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작 싱글맨을 톰 포드 감독이 영화로 만들었으며 2009년 베니스 영화제에서 콜린퍼스는 남우 주연상을 수상했다.





-그리스토퍼 이셔우드의 『싱글멘』



 

 소설 <싱글맨>은 하루 동안 주인공 조지가 겪는 일을 그리고 있다. 시작은 무척 음침하고 결말은 안타깝다. 외부에서 보면 특별할 것도 없는 하루이지만 그는 잊혀지지 않는 삶의 순간을 때로는 의식적으로 때로는 무의식적으로 기어코 끌어낸다. 그가 꺼내드는 사고의 파편을 따라가 보자.


1. 이중 사고


 지난 '지금'은 모두 과거가 된다. 조만간 그 날이 올 때까지


 한 남자가 평소와 다름없이 출근길에 나선다. 특별한 하루가 되리라는 기대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조지는 이미 중년. 시간의 굴레를 거스르려는 의지는 아주 가끔 찾아올 뿐이다. 연인과 사별한 뒤에도 여전히 그와 함께 한 집에 머무르는 그에게 하루하루란 그 날 이후로 더해진 하루밖에 되지 않는다. 그는 자의든 타의든 죽음과 더불어 살고 있으며 삶에 대해서는 어떠한 기대도 품지 않고 사는 중이다. 하지만 이제 조지는 역할극에도 능하다.


 이제 조지는 배우다. 분장실에서 방금 나와서, 소도구와 조명과 무대 기술자들이 있는 무대 뒤 세계를 서둘러 지나가며, 무대로 등장하려는 배우.


 내 자신에게 진실하지 않은 이유가 꼭 성정체성을 숨겨서만은 아니다. 사람들에게 기대하는 바에 맞춰진 나를 만드는 일도 경험이 쌓이면서 능숙해지기 마련이다. 아직 그렇게 하지 못하는 당신은 어리거나 지나치게 순진한 거겠지. 물론 조지의 오늘은 1962년 늦가을 중 어느 하루이다. 공산주의자들의 테러와 공격이 겨우 가신 직후이자 국가의 부흥에 복무하라는 사명에 따라 제품 생산과 출산이 장려되는 분위기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속에 조지도 있다. 지식인으로서는 냉소를 던지고 퀴어로서는 분노를 삭이면서 그도 사는 중이다.


2. 지식인의 동료


 중년, 장사치, 야바위꾼 같은 다수에서 스스로를 격리시키고도 얻은 것은, 인정 못 받고 메마르고 어려운 지식뿐이다. (중략) 어떤 지식으로 돈을 벌 수 없다면, 그 지식을 왜 알아야 하나? 우울한 교수들은 그런 대중의 말에 어느 정도 동감하며, 자신이 약고 탐욕스럽지 못한 것을 남몰래 부끄러워한다.


 조지는 동료들 사이에서도 외롭다. 자신에게 복종하는 대학원생의 속내가 빤히 비쳐 필요 이상으로 친절하게 굴지 않고 옥스퍼드 출신을 동경하는 동료 교수의 속물근성에 답답해한다. ‘공산주의자를 구별하는 스무 가지 방법’을 알려주는 저명한 교수의 강연을 비웃으러 가자는 동료 교수의 제안에 약간 흥미를 느끼는 정도가 가장 진심 어린 대화의 태도이다.


 유럽에서는 문화를 추앙해야 한다는 그 끔찍한 선전으로 순간순간 우리 미국을 전복하려 하죠. 유럽의 시도가 성공하면, 미국은 끝장이 날 겁니다. ‘반미 활동 감시단이 조사해야 할 일은 바로 그런 유럽의 전복 기도죠.


 그런 그도 적절한 대화 상대를 만나면 냉소와 비웃음 사이에서  진정 조롱 받을 짓을 하는 이가 누구인지 밝히는 짓도 서슴지 않는다. 생계를 걸지 않은 채 지식인이 내딛을 수 있는 최전선에 서야 나올 법한 발언이다. 하지만 이내 그 최전선에서 물러선다.



3. 나이 듦과 친교의 어려움


 조지는 자기 몸으로 즐거움을 얻고 싶다. 살아남은 자의 늙은 몸으로 힘들게 승리를 거두고 싶다. 짐보다 오래 산 몸. 도리스보다 오래 살 몸.


 내내 젊은 학생들과 비교할 때는 열등감을 느끼다가 죽음을 앞둔 애인의 정부와 마주해서는 생의 의지를 불사르는 주인공의 모습이 귀엽다. 체육관을 거쳐 내친 김에 추억의 장소인 언덕까지 내질렀다가 더는 추억을 허용하지 않는 개발 현장을 목격하고 말았다. 가까스로 끌어올린 흥분은 이제 샬럿을 만나 저녁을 먹을지 말지 갈팡질팡하는 변덕으로 변해간다.


 주변 사람들은 짐이 섹스 스캔들을 일으켜서 캘리포니아 주를 떠난 것이 아니냐고 의심했다. 그런 때에도 샬럿은 입술을 앙다물고 진실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마침내 샬럿은 짐의 죽음을 완전히 자신의 일로 만들었다.


 그런 샬럿이 무조건적으로 고맙지는 않다. 조지는 자신만의 상념에 빠질 순간조차도 공유하고자 하는 샬럿이 부담스럽다. 적절한 거리. 무척 어렵다. 나이가 들수록 그 거리는 자신의 기분을 축으로 하여 수축과 팽창을 거듭한다. 그러니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은 동시에 가장 부담스러운 사람이 되고 이로써 이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새로운 가족이 되었다. 그리고 조지는 가족이 결코 해결해 줄 수 없는 문제의 뿌리를 찾아 취한 채 샬럿의 집을 떠난다.



4. 관능과 죽음


 케니의 손 안에서 조지의 몸은 발목에서 종아리로 미끄러지며 순식간에 땅에 닿는다. 조지가 해변으로 내려오는 사이, 조지와 케니의 몸은 짧지만 강렬하게 맞닿는다.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살아남는 것은 유혹당하고 싶은 관능성일까. 결코 먼저 내색하지 않으면서도 조지는 케니가 하는 말과 행동 하나하나에 매혹되어 일말의 가능성을 거의 확신으로 끌어올린다.


뭐, 자네가 오해하든 말든 난 상관 안 해. 중요한 건, 내가 여기 있고 자네도 여기 있다는 거야. 그리고 우리를 방해할 사람은 아무도 없단 거야. 이런 일은 다시 일어나지 않겠지. 정말 말 그대로야! 그리고 시간은 정말 짧아!


 조지는 짐과 같은 의미가 될 새로운 남자친구를 찾기 시작했지만 시간은 그의 편이 아니다. 잠재할 뿐 결코 사라지지 않는 구애와 관능의 마력을 새삼 깨닫게 된 그 순간에 그의 죽음도 밀려온다. 꿈은 밀물에 잠긴 영혼의 상으로, 짐이 떠난 그의 집은 기능을 잃은 육체의 상으로 묘사되어 읽는 내 자신이 그 둘의 분리를 무력하게 바라보고 있는 것만 같다.



6. 오늘


  조지가 기억에서 항구를 끌어낸 것은 마술사의 카드 뭉치에서 아무 카드나 생각 없이 한 장을 꺼낸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조심하라! 마술사의 카드처럼 그 카드는 예정된 것이었다.


 잠에서 깨자마자 예전 애인의 얼굴 윤곽이 생생하게 떠올라 당황하며 눈을 감은 적이 있다. 너무 오래 전 일이 불현듯 떠올라서일까. 아니, 정말로 떠올리고 싶었던 순간에는 얼굴을 그릴 수 없었기 때문일지도 몰라. 지난 일은 닫힌 문이라는 자기계발서 서문의 당당한 말투가 무척 거슬려 한 마디 내뱉는다. 웃기지 마. 충고를 가장한 변명도 덧붙인다. 그렇게 쉬운 게 아니란다, 인생이.


 충분히 기다렸다가 아까 내뱉은 말에 정당성을 부여하고자 어렵게 말을 꺼낸다. 왜냐하면 인생은 지금 이 순간이 켜켜이 쌓인 총합이기 때문이지. 성적인 혼란과 섹스와 사랑과 번민과 받아온 교육과 되받아치는 반발과 각종 말싸움, 재잘거림, 새벽까지 이어지는 술자리, 구애와 실망과 죄책감과 들어가는 나이만큼 한 치 오차도 없이 커져가는 의무감과 왜 그래야 하냐고 또다시 반발하는 심리가 오늘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나를 뒤흔들어놓는다. 이토록 아무렇지 않다는 듯 아프게.




김형수 _ 동성애자인권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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