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게이 영화감독인 데릭 저먼의 영화들은 추상적인 게이 감수성의 모범적인 발현으로 전세계 퀴어들의 시선을 사로잡아 왔다. 특히 바로크 시대를 풍미했던 화가 카라바조의 일대기를 다룬 <카라바조>(1986)는 모든 장면을 세트에서 촬영하며 명암이 뚜렷한 카라바조의 회화 세계를 그대로 옮겨 놓은 듯 한 탐미적인 영상을 과시하고 있다. 그의 또 다른 전기영화 <에드워드 2세>(1991)는 최소한의 정보를 제공하는 미니멀한 화면 구성으로 시대적 배경이 모호하게끔 처리하였다. 두 영화 모두 동성애자로 가정된 역사 속의 실존 인물들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키지만 엄밀한 고증에 기반에 재현에는 관심이 없어 보인다. 나아가 자동차에 기대어 선 카라바조의 모습이라는 시대착오적인 미장센이나 보수적인 대처리즘에 대항하는 ‘아웃레이지!Out Rage!’ 시위대를 이끄는 에드워드2세라는 시대착오적인 사건의 전개는 시대와 상충하는 그들의 불가능한 욕망을 오늘날의 자장 안으로 소환한다. 몇 세기를 관통하여 항존하는 소수자 억압의 거듭된 복제는 시대를 초월하여 언제나 거기에 있었고 또 있음을 암시한다.
이러한 퀴어들의 시대착오적인 조우는 일본의 에도 막부 시대를 배경으로 사랑하는 두 남자가 펼치는 로드 무비인 쿠도 칸쿠로 감독의 엽기적인 코미디 영화 <한밤중의 야지 키타>(2005)로 계승된다. 에도 시대의 ‘야지’와 ‘키타’는 오토바이를 타고서 ‘이세(二世)’를 찾아 아스팔트 도로를 ‘시대착오적’으로 질주한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영토는 시대에 따라 구분 되어 있어 엄밀히 말해 주인공들이 생활하는 터전은 어느 특정 시대에 반드시 속한다고 단언할 수 없다. 즉 영화가 차용한 에도 시대는 지역적 특수성일 뿐이다. 따라서 데릭 저먼의 영화가 탈시대적 배경을 갖는다면 야지와 키타가 여행하는 곳은 전(全)시대적 공간으로서의 잠재성을 지니고 있다. 에도 시대에서 출발한 그들이 갑자기 고층 빌딩으로 둘러싸여 있는 21세기 일본으로 넘어 오게 된다. 여인의 기모노를 흩날리며 질주하는 오토바이 옆으로 가마를 끄는 사람들이 지나간다. 세라복을 입은 소녀들이 야지에게 열광하고 산 중턱에 위치한 주막에서는 남자 주모가 인상적인 드랙쇼를 펼치며 술을 판다. 심지어 주인공들은 전통 의상에 힙합 모자와 금속 목걸이를 한 채 랩핑을 하기도 한다. 이렇듯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공간 위에서 쉴 새 없이 전개되는 주인공들의 시대착오적인 충돌은 마침내 내세와 이세라는 비시대적 층위로까지 아찔하게 영역을 넓힌다.
야지와 키타는 공간화 된 시대에서 과거와 현재, 이세를 자유롭게 넘다들며 성 정체성의 거짓된 절대 경계를 지우고 시장 경제의 논리에 지배된 물신화를 극복하며 새로운 퀴어 정체성에 근접한다. 소외와 억압의 역사를 가슴에 아로 새긴 이들이 다시 태어날 수 있는 영역이란 이처럼 비현실적인 것들과의 낯선 어우러짐이 빚어내는 환영적인 공간이며 그곳은 거짓된 절대에서 탈피하여 진실한 시적 절대로의 이행을 가능케 하는 토대이다. 이제 시대착오는 기존의 역사를 비웃고 전복하며 새로운 역사쓰기의 야심을 드러낸다. 역사의 시대착오적 재구성은 이성애중심적인 역사주의로의 함몰에서 벗어나 퀴어적 역사 쓰기의 전범을 제시해 준다. 영화 속에서 익숙하게 재현되는 퀴어들의 삶은 박제된 과거로 고립되거나 노스탤지어로 단순히 소비되는 것을 경계한다.
또한 시대착오는 비가시적 가시성을 조건으로 존재하지 않는 듯 존재하라는 어려운 부탁, 혹은 시대적 요청 앞에서 분열된 이들이 주류 역사의 폭압들-그것은 영화가 재현하는 시대의 폭압이자 그 시대를 재현하는 오늘날의 폭압이다-에 맞서기 위한 포스트모던적인 재현전략이다. 주류 역사가 어떠한 이름을 붙이고 어떠한 정의를 내리든 상관없이 엄연히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서나 당당한 주체로서 존재했고 또 현재 살아가고 있는 성적 소수자들의 과거는 그 퀴어적 역사 재현을 통해 새 생명을 얻고, 동시에 그 역사는 그들의 미래까지 품에 안는다.
경태_ 동성애자인권연대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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