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수(한국HIV/AIDS감염인인권연합 KNP+)
| 연재의 말 게이들은 외계에서 온 것 같다. 그래서 지구에 여행 온 외계인의 삶을 기록하는 심정으로 이 글을 쓴다. 참…이 나이에 글을 쓸 줄이야, 가 아닌 예전부터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이제야 풀어 보는구나, 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남자로서가 아닌 게이로서의 내 삶을 솔직하게 기록해 본다. |
1989년, 오징어 배를 타고 연근해로 나갔다. 오징어 채낚기는 각자 본인이 오징어를 잡는 대로 월급이 정해지는 보합제의 형태다. 오징어 낚시는 멍텅구리 낚시라고 미끼 없이 낚시 바늘을 여러 개 매달아서 바다에 던진 뒤에 당겼다 풀었다 하면서 오징어를 낚는 재미있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겨울 바다는 매서운 추위와 싸워야 해서 힘들었다. 우리는 오징어 낚싯배로 흑산도 앞바다부터 독도 앞바다까지 대한민국 바다를 다 돌아다녔고 그렇게 5개월 동안을 배에서 생활했다. 흑산도에 내려 잠시 휴식을 취한 날에는 배의 선원들이 흑산도 아가씨를 찾아 갔고 나혼자 숙소에 남아 흑산도 아가씨 노래를 흥얼거리곤 했다. 선원들은 계약 이외에 본인이 잡은 약간의 오징어를 배에서 말려 하선 시 팔게되면 쏠쏠한 수익을 가지곤했다.
부산항에 하선하자 같이 배를 탔던 친구의 마음이 변했다. 원양어선은 타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결국 나 혼자 국내 중소업체 선사와 2년 계약을 하고 아프리카 모리타니에 가기로 결정했다.
1990년 4월, 나를 포함한 8명의 예비 선원들은 김해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일본 나리타, 독일 프랑크푸르트, 스페인 마드리드 공항을 경유해서 50여 시간 만에 라스팔마스에 도착했다. 스페인령 라스팔마스에는 우리나라의 유럽 선원 전출기지가 있었다. 국내 수많은 선사의 선원들을 위한 숙소들이 있었는데, 대서양을 기점으로 삼은 원양 선사의 승선 대기자들과 하선하여 귀국을 준비하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나는 라스팔마스에서 이틀 정도 머물다가 아프리카 모리타니의 누아디라는 항구도시로 떠났다.
모리타니에 도착한 나는 한국인 선원 대기 숙소에서 약 일주일간을 머물렀다. 모리타니는 국토의 절반 이상이 모래사막이고 아프리카 북부의 세네갈과 국경을 마주한 가난한 나라였다. 전 세계 문어의 50프로 이상이 잡히는 곳이었고, 그곳의 집들은 아프리카 특유의 흙담집이었다. 집에서 나와 조금만 걸어도 사막이 보였다.
함께 온 일행 2명과 드디어 문어잡이 배에 승선했다. 500톤가량의 문어잡이 배에는 한국인 선원 20여 명과 모리타니인 10여 명을 포함하여 40여 명의 인원이 있었다. 그곳의 모든 외국계 어선들은 본토인을 어느정도 이상 고용해야 한다는 조약을 지켜야만 했다.
대부분이 20-30대인 선원들은 2개 조로 나누어 4시간씩 교대를 했다. 고기가 올라오는 시간에는 선장이 배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들리도록 벨을 울렸다. 기관실과 잠을 자던 대기조까지 총출동해서 갑판에서 대기했고 그물이 올라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물이 올라오면 문어와 잡어 잡동사니 등을 골라서 문어만 어창으로 내려보냈다. 그러면 어창에서 문어를 크기별로 골라서 문어 대가리를 뒤로 까뒤집었다. 그렇게 안 하면 문어가 바닥에 붙어서 떼기가 어려워서였다. 그 후 곧바로 문어를 급냉실로 내려보냈다.
모리타니인들도 각 조에 배치되어 함께 일을 했는데 그들은 힘들고 어려운 일은 안 하려고 했다.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우리는 쉬는 시간이면 함께 모여 손짓발짓을 섞어가며 대화하곤 했다. 그런데 그들 중에 몸 좋은 모리타니인이 어느새 마음에 들어와 버렸다.
배에서는 사워를 바닷물로 하고 마지막 헹굴 때만 민물을 사용했다. 하루는 샤워실에 갔다가 그 친구가 혼자 샤워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호기심에 샤워하는 그의 몸을 문틈으로 훔쳐보다가 눈이 마주쳐버렸다. 얼른 자리로 돌아왔는데 몸 좋은 모리타니 친구가 나를 따라오더니 뒤에서 몸을 안았다. 그도 호감이 있던 것이다. 배에서 가장 으슥한 기관실 뒤쪽으로 가서 서로를 애무하기 시작했다. 그는 놀랍도록 우람한 물건을 가지고 있었다. 입안에 가득 찬 그의 물건은 정말 부드러웠다. 그 후로도 우리는 서로를 입으로 애무하는 만남을 은밀하게 가졌는데 그의 크기를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아서 뒤로 하는 섹스는 하지 않았다. 나는 그와의 은밀한 시간이 더 잦아지기를 바랐지만 배 안에서 함께 생활하는 동료들의 눈이 무서워서 아쉽게도 잦은 만남을 갖지는 못했다.
뱃일은 너무 힘이 들었다. 함께 온 한국 남자는 기혼이었는데 신혼생활 1년 만에 배를 타러 온 것이어서 밤이면 고향 생각과 아내 생각에 눈물을 흘리곤 했다.
한번 출항하면 6개월 이상 바다에 머물면서 고기를 잡았다. 그 기간이 너무 길어 육지에 내리면 육지 멀미를 할 정도였다.
뱃일을 한 지 1년이 되어 갈 때쯤 몸에 이상이 오기 시작했다. 몸살도 자주 나고 향수병이 심하게 오기 시작했다. 견디다 못해 1등 항해사에게 계약을 해지하고 집에 가겠다고 했다. 당연히 안 된다고 난리가 났다. 끝까지 고집을 부리며 하선을 요구했고 선사 측에서는 보합에 관한 계약위반으로 계산을 해줄 수 없다며 기본급만 계산하고 왕복 비행기값을 내가 문다는 조건으로 하선에 합의해 주었다.

하선한 이후에는 모리타니 항구도시에서 지냈다. 한국에 가기까지 대기 기간이 두 달이나 걸렸다. 선원 숙소에서 지냈는데 그곳에는 선원 대기자들도 많이 있었다. 아침은 바게트와 한국음료 써니텐 한 캔이 전부였고 점심과 저녁은 된장찌개나 김치찌개 등 한국 음식이 나왔다. 그곳에 있는 선원들이랑 모리타니 사막을 구경하러 가곤 했는데 지나다니는 어린 남자아이들이 바지 앞섶을 가리키며 ‘기브미 원달러’라고 말하곤 했다. 1달러를 주면 그곳을 만지게 해주겠다는 거였다. 한번은 숙소에서 청바지를 손으로 세탁해서 숙소마당에 걸어놓고 다른 옷을 가지러 가서 나와보니 물이 뚝뚝 떨어지던 청바지가 보이지 않았다. 이미 모리타니인이 들고간 것이었다.
모리타니는 우리나라 티코 차량이 거리를 달렸고 김일성이 지어준 김일성대학교라는 이름의 대학교가 있는 (당시 아프리카에는 북한이 남한보다 더많이 알려져있다) 여러모로 재밌는 나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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