서 비정규노동자 쉼터 ‘꿀잠’이 출간한 ‘굴뚝신문’과 ‘전태일50’신문을 비롯한 농성투쟁의 아카이빙을 살피고, 그 옆 좌대로 옮겨 비인간 동물의 모습을 바득바득 재현하는 홍이현숙의 자세를 따라하며 다른 존재의 몸을 상상하는 경험은 전시장의 감상과는 다른 결을 갖도록 하는데, 그것은 도시 경계면이라는 추상적인 언어를 다시금 성소수자와 철거민, 장애인과 비정규직 노동자, 이주민과 여성으로 이어지는 구체적인 삶의 투쟁과 미적 실천을 안성이라는 지리적 속성에 맞물리도록 한다.

 

《사실, 망자는 죽지 않았다》 2부가 열리는 서울 토탈미술관 전시장면의 일부. 전면의 영상작업은 흑표범의 〈고스트 리허설〉이다. ⓒ토탈미술관

우리는 기성 미술관이 변방과 주변, 사회적 소수자와 같은 개념들을 엮어서 올리기까지 전시를 주관하는 이들의 집행력과 방향성을 무시할 수 없다. 일례로 이 전시는 전나환 작가가 생전 참여한 마지막 전시이기도 하다. 그의 부고 직후 미술관은 전시 속 작은 전시의 일환으로 《디어 나환 Dear Nahwan》(2021. 12. 28 - 12. 31.)을 기획하여 추모와 만남의 자리를 주선한다. 기획의 기예는 그 자체로 기억과 애도의 실천으로 제 몫을 살아가는 이들을 새로운 장소에 조우시키고 엮는다.

 

애도와 기억의 실천을 이야기하는데 있어 이강승의 전시 《이강승: 잠시 찬란한BRIEFLY GORGEOUS》(갤러리 현대, 2021. 11. 17- 12. 31.)를 빼놓을 수 없다. 한국 퀴어사의 척박한 아카이빙환경으로부터 사사로운 구전과 낙서, 가십으로 남은 기사들을 그는 데릭 저먼과 로버트 메이플소프, 데이비드 보이나로비츠 등 유명한 게이 영화감독과 아티스트들을 비롯하여 싱가포르계 발레 댄서 고추산과 홍콩에서 태어나 뉴욕에서 활동한 사진작가 쳉쾅치, 숀 맥퀘이트 등 근(近)과거 성적 보수주의와 HIV/AIDS위기의 풍진 세상 위에 족적을 남긴 퀴어 예술가들의 기록과 나란히 놓는다. 상이한 환경을 살아간 이들을 전시장에 대면시키고 어우러지게 하는 시도는 애도의 일환으로서 변칙적인 영혼결혼식을 떠올리게 하는데, 섬세한 드로잉과 바느질을 통해 일련의 소재들을 가공하고, 소품과 작품을 배치하는 시도는 일종의 조경술로서 전시기획을 펼치며 전시의 의식적 뉘앙스를 더한다.

 

《이강승: 잠시 찬란한 BRIEFLY GORGEOUS》 전시장 2층 풍경. (사진: 남웅)
《이강승: 잠시 찬란한 BRIEFLY GORGEOUS》 전시장 지하1층 풍경. (사진: 남웅)

수다한 손길이 오간 화면에는 연필로 채운 만큼 의도적으로 지운 자리의 흔적이 강렬하게 남는다. 빈자리는 기록되지 못하거나 잘못 기억되어버린 이야기와 얼굴들을 환기하지만, 침묵의 공백은 역설적으로 빛의 시각적 효과를 내기도 한다. 그리기와 지우기, 채우고 비우기, 기억과 망각, 망각 자체를 기억함으로써 다른 풍경을 만드는 미적 실천은 어둠 속에 미러볼이 끊임없이 돌아가는 클럽을 연출한 전시장 지하공간으로 이어진다. 이태원 킹클럽 로고에 흘러내리는 황금색 물감은 2020년 코로나19 이태원 확진자가 증가하던 당시 클럽 입구에 던진 날계란의 자국들을 상기시킨다. 추모와 애도 또한 만남과 조우를 통해 이뤄낸다고 하지만, 만남 자체가 제한되고 위계적으로 구획되는 락다운 상황에서 전시는 만남의 결핍 자체를 무대화하는 모습이다. 이는 다시금 상실과 만남, 춤과 추모, 쾌락과 슬픔, 미술관과 클럽의 풍경을 포갠다. 한 겹의 피막같은 드로잉과 조명이 감싼 공간은 여백의 심연을 굳이 숨기지 않는다.

 

이강승, 〈무제Untitled〉, 세라믹 타일과 꽃병(캘리포니아 진흙을 탑골공원, 남산공원, 프로스펙트 코티지의 흙과 섞음), 낙원동 사우나 배수구 뚜껑, 펜실베니아에서 에오세 시대까지의 이파리와 씨앗 화석, 탑골공원의 조약돌, 호미가든의 드라이 플라워, 24K 앤티크 금사, 78.7 x 78.7 x 15.2 cm ⓒ갤러리 현대.
이강승, 〈무제Untitled〉(완벽한 미래The Future Perfect) (베아트리즈 코르테즈Beatriz Cortez와 협업), 2021. 앤티크 24K 금사로 삼베에 자수, 이파리 화석, 운석, 동, 세라믹 꽃병(캘리포니아 진흙에 탑골공원, 남산공원, 프로스펙트 코티지의 흙을 섞음), 호미가든의 드라이플라워, 각 270 x 60 cm.(사진: 남웅)

망각에 저항하는 불완전한 기억의 실천은 미국 작가 베아트리즈 코르테즈와 협업한 프로젝트 ‘무제’(The Future Perfect)로 이어진다. 그는 한국의 퀴어 작가들과 비평가, 이론가들에게 ‘미래가 오면’(When the future comes)이라는 구절로 시작하는 미래완료형 문장을 요청하여 답을 받아 전시한다. 과거의 오욕과 망각을 품고 현재의 갈망을 반영한 문장은 뒤엉킨 시제 속에 희망과 실현 가능성을 언급한다. 금사로 삼베에 문장을 수놓고, 그 주변으로 탑골공원과 데릭저먼의 정원에서 가져온 진흙을 섞어 꽃병을 만들고 옥천의 퀴어 호미가 가꿔낸 '호미가든'(@ok_homie_)에서 철이 지나 사그라든 꽃들을 꽂아 화석과 운석을 함께 장식한 모습은 추모의 한 상 차림 같은 인상을 준다. 그간 진행해온 한국의 개인전에서 작가는 항상 다른 작가들과 협업을 통해 전시를 선보여왔는데, 이 또한 추모와 애도가 공동의 작업임을 다시 한 번 환기시킨다.

이강승의 드로잉은 한국의 김기홍과 변희수를 지나 세상을 떠난 국내 활동가와 익명의 퀴어들이 사사롭게 남긴 원고지의 글자와 구김까지도 드로잉으로 세세하게 옮긴다. 그리고 그는 기록물을 직접 편집하는 작업으로 나아간다. 작가는 한국퀴어아카이브 '퀴어락'의 도움을 받아 이름을 드러내지 않은 퀴어 당사자들의 기록을 고스란히 제본하여 갤러리에 전시한다. 당사자의 동의가 필수는 아닐지라도 개인의 필치로 자신의 이야기를 그대로 실은 기록물을 어떤 동의와 합의의 과정을 바탕 하여 전시할 것인가를 잠시 고민하게 된다. 물론 당사자는 자신의 사사로운 기록이 증발하지 않기를 바라며 아카이브 단체에 기증한 것일 테지만, 그것이 자신의 기록을 고스란히 바깥에 노출해달라는 의미와는 다르지 않을까. 여과하지 않은 기록의 전시는 기억과 애도가 지극히 어려운 현실 자체를 물신화하는 것은 아닌가를 거슬러 묻게끔 한다. 그렇다면 개인의 목소리를 공적 공간에 드러내는 실천은 어떤 배려와 동의를 바탕 해야 할까.



3

개인의 사사로운 몸들을 공중에 드러내는 방식은 여러 협상과 소통의 과정을 거치는데, 더러는 그 과정으로부터 새로운 방식들을 고안하기도 한다. 공연은 실존을 드러내면서도 온전히 그 모습을 노출하기보다 자신이 바깥에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지, 자신을 드러내는데 어떤 사회적 제약과 규범이 작동하는가에 물음을 던지는 방식으로 모습을 상연한다. 중요한 것은 무대 위의 행위 또한 개개의 몸을 경유하여 공적 의미를 갖는 점이다. 규범과 통념에 맞선 몸의 긴장은, 동시에 관객들에게 자신을 노출하고 감출 수 있는 양식을 고안하는 동기부여가 된다. 드러냄의 양식은 한시적일지라도 새로운 관계 가능성을 열어낸다.

근래 한국의 게이 작가들이 전시의 형태로 제 미적 형식성을 구축해가는 동안 많은 퀴어 여성, 트랜스젠더‧젠더퀴어 아티스트들은 전시보다 비교적 짧은 공연의 방식으로 제 직접적인 실존을 드러낸다. 최근에는 고(故)이은용 작, 구자혜 연출의 〈우리는 농담이 (아니)야〉(미아리고개 예술극장, 2020. 7. 23- 8. 2./ 2021. 7. 22 - 8. 1.)와 김비 작 정은영 연출의 연극연습3. 극작 연습 〈물고기로 죽기〉(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 2021. 3. 4- 3. 14.), 김다원‧문상훈 작, 구자혜 연출의 제4회 드랙킹 콘테스트 DRAG x 남장신사(드랙바이남장신사)〉(세종문화회관 S 시어터, 2021. 4. 4.) 등 퀴어당사자로서 주도적으로 제작과 연출에 참여할 뿐 아니라, 극의 주제와 준비과정까지도 섬세하게 퀴어적 실천을 묻고 숙고하며 무대에 올린 작업이 연이어 공연으로 이어졌다. 가용 예산 규모가 크지 않은 만큼 짧은 공연은 눈 깜박할 새 예매가 마감되었다. 섬광처럼 반짝이고 지나가버린 행사들이 끝난 자리엔 감상이 넘쳤는데 그것은 마치 퀴어 공동체가 체득해온 생존의 일상을, 퀴어퍼레이드와 같은 한시적인 ‘명절’의 시간성을, 소문으로 가득한 존재의 가벼움을, 그것이 생략해온 퀴어로서 삶의 세부를 떠올리게 한다.

 

〈연극연습 4. 관객 연습 - 사람이 하는 일〉 (헤이그라운드 성수시작점 , 21.12.15-12.19) 포스터.

'연극연습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장애여성공감의 극단 '춤추는 허리'가 주축이 되었던 공연 연극연습4. 관객 연습 〈사람이 하는 일〉(헤이그라운드 성수시작점, 2021. 12. 15- 12. 19.)은 장애, 여성, 퀴어로 겪는 이야기를 참여형 토론의 무대로 연출한다. 퀴어/여성 장애인이 일상적으로 겪는 에피소드를 연기하고 극을 다시 반복하면 관객들은 불편한 지점마다 직접 개입할 수 있다. 이진희 활동가가 극중 ‘조커’로 나와 극의 흐름을 열고 닫으며 관객의 참여를 독려하는 촉진자의 역할을 수행하는데, 몇몇 지점에서 그는 중립을 지키려 애쓰면서도 관객에게 정치적 올바름의 메시지를 기대하고 이끌어내는 활동가의 본분을 숨기지 못하고 내적 분열의 틈새를 간간이 노출한다. 극을 중립적으로 진행한다는 멘트에도 불구하고 관객에게 ‘계도적’ 실천을 독려하는 이중의 방향성이 의도와 상관없이 무대에 내려앉은 모습인데, 이를 가로지르는 것은 무대 위 춤추는 허리 일원들과 객석 사이에 암묵적인 상호 신뢰가 상황을 바꿀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아니었을까.

무대는 관객이 스스로 생각하고 개입하며 개입의 방식을 세공할 것을 요구한다. 배우들 역시 매순간 자신들이 직면해왔을 상황으로부터 관객의 지지와 영감을 얻는다. 관객과 배우 사이 신뢰와 친밀함을 바탕 하는 공연은 상호방어훈련을 연상시킨다. 관객들은 용기를 내고 ‘멈춰!’를 외치며 상황에 개입하는데, 대개 참여자들은 무엇이 차별인가를 지적하고 분석하며 이를 수정한다. 상황들은 개입하는 이에 따라 다양하게 변주한다. 지나가는 행인 역할이 대부분이었지만 더러는 활동가를 연기하기도 했던 관객들은 무대 위에 어색함을 무릅쓰고 극 중 인물들과 협상을 수행함으로써 상황전개에 다른 길을 틔울 수 있다.

 

공연 장면. ⓒ연극연습 프로젝트.

나는 몇 번씩 ‘멈춰!’가 목전까지 올라왔지만 주저하다 결국 개입하지 못했다. 여기에는 쑥스러움도 한몫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차별 시정과 상관없이 해당 상황에 엉뚱한 개입에 대한 충동을 무시할 수 없었던 까닭도 있다. 일례로 시설에서 외출 나온 이가 동성의 파트너를 향해 달려가 포옹하는 장면에 별안간 멈추라고 외치고픈 장난기 어린 용심이 일거나(커플 안 돼!), 지하철 장애인석을 비장애인이 차지하고 이들을 불편한 존재 취급하는 장면에서는 별안간 ‘라방’을 진행하는 일인방송인의 선 넘는 수다 같은 것들을 떠올리는 식이다. 혹은, 만약 내가 저기 개입해 온갖 끼를 떤다면, 혹은 젠더표현의 규준을 일탈하는 이가 극에 개입한다면 비장애인 꼰대 남성과 일방적으로 시혜를 제공하며 장애인을 프레임에 가두는 요양보호사와 사회복지사를 메소드 급으로 연기하는 배우는 관객에게 ‘여자에요, 남자에요?’를 역으로 물을 수 있었을까. (나는 물어봐주기를 전적으로 바랐을 것 같다.) 말인즉 공연은 예기치 않은 우연성에 기꺼이 열려 있음을 표명하는데, 그것은 상호 개입의 윤리에 극이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이 애초에 기획 의도를 초과하고 있음을 함의한다. 관객들이 극에 개입할 뿐 아니라, 무대 또한 관객의 실존에 개입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어디까지 자신의 연기를 밀어붙일 수 있을지의 여부가 무대에 개입하는 관객뿐 아니라, 배우에게도 주어지는 셈이다. 장애인 배우로서 장애인을 깔보고 귀찮게 여기며 무시하는 태도를 연기하는 이들의 부담은, 불편한 상황을 바꾸고자 참여한 관객에게도 각본 없이 개입할 가능성을 확장하며 윤리적 책임을 지게 된다. 상황을 시정하고 공존의 가치를 확인하자는 올바른 방향 앞에 나는 극의 의도 자체에 개입하고 주객을 역전시키며 기대할 수 있는 형식을 흩뜨려놓는 상상을 관람 이후에도 며칠간 하게 되었다. 물론 평등의 정치적 의미 위에서 이를 초과하는 관계를 틔울 수 있기 위해서는 관객과 무대 사이의 상호 친밀함과 신뢰가 전제되어야 함은 당연한 것이겠지만 말이다.

 

근간에는 드랙을 주제로 하는 공연들도 이어졌다. 개중에 드랙킹콘테스트 올헤일 vol.5로 기획한 〈드랙킹×트랜스이갈리아〉(삼일로 창고극장, 2021. 12. 17- 12. 19)는 예매는 실패했지만 훌륭한 동료에게 흔쾌히 양도 받아 관람할 수 있었다. (이제야 고백하지만 이 글은 그에 대한 감사와 존경의 마음으로 썼다.) 런웨이를 연상케 하는 무대가 극장 가운데를 가로지르고, 그 주변으로 관객들이 둘러앉는다. 극이 시작하기 전부터 배우들은 객석에서 관객을 맞는다. 이들은 한명씩 무대에 등장하여 컨셉에 맞춰 립싱크와 라이브 공연, 스탠딩 코미디를 진행한다.

 

감사한 그분.

이미 드랙킹콘테스트 올헤일의 다섯 번째 기획공연이지만, 예매복 없이 풍문으로만 후기를 들어온 입장에서 이전 공연들과 비교하는 건 불가능할 터. 그래도 인상을 전한다면 관객석에 함께 앉은 드랙 퍼포머들이 보여준 첫 인상이 친밀함보다는 작은 긴장에 가까웠다는 점이다. (잠시나마 친밀함을 위해 무엇이 필요할까를 고민한다…술?) 그럼에도 공연에서 기억해야 하는 것은 수어 통역하는 이들까지도 드랙 퍼포머의 일원으로 무대에 선다는 것이다. 부수적인 역할이 아니라 주체로서 드러내는 방식은 공연의 구성에 발생할 수밖에 없는 위계를 어떻게 자신들이 조율 가능한 것으로 전유하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이들이 무대에서 내뿜은 자신감은 무대의 배치와 퍼포먼스 내용을 두고 치열하게 고민하고 협의해온 과정이 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공연은 시작 전에 안전한 공연을 위한 약속을 배우들이 돌아가며 읽는다. 일탈과 위반을 상연하지만 상대의 동의 없이 최대한 개입하지 않는다는 공연의 방향은 '위반'과 '안전'을 동시에 추구하겠다는 포석을 둔다. 아마도 사전적으로 상충하는 두 가치가 공존할 수 있음을 보여주려는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것이 트랜스젠더와 드랙킹을 엮어낼 수 있는 최선의 태도라고 판단했을지도 모른다. 타인을 환대하고 규범에 저항하는 젠더‧섹슈얼리티 실천뿐 아니라 종적 횡단까지 감행하는 무법자적 퍼포먼스는 정체성과 계층, 생과 사까지도 연결하는 퀴어 샤머니즘의 기능도 수행할 수 있을 텐데, 일테면 우리만의 애도 방식을 고안하고 이를 함께 향유할 쾌락적 실천을 향유하는 것들 말이다. 이는 분명 트랜스젠더에 대한 부고를 연이어 접했던 지점에서 추모와 기억을 위한 형식들을 출몰의 실천으로, 하지만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무대라는 울타리를 망가뜨리지 않는 섬세한 방법론을 구축한다.

 

〈드랙킹X트랜스이갈리아〉 12월 18일 공연 마무리 컷. (사진: 남웅)

(그리고 우연이었을지 모르지만, 내가 공연을 관람한 12월 18일 성노동자해방운동 주홍빛연대 차차는 ‘사회는 우리의 애도에 응답하라’를 주제로 성노동자 추모집회를 열었다. 12월 17일 국제 성노동자 폭력철폐의 날을 기념하며 진행한 집회는 '창녀 행진(slut walk)'이라는 기존의 이름보다 ‘애도’를 전면에 걸었다. 희생과 폭력에 노출된 이들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행동은, 어떻게 안전을 확보하면서도 규범에 개입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모색하는 퀴어적 실천에 공명한다.)



4

섬광처럼 반짝이고 사라져버리는 공연의 지속이 쉽지 않은 상황은, 가시화가 그저 얼굴 하나 드러내면 해결되는 문제가 아님을 시사한다. (그것은 고전이 되어버린 퀴어 작품들을 대형기획사와 국공립 극단에서 번역하여 스타 배우를 섭외하여 제작하는 방식으로 주류시장에 안착하는 모습을 떠올리면 이해가 어렵지 않다.) 여기에는 안전하게 드러날 수 있는 공간이 확보되어야 하고, 그에 맞는 제도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공간을 점유하기 위해 자원과 시간이 필요하며, 이들을 지지할 공동체의 역할 또한 무시할 수 없다. 그렇게 우리는 많은 시행착오와 갈등 속에서도 도시의 규준에 틈새를 벌리며 연결을 증식해왔다. 하지만 양지의 공론장과 공공장소로 진입하는 과정이 순탄하지 않은 과정 위에서 증식의 풍경은 올곧은 모습으로 펼쳐지지 않는다. 단적으로 위에 언급한 공연과 전시들은 볼룸과 클럽을 강렬하게 연상시켰다. 그것은 곁이 되었던 동료뿐 아니라 함께 호흡했던 ‘새벽’과 ‘장소’에 대한 또 다른 애도의 표현은 아닌가를, 결핍으로만 점철시키지 않으며 어떻게든 제한된 시공을 절개하며 이상한 무대와 만남의 양식을 고안하는 사랑의 흔적들은 아닌가를 곱씹게 한다.

아쉬운 마음과 부족한 환경은 차치하고 이들의 점거가 특정 장소 바깥으로 이어지면 좋겠다는 생각은 변함이 없다. 최근 대중 집회에 드랙 퍼포머들이 무대에 서는 근래의 변화들은 집회의 새로운 아이템을 추가한다는 단순한 설명 너머, 가시화되지 못했던 내부 성원을 헤아리며 공동체를 새롭게 구성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연다. 그렇게 우리는 차별시정과 나 그대로의 모습을 존중할 것을 호소하는 메시지를 초과하여 당신과 내가 어떻게 서로 간 개입을 시도하고 있으며 그것이 어떻게 무대를 재구성하는지, 이후 무대 바깥으로 해석적 확장을 가능케 할 것인지를 함께 숙고해나간다. 그것은 촛불의 온기를 제 스스로 꺼버리는 정권의 야욕이 불러일으키는 참담한 상황으로부터 우리가 공존을 요구하고 실천할 수 있는 동력이기도 할 것이다. (이는 내가 예약하고 놓쳐버린 〈암란의 버스3〉(서울 팩토리2, 2021. 10. 10- 12. 12.) 상영회에서 확인하고 싶은 물음이기도 했다. 난민과 퀴어의 우정은 어떻게 우정의 통념적 회로를 이탈할 수 있을까. 난민과 퀴어의 형식적 연대와 우정 너머, 기울어진 지원을 부정할 수 없는 구조적 상황에서도 퀴어한 우정을 어떻게 창안하는가.)

‘오 나의 친구들이여, 친구란 없구나.’ 라는 고릿적 문장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경구로 알려져 있지만 그 또한 근거가 확실치 않다. 다만 출처부터 엉킨 문장은 다양한 해석의 갈래를 만든다. 이미 곁에 없는 이, 때 이르게 떠나거나 관계의 책임을 져버린 채 사라진 이를 애통하게 부르는 것으로 읽어도 틀린 해석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 없는 친구’는 친구의 통념을 벗어난 관계임에도 지금 내 곁에 있거나, 곁에 있지만 내가 인지하지 못한 누군가의 모습 역시 강렬하게 환기한다. 또는 지금은 곁에 없는 이가 사사로운 관계가 아니었음을 뒤늦게 깨달은 사후적 회한의 표현이 되기도 하다. 당신은 언제고 나에게 앞서있고 뒤늦게 발견되며 비루한 관계틀을 빠져나간다. 내가 친구로 인정하기 전부터 이미 곁에 존재하는 이들, 애당초 내 삶에 개입하고 연루되어버린 이들을 우리는 어떻게 부를 것인가.

질문은 새삼 우리 곁을 머물다 간 또 다른 전시를, 10월 한 달 동안 종로 게이 바 VIVA에서 열린 김터울의 사진전 ‘우리의 인간다움은 우리의 부재로부터 나오지 않는다’ 를 호출한다. 그는 한낮의 시청광장과 종로3가역 3번 출구를, 이른바 ‘길싸롱’으로 불리던 성소수자에게 잘 알려진 포차거리 일대를 촬영한 사진을 인쇄하여 Viva 바 벽 한켠에 전시한다. 무표정한 서울광장과 노점이 나오지 않은 길목, 인적도 없는 한밤의 공간은 을씨년스럽기까지 하다. 이는 코로나19 이후 거리두기 단계조정이 불완전하고 유동적으로 지속되면서 어려움에 봉착한 자영업자의 상황을, 보다 정확하게는 성소수자 업소와 게이 클럽의 오늘을, 그나마 익선동 방문객들이 밖으로 노출된 업소를 찾는동안 그마저 바깥으로 노출되지 않아 제한적인 환경에 놓인 커뮤니티의 일면을 담는다. 그렇게 지하 1층 게이 바에 들어온 종로 3가의 텅 빈 풍경은 커뮤니티 안에서 지금의 풍경을, 공동체로 불리던 취약한 삶의 오늘을 직시하도록 한다. 전시를 제안하고 기획한 김터울은 행사를 통해 영업에 제한과 어려움을 겪는 업소의 단골손님으로서 기여하겠다는 따뜻한 의도를 밝히지만, 그와 더불어 노출 자체가 취약함으로 직결되는 게이 커뮤니티의 장소성을, 만남의 환경을 냉정하게 응시하는 비판적 관점을 놓지 않는다. 냉온탕의 평행선은 전시기간동안 손님들에게 그의 사진엽서를 무료로 배포하면서도 전시가 끝나고 작업을 스스로 부수고 폐기하는 불협화음을 보이기도 했다. Viva 사장님이 기록하고 업로드한 그의 반달리즘적 행동은, 그러나 거진 비어 있는 종로3가 업소에서 심야의 모임 자체가 제한되어버린 종로의 풍경을 부순다는 구체성을 조금이라도 살필 수 있다면 파괴의 방향을 달리하고 있음을 파악할 수 있다.

 

김터울 사진전 《우리의 인간다움은 우리의 부재로부터 나오지 않는다》(VIVA Bar, 2021. 10. 1- 10. 31) 웹자보 이미지.

그가 제목으로 삼은 문구는 오랜 시간 자리를 일구며 수다한 얼굴들이 스치듯 사라지고 다시 돌아오는 터전의 시간을 애써 역사로 인정하지 않고 모른체 하며 종국에는 비난하고 부정하는 이들을 향한 성토처럼 보이지만, 우리는 그의 문장을 뒤집어 다시 음미할 수 있다. 말하자면, 우리의 부재에서 나오는 것이 ‘인간다움’이 아니라면 부재를 선언한 자리를 기어이 떠나지 않는 것, 또는 계속해서 출몰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로 드러나기를 부정하고 제한하는 검열과 비난의 틈새를 보란듯 빠져나오는 것이 있다면 어떤 이름을 붙일 수 있을까. ‘우리’의 범주로 겨우 불러냈지만 존재의 사회적 자격을 부여하기는 커녕 이들의 '인간다움'마저 박탈한다면, 텅 빈 거리를 응시하는 이는 누구인가. 텅 비어버린 낯선 거리를 응시하는 렌즈의 시선은 오히려 전시제목을 뒤집어낸 부정형의 문장을 음화된 ‘인간다움’의 자리로 시각화하고 있지 않는가. 그리고 뒤집어진 문장은 앞서 소개한 토탈미술관의 전시 '사실, 망자는 죽지 않았다'를 관통하고 있지는 않은가. 이는 무엇이 '우리'의 모습을 부정하는지, 더불어 무엇이 없는 이들 취급하게 만드는지를 날카롭게 물으면서도 금지의 상황을 절개하는 '인간다움'의 경계를, 기어이 사라지지 않으면서도 밤을 찢어 새벽을 열어내며 '인간다움'을 다시 정의하는 암중모색을 강렬하게 환기한다.

그리고 그것은 애도가 개인에 대한 슬픔과 추모로만 갈음할 수 없음을, 사회적 삶을 불균등하게 배치하는 기준과 제도를 수정하고 애도의 위계까지도 심문할 수 있어야 함을, 그렇게 애도로부터 현실을 절개하고 찢는 시도가 분노뿐 아니라 조우와 개입의 낯선 감각과 더러는 변화의 기쁨과 쾌락까지도 수반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2021년의 끝자락, 한국에서 이어지는 미적 실천들은 환멸로 가득한 세상에서 애증의 역설을 껴안고 친구를 다시 부를 것을, 우리의 관계를 치열하게 묻고 만들며 우정의 틈새를 낼 수 있는 장소를 어떻게 점거하고 설계하며 만들 수 있는가를 끝없이 묻는다.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