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일이라는 시간은 돌아오고

우리들은 올해도 어김없이 HIV/AIDS감염인 인권주간을 준비했다. (이하 인권주간) 매년 인권주간을 정리하는 글을 쓰려니, 정신없이 지나갔던 11월달의 기억들을 다시 정리해 보려고 이것저것 찾아보는 와중에 우연히 한 친구의 블로그를 들어가 보게 되었다. 블로그 제목이 “스무살입니다. 별거 없습니다.” 였다. 그 말이 왠지 좋아 무심코 몇 번 클릭하는데, 정말이지 별 거 없는 스무살의 인생이 너무 예뻐서, 한참을 구경하고 말았다. 사진첩에 있는 그 스무살의 여자아이는 늘 어디서나 마주칠 수 있는 십대 후반의 갓 스물 넘은 여자애들과 꼭 같았다. 깻잎 머리라고 불리는 특유의 애교머리, 그리고 비슷비슷하게 생긴 친구들과 비슷비슷한 카페에서 찍은 비슷비슷한 사진들. 나는 아직 여리고 여전히 쉽게 상처받는데, 왜 성숙함을 연기해야 하느냐는 항의성의 일기들... 그러나 이 아이는 이름도 처음 들어본 희귀 난치성 질환을 앓고 있는 친구였다. 문득, 이 아이는 어떻게 성장해갈까? 궁금함과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나는 애정을 가진 사람들에 대하여 곧잘, 그들이 더 많이 상처받고 더 고통스럽게 성장해가길 바랬다. 그것이 휠씬 더 살아볼만한 인생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그런데 이 생면부지의 스무 살 인생을 잠시 들여다보다 말고, 나는 부디 그가 덜 상처받고 덜 고통스럽게 성장하기를 마음속으로 빌고 또 빌었다.

 

12월 1일을 감염인 인권의 날로!

올해도 벌써 HIV/AIDS 감염인 인권주간이 4회째를 맞았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에이즈의 날로 알고 있는 이 날은 1988년 영국 런던에서 열린 세계보건장관회의에 참가한 148개국이 에이즈 예방을 위한 정보교환, 교육홍보, 인권존중을 강조한 ‘런던선언’을 채택하면서 재정되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보건복지가족부와(이하 복지부) 질병관리본부 등이 HIV/AIDS 감염인이 처해있는 현실을 배제한 채 1회성 홍보행사와 정부 직원의 상주기 행사를 기념행사로 진행해왔다.

이에 2006년 12월 1일, 국내에서 처음으로 감염인의 목소리가 배제된 정부주도의 행사를 거부하고, 감염인 스스로 주체가 되어 ‘감염인 인권의 날’ 을 선포하였다. 이들의 인권을 지지하는 사람들 또한 힘을 모았다. 그 결과, 2006년에는 에이즈예방법 전면개정과 한미 FTA 중단을, 2007년에는 에이즈로 고통 받는 취약계층과의 연대를, 2008년에는 HIV/AIDS감염인들의 치료접근권 등 여러 가지 현황문제들을 가지고 그동안 꾸준히 싸워 올 수 있었다.

올해 질병관리본부의 에이즈예산 중 에이즈감염인 지원은 현재 간병, 재가복지사업만이 진행되고 있는데, 올해도 예산이 부족하여 간병사업의 경우 10월에 종료되었다. 간병과 재가복지사업은 다른 사회안전망을 통해서나 가정을 통해서 보살핌을 받을 수 없는 감염인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예산을 축소한다는 것은 감염인의 생존을 위협하는 것이다. 그런데, 정부는 4대강 삽질과 아프간 파병, 부자 감세에 열을 올리면서도 꼭 필요한 복지예산은 모조리 삭감하고 있는 중이다. 내년도 감염인 지원예산도 26%나 삭감시켰다. 또, 갈 곳이 없거나 건강상태가 좋지 않은 감염인들이 머물 수 있는 쉼터도 2곳 밖에 없는 상황에서 쉼터를 축소시키거나 쉼터예산도 대폭 삭감될 예정이다.




또 한국은 HIV/AIDS에 감염된 외국인들에 대해 강제출국, 입국금지 조치를 취하는 대표적인 나라이다. UN반기문 총장은 세계보건기구 총회가 개최되었던 스위스 제네바에서 전재희 복지부장관을 만나 한국이 HIV에 감염된 외국인을 추방하는 12개 나라에 포함되어 있다며 에이즈 환자에 대한 출입국 제한을 해제해달라고 주문한 바 있다. 정부 역시 국제기준과 국가 신인도를 고려할 때 강제출국, 입국을 금지하는 법령을 올해 내로 재정비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이글을 쓰는 지금 올해가 일주일도 남지 않았는데, 정부는 여전히 관련 법령을 개정할 의사가 없어 보인다.

 

숨은 인권찾기. 인권은 멀고, 날은 춥고

올해는 인권주간의 제목을 “숨은 인권찾기 - 인권은 멀고, 날은 춥고” 로 정하고, 위와 같은 현 상황을 시민들에게 더욱 많이 홍보하고자 했다. 그리고 지난 11월28일 ‘서울 곳곳, 에이즈 인권을 만나다.’ 라는 슬로건 하에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서 HIV/AIDS 인권 캠페인을 진행했다. 많은 시민들이 HIV/AIDS 감염인 인권 상황에 대해 많은 공감을 표하며 서명운동에 참여했다. 젊은 층 뿐만 아니라, 어린아이부터 나이가 많으신 분들까지도 유인물을 읽고 자발적으로 서명운동에 참여하여, 에이즈라는 문제가 전 사회적인 이슈임을 확인 할 수 있었다.

또, 에이즈 치료제 공급, HIV/AIDS에 감염된 이주노동자 강제출국, 입국금지제도 그리고 HIV/AIDS감염인의 노동권 등의 내용을 담은 신문도 발행 배포하였다. 인권주간은 문화제를 준비해 공연하였으며, 12월1일 당일 복지부 앞에서 기자회견을 가졌다. 외국인에 대한 강제출국조치를 폐지할 것을 요구하며 국가인권위에 진정서를 제출하기도 하였다. 또한 시민들의 서명과 우리의 주장을 담은 내용을 가지고 복지부 장관의 면담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하는 일도 있었다.

12월 1일은 감염인 인권의 날이다. 정부는 이날 까지도 감염인의 목소리를 듣지 않았다.

 




"Let the bullet that rips my brain open every closet door in America."
(“내 머리를 뚫고 들어간 총알이 미국의 모든 벽장 문을 열게 되길” _하비밀크)

깻잎 머리의 희귀성질병을 앓고 살아가는 스무 살의 아이는 어쩌면 별거 없는 인생을 살아가고 싶었을 것이다. 감염인들 또한 평범하게 사람들과 살아가고 싶을 뿐일지도 모른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상처 주는 이 야만스러운 세상 안에서 꿈꾸고 절망하며 견뎌내고 있다. 그들은 어두컴컴한 자신들의 방에서 나와, 어떤 차별과 편견 속에서도 사라질 수 없는 희망을 우리들에게 이야기 한다. 나는 올해도 그들에게서 용기와 희망을 보았고, 앞으로도 감염인들의 모든 투쟁에 함께 할 것이다.



정숙 _ 동성애자인권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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