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드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6월의 끝자락 어느날이었다. 별 다른 날은 아니고, 낮에 가족모임을 갔다가 행성인 정기모임에 가야하는 일정이 있는 날. 하나 변수가 있다면 그 전날에 보건소에서 종합검사를 받았다는 것 정도였다.
얼마만이었을까, 얼추 1년은 넘은 것 같다. 담당 직원은 빠르면 내일 중에도 검사 결과를 포털에서 볼 수 있을 거라고 했다. 검사 항목은 4가지. 다음날 점심쯤에 들어가보니 벌써 3개의 결과값이 나왔다. 세상 참 빠르네, 라는 감상과 함께 나머지 한칸에도 음성이 나오길 기다렸다. 요즘보다는 덜 했지만, 그때도 제법 더운 날이라 저녁 일정 전에 잠깐이라도 집에서 쉬기로 마음 먹었다. 집 앞 정거장에 내리기 바로 직전에 괜히 한번 더 결과를 조회했고, 빈칸에는 ‘이상값'이라는 단어와 함께 검사지 항목이 하나 더 늘어있었다. 그렇다. 나는 HIV 감염인이 될 예정인 것이었다.
(물론 1차 검사의 경우 위양성의 가능성도 있지만, 나에게 해당되진 않았다.)
순간 어깨부터 손끝까지 털이 쭈뼛했다.
음 이제 어떻게 해야하지?
그래, 약 먹으면 되는 거지.
대체 언제?
아냐, 이런 생각 안 하는 게 좋다고 했어.
정신차려, 너 배운 성소수자잖아.
아, 누구에게라도 전화를 해야겠다.
순간 머리 속에 떠오른 건 가장 최근 내게 감염 사실을 알려준 친구였다. 얘도 자기 양성 뜨고 바로 나한테 전화했으니 쌤쌤인걸로. 전화 내용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그렇게 큰 도움이 되진 못했다.(농담이다) 그래도 친구 목소리를 들으니 한결 낫다. 근데 앞으로 어떻게 준비해야 하지? 종종걸음으로 집앞 흡연장을 배회하며, 감염인 모임에서 활동하는 친구에게 연락을 남겼다.
"ㅇㅇ님...지금 전화 되나요?”
1분도 안되어서 답이 왔다. 바로 전화를 걸었다. 수화기 넘어로 그의 목소리가 꽂혔다.
“너. 혹시 걸렸니?”
아니 선생님, 맞긴한데. 그런 의도로 전화한 게 맞긴 한데…아무리 자주 연락을 안했기로서니 제가 그럴 때만 연락을 하겠나요.(반성합니다)
사실 이때 정신이 출타 중이어서 자세한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는 앞으로 준비해야 할 것들과 일정들을 알려줬다. 조만간 가입 신청서 보내겠다는 인사를 끝으로 집에 들어왔다. 아침부터 멀리 본가를 다녀온 것부터 체력을 소진하게 했지만, 생각치 못한 이슈까지. 한참 누워있었다.
나는 괜찮은가. 얼마나 괜찮아도 되는거지? 얼마나 괜찮지 않아도 되는거지? 빨리 약 먹어야 하는데. 안 빼먹고 약 잘 챙겨 먹을 수 있을까. 그래, 고작 한 알인데 너무 걱정 말자. 누구에게 말해야 할까. 일단은 행성인 친구들과 같이 술 마시는 친구들. 너무 놀라진 않을까. 괜히 말하는 걸까. 그래도 말하고 싶은데.
같은날 행성인 모임이 있던 건 운이 좋았다. 몇명에게 말을 했고, 다른 몇몇에게는 타이밍을 놓쳐 말하지 못했다. 커밍아웃에 타이밍이 중요하다는 걸 거의 10년만에 새삼 느꼈다.
그 날 이후에도 친구들을 만나서 말할 틈이 보이면 말했다. 아직 새로운 커밍아웃을 듣지 못한 친구들에게 말하지만, 절대로 타이밍의 문제이니 서운해하지 말고 기다려주셔라.
혼자서 생각이 깊어졌으면 많이 힘들었을 것 같은 날이 그 뒤에도 몇번 있었는데, 그때마다 말한/말 할 수 있는 친구들이 있는 것이 다행이었다. 잘 관리만 하면 별 게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고, 그런 정보에 대해 부족함 없이 알고 있었지만 어떤 순간에는 감당하기 어려운 마음이 아직 있다.
일주일만에 병원 진료를 다녀왔고, 벌써 한달째 (첫째 날 빼고) 약도 꼬박 잘 먹고 있다. 감염 사실을 알게 된 첫날의 이야기는 줄이고 줄여서 이 정도. 아직 보건소에서 전화받은 이야기와 첫 병원 진료 이야기는 꺼내지도 않았지만, 나름의 분량 조절이라고 생각해주셨으면 하는 바람이다. 약간은 일기같고, 아직은 낯선 일상을 하나씩 나눠보려고 한다. 이 글이 누구에게 어떤 의미가 될지, 뭐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내 면역력에는 도움이 될 것같다. (여러분의 좋아요는 큰 힘이됩니다.)
아무튼 월세도 공과금도 내지 않는 손님과 ‘오늘부터 우리는’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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