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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V AIDS

[회원 에세이] 성병이 없어서 깨끗하다는 님들에게

by 행성인 2025. 8. 25.

보드 (행성인 HIV/AIDS인권팀)

 

 

엑스(트위터)나 인스타를 하다보면 종종 보는 사진이 있다. 성병종합검사 결과지를 캡쳐해서 올리거나, 오라퀵 키트를 올린다. 이미지에는 모든 결과값이 ‘음성’이거나 키트의 한줄 뿐이다. 그러고는 꼭 한마디를 붙인다 “저 깨끗해요”. 깨끗한게 특권이라는 걸 알겠다. 결과지에 ‘판정보류’, ‘양성’이 뜬 날에도 굳이 엑스는 추천 알람으로 일면식도 없는 이의 ‘음성’ 결과지를 보여줬다.

 

나도 결과지를 굳이 님들께 보여주겠다. 더불어 확진 서류를 떼서 처음 병원에 다녀온 그 날을 복기해보려고 한다. 아직 ‘깨끗하신’ 여러분보다 먼저 겪고 친절하게 도움이 돼보겠다. 걱정하진 마셔라. 이 글을 읽는다고 여러분의 깨끗함에 흠결이 생기진 않을 거니까. 아니어도 어쩔 수 없다.

 

 

 

벌써 두 달이 넘어간다. 지난 글에 말한 것처럼 검사 다음날 이미 보건포탈을 통해 ‘판정보류’를 알고 이런저런 준비를 하고 있었다. 보건소에서 전화가 온 것은 주말이 지난 화요일이었다. 요즘은 친절하게 보건소에서 전화가 왔다고 화면에도 띄워주더라. 여기서 심장이 살짝 쭈뼛.

 

“안녕하세요. ㅇㅇ구 보건소 ㅇㅇㅇ입니다. ㅇㅇㅇ님 맞으시죠?”

“네 안녕하세요^^” (여기서도 친절톤을 잃지 않는 영업직..)

“지난주에 받으신 검사관련해서 연락드렸는데요”

“아 이미 보건 포탈에서 봐서 알고있어요.”

.. 혹시 이미 치료받고 계신가요?”

 

 너무 아무렇지 않게 말했나?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에서 당황이 느껴진다.

 

“아뇨 이제 받아야죠.”

 

그렇게 보건소에 가서 서류를 받을 날짜를 이야기하고 전화를 끊었다.

 

어쩌다보니 그 주에 바로 병원 예약에 성공하여 그날 오전 보건소에 가서 서류를 받아 가기로 마음 먹었다. 여기서 순진한 새내기 감염인의 실수가 있다는 걸 나중에 알았다. 다들 잘 모르는 이야기를 하나 하자면(나도 몰랐다), 확진이 되어서 진료와 처방을 받으면 비용의 90%는 건강보험료에서 지급되고, 나머지 10%를 보건소에 청구하여 100% 지원이 된다. 이 과정에서 익명으로 진료받길 원하면 그 10% 지원을 청구하지 않을 수도 있다. 지원을 받으려면 보건소에서 해당 병원에 협조 서류를 미리 보내야한다. 여기서 나는 보건소에 어느 병원으로 간다고 분명 말했던 것 같은데, 제대로 듣지 않은 것인지 업무 처리가 그러한 것인지 협조 서류가 발송되지 않았다면서 첫 진료에 10%를 내 돈으로 내고 영수증 처리를 해야된다는 걸 당일에 알았다. 당황했지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당시엔 당장 약을 먹어야한다는 강박만 있었으니까. '무사히 약에 닿을 수 있다면 이런 수모 쯤이야...' 했을지도. (물론 내 서류를 엉뚱한 병원에 보내서 2주 뒤 진료때도 내 돈을 또 내고 청구할 뻔 했을때의 큰 빡침은 간신히 참았다.)

 

다시 첫 진료의 그 날로 돌아가자. 전날 지인 생일 파티여서 제법 늦게까지 술을 마셨는데 아침에 눈이 반짝 떠졌다. 진료는 오후였지만, 병원 예약에 도움을 준 친구와 점심 약속이 있어서 그 전에 보건소를 들렀다. 보건소에 도착해서 사유를 얘기하니 담당자가 나와 진료실로 보냈다. 당일 이해가지 않는 일이 하나 있었는데, 보건소 의사는 한마디도 없던 것이다. 생각의 의자가 이곳일까. 몇가지 서류를 작성하면서 위에서 먼저 말했던 진료비 청구 이야기를 들었다. 다시 이곳에 와야한다니… 약간 끔찍하다고 생각했고 질질 끌고 싶은 마음은 없었기에 오늘 몇시까지 오면 제출이 가능한지 물어봤다. 음 전철 시간만 도와주면 문제 없겠군. 일단 약을 타기 위한 모든 준비물을 다 챙겼기에 병원으로 향했다.

 

병원 앞에서 친구를 만나 밥을 먹었다. 뒤에 진료라는 일정만 없다면 무조건 와인을 시켰을 텐데 라는 실없는 소리를 나누고 카페로 가서 남은 진료 시간을 기다렸다. 시간이 다가오자 친구는 슬슬 병원으로 가야한다고 하고는, “이제 다 큰 어른이니까 병원은 혼자 가도되죠?”라는 말로 나를 배웅했다. 친구를 뒤로 하고 횡단보도를 건너면서 알았다. 난 병원을 혼자 갈 수 있는 다 큰 어른이 아니란 걸. 병원에 도착하고서 부터 실시간으로 마음이 무너졌다. 다행히 아는 감염인 친구와 톡으로 피맛나는 농담을 주고받으니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그렇게 드디어 내 차례. 당일의 기억이 조금 흐리긴 하지만 진료실에 들어가고서부터 약을 타기까지 일사천리였다. 정신차려보니 외래약국 앞에서 약봉투를 받자마자 첫번째 약을 삼키고 있었다.

 

진료실에는 무지개와 레드리본이 겹쳐진 형태의 금속뱃지를 달고 있는 담당 교수님이 계셨다. 내 병이 뭔지, 이 바이러스가 어떤 것인지 세세하게 이야기해줬다. 에이즈팀에서 수없이 듣고 나눈 이야기들.. 레트로 바이러스. 하루 한알. U=U까지 친절하게 설명해주시곤 치료제에 대한 이야기. 무려 내가 먹을 약을 내가 고를 수 있다는 것도 그때 알았다. 뒤 이어 만난 상담간호사님은 나의 마음 상태를 체크하는 설문지를 주시곤 몇가지 이야기와 함께 감염인 커뮤니티가 있다는 소개를 해줬다. 나는 이미 가입하려고하는 커뮤니티가 있고, 행성인이라는 단체에서도 에이즈팀에 있다는 TMI도 나눴다.(아쉽게도 간호사님이 행성인은 모르시더라 분발하자 행성인(?))

 

그렇게 몇 가지 검사를 지나서 약을 타고, 진료비 영수증을 들고서 다시 왔던 길을 돌아 보건소로 가서 진료비를 청구하고(아까 얘기한 헤프닝을 기억하자) 끝. 이었으면 좋았겠지만 바로 뒤에 PT수업도 갔다가 자주 가는 바에 들러 친구들에게 오늘의 고생을 토로하고서야 하루가 끝났다.

 

벌써 두 달. 그 사이 병원도 세 차례 다녀오고, 1박 2일로 워터파크도 다녀오고, 2박 3일 엠티에 가서 빠지라는 것도 처음 경험하고, 직장은 여전히 엉망진창이고, 술을 줄이겠다는 다짐(다음달에는 진짜다)만큼 많이 마시고, 새로운 감염인 친구들도 생기고, 꾸준히 만나던 남자도 만나고, 낯선 남자도 만나며 (아마도) 잘 지내고 있다.

 

그래서 이 글을 왜 쓰기 시작했더라. 아 맞다 그래. 여러분의 음성 진단서를 굳이 내가 보게 만든 분들. 내 글을 읽고 어떤 생각이 들었을지 궁금하다. 사실 별 생각 없거나 괜히 시비냐고 생각했으려나. 나도 님들이 허공에 뿌린 진단서를 보고 비슷한 생각을 했다. 왜 시비걸지. 음성양성 할거 없이 생존하고 노동하고 만나고 섹스하고 안그래도 바쁜데 괜히 길가는 감염인을 건들지 말아줬으면 좋겠다. 님들은 별 생각없이 올렸거나 잘팔리고 싶어서 올렸겠지만, 그거 애꿎은 감염인의 성적 권리와 실천에 방해된다. 어짜피 술집에서 클럽에서 다크룸에서 어플에서 만날 사이끼리 그러지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