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에나 성소수자는 존재합니다. 당연히 다양한 일터에도 성소수자는 존재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에게 성소수자 동료가 있는지 묻는다면 대부분 없다고 답할 것입니다. 당연합니다. 많은 성소수자 노동자가 혐오와 차별을 피해 일터에선 자신을 드러내지 않기 때문입니다.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성소수자 노동권팀은 막연한 상상 속에 가려진 성소수자 노동자의 삶을 생생한 언어로 기록하는 활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이번 기고는 현재를 살아가는 성소수자 노동자의 삶을 드러내기 위해 기획됐고, <노동과세계>에 게재됩니다. 노동조합을 통해 현장을 바꾸고서야 비로서 나의 삶이 바뀌었듯, 모두를 위한 일터를 만들기 위해 많은 노동자가 함께 나서야 일터도, 우리의 삶도 바꿀 수 있습니다. 이번 기고를 통해 일터에서 성소수자 노동자 곁에 함께하는 동료가 많아지길 희망합니다. |
루카, 모리, 헝거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성소수자노동권팀)
북극여우는 30대 트랜스젠더 이성애자 여성이다. 과거 그녀는 대학원 연구원으로 근무한 적이 있다.
순간 1 : 군대 대신 연구실 문을 두드리다
‘대한민국 남성이라면’ 피할 수 없는 선택지. 한국 사회가 군대를 설명할 때 자주 쓰는 표현이다. 그러나 군대가 피할 수 없는 선택지로 남는 사람은 단순히 ‘남성’에 한정되지 않는다. 본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법적 성별이 ‘남성’으로 분류되어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몰이해가 만연한 군대라는 공간에 들어가야 하는 존재. 트랜스젠더를 비롯한 논바이너리 퀴어들에게도 군대는 ‘피할 수 없는 선택지’가 되는 것이다.
의사의 ‘성 주체성 장애’ 진단서만으로는 병역 면제를 받을 수 없다. 법적 성별 정정을 받는 경우 병역 면제가 가능하지만, 사실 대한민국에는 트랜스젠더의 법적 성별정정에 대한 법이 없다. 대법원 예규에 따라 판사가 임의적으로 법적 성별정정 여부를 허가할 뿐이다. 그러므로 법적 성별정정이 쉬운 일이 아닐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오히려 그 반대다. 생식기능을 제거하는 수술을 필수적으로 받아야 함은 물론, 부모나 친인척의 인우보증서를 비롯하여 무수한 서류를 챙겨 제출한다고 해도 법적 성별정정을 장담하기는 어려운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북극여우에게도 군대는 현실의 문제로 다가왔다. 그러나 트랜지션 과정을 거쳐 법적 성별정정을 완료하기까지 그녀에게는 시간이 더 필요했다. ‘군대’를 앞에 두고 그녀는 자동입영연기를 위해 대학원 진학을 선택했다. 그녀는 “퀴어가 아니었으면 대학원에 안 갔을 것 같다는 생각이 크다”고 말했다. 그만큼 군대는 그녀에게 공포스러운 공간이었을 터. 나답게 살기 위한 시간을 벌기 위해 그녀는 연구실에서 노동하는 연구원으로서의 삶을 시작한 셈이었다.
순간 2 : 일터와 삶터에서 수십 번 쫓겨난다는 것
군대 입영연기를 위해 그녀에게 대학원 연구원으로서의 삶은 반드시 지켜내야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커밍아웃을 하지 않기로 마음을 먹고, 최대한 ‘남자처럼’ 보이기 위해 애를 썼던 모양이다. 머리도 자르고, 남자 옷을 입은 채 남자로 일하기로 마음을 먹었던 그녀. 그러나 그녀 앞에 등장한 대학원에서의 삶은 다사다난의 연속이었다.
“먼저 제가 호르몬 치료를 하는 단계이기도 했고 완벽히 남자로 숨기기가 되게 힘들었어요. 그래서 막 일부러 가슴도 숨기고 다니고, 그런 것도 힘들었고요. 사람 관계에서 남자로 대해지는 것이 이미 어색한 상황이어서 그것도 힘들었고, 화장실 문제 같은 것도 좀 그랬어요. 당시 제가 머리가 짧았는데, 사람들이 저보면 쟤는 남자야 여자야 물어보는 상황이었어서 계속 설명해야하는 것도 힘들었고요. 그리고 당시에 기숙사 생활 했었거든요, 기숙사랑 화장실에서 쫓겨난 경험이 많아요. (중략) 그런 환경에서 지내는 게 쉽지 않았던 것 같아요.”
주말도, 공휴일도 없이 아침 10시부터 새벽 1시, 2시가 넘는 시간까지 학업과 연구를 병행해야 했던 그녀에게 노동 이외의 삶은 없었다. 밥을 먹고 잠을 자는 시간을 빼면 사실상 하루의 전부를 일터에서 보내는 상황에서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100% 가리며 살기란 ‘미션 임파서블’에 가까운 일이었다. 2인 1실을 사용하는 기숙사에서 ‘남성’과 함께 방을 써야 하는 상황에서 편한 휴식을 갖기도 어려웠을 터. 결국 그녀는 ‘수십 번 쫓겨나는 경험’을 반복하며, 일터와 삶터에서 환대받지 못하는 경험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고, 이후 경제적 여건이 그나마 갖춰진 다음에는 기숙사가 아닌 자취방으로 주거 공간을 옮겨야 했다.
순간 3 : “이대로는 정말 못살겠다고 생각해서”
결국 그녀에게 남은 선택지는 단 하나. 바로 커밍아웃이었다. 연구실에 들어가고 6개월이 지나자 북극여우는 연구실에서 자신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치마도 입고, 악세서리를 착용하기도 했다고 한다. 의외로 사람들은 별 반응을 보이지 않고, 북극여우를 그저 ‘중성적인 사람’으로 여기는 분위기였다. ‘쫓겨나는 경험’이 아닌 공동체에서의 다른 경험은 북극여우에게 용기를 주었다. 북극여우는 자신의 기숙사 룸메이트를 시작으로 하나둘, 커밍아웃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동료 연구원은 물론 사수인 박사 연구원과 고용주인 담당 교수에게까지. 커밍아웃의 연속이 힘들지 않았냐는 물음에 북극여우는 이렇게 답했다.
“당시에는 용기내서 한 게 아니라 이대로는 정말 못살겠다고 생각해서 한 건데. 다시 돌아가서 하라고 하면 못할 거 같아요.”
‘이대로는 정말 못 살겠다’. 성소수자가 커밍아웃에 나서는 심정은 사실 생존을 위한 투쟁에 나서는 심정과 마찬가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쫓겨나고 무시당하고 차별과 조롱의 대상이 되는 삶을 두려워하며 숨어 살 바에는 정체성을 드러내고 살 길을 모색해보겠다는 이 절박한 심정에 절로 마음 한구석이 시큰해진다.
북극여우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 커밍아웃은 주변 사람의 반응과 지지에 따라 결말이 달라진다. 다행스럽게도 북극여우의 경우 주변 사람들이 대체적으로 긍정적인 반응과 함께 그녀가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대학원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물론 여전한 차별과 편견, 불편함도 있었다. 하지만 적어도 일터와 삶터에서 ‘수십 번 쫓겨나는 경험’을 반복하지는 않아도 되는 순간을 맞이한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한국 사회에서 더 많은 성소수자가 커밍아웃하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존중받으며 살기 위해서는 그들의 ‘용기’가 아니라 사회 구성원들의 지지가 중요하다고 느낀다. 성소수자라는 사실이 조롱과 멸시의 대상이 되지 않는 사회, 다양한 모습이 어우러져 서로가 서로에게 좋은 이웃이 되는 사회가 될 때, ‘용기’라는 거창한 표현을 쓰지 않고도 성소수자들이 커밍아웃하는 세상이 찾아오지 않을까. 물론 그런 세상은 무작정 기다린다고 절로 찾아오지 않는 법이다. 당신이 먼저 손을 내밀고 품을 열어주기를 바라는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다.
* 이 기사는 2017년 아름다운 재단 변화의 시나리오 스폰서 지원 사업으로 진행된 인터뷰를 재가공하였습니다.
* 이 글은 민주노총 기관지인 [노동과세계] 에도 공동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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