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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 이야기/코코넛의 눈코입귀

[코코넛의 눈코입귀] 문란하게 말할 자유와 권리

by 행성인 2025. 9. 18.

 

코코넛(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사진제공: 정우

 

퀴어가 문란하다는 말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은 퀴어 당사자뿐만이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그리고 사실 퀴어가, 혹은 퀴어인 내 자신이 어떻게, , 언제, 어떤 방식으로 문란한지 돌아보고 이에 대해 논하는 것도 꽤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게이 친구들끼리 술을 마시면서 애널섹스, 남자의 가슴과 자지, 식이 되는 남자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말고도, 애인이나 섹스 파트너, 혹은 번개 상대와 서로를 탐색하고 원하는 섹스의 방향에 대해 합의하는 그 과정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말할 수 있는 것이 나 자신의 즐거운 성생활을 위해서도 어느 정도 필요한 일이다. 그런데 동시에 이런 내용을 거부감 없이 편하게 논할 수 있는 사람들도 그렇게 많지는 않은 것 같아 보인다. 어떻게 보면 그렇게 놀랄 만한 일도 아니다. 섹스, 애무, 오르가즘, 사정과 같은 단어들을 스스럼없이 입에 올리면서 자신의 성욕이나 성생활에 대해 말하는 데에 거부감이 없는 사람이 퀴어이고 아니고를 떠나서 솔직히 얼마나 많겠는가. 당장 나부터도 그렇게 나 자신의 섹스와 성적 권리에 대해 좀 더 스스로를 내려놓고 말하는 연습을 굉장히 오랫동안 하는 중이다. 이런 이야기를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한다면 정말 TMI 남발이 되겠지만, 스스로가 어느 정도 문란할 수도 있고, (유성애자라면) 성적인 욕구를 지니고 있으며 성관계를 가지기도 함을 인정할 수 없다면 스스로가 만족스럽고 즐거운 섹스를 하는 데도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다름이 아닌 내가 종종 그랬었기 때문이다. 내가 나의 섹스와 성적 욕구, , 섹스할 때 느끼는 감정에 대해 말하는 연습을 하는 이유는, 비단 성소수자의 성적 권리를 탐구하고 이를 인권운동이나 활동에 녹여내서 적용하기 위함뿐 아니라 나 스스로가 즐거운 섹스, 후회 없는 섹스를 하기 위해서기도 하다.

 

스스로의 욕망과 섹스에 대해 말하기를 주저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어쩌면 그런 것과 비슷한 것일 수도 있겠다. 게이가 아닌 퀴어들 중에도 이런 사람들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간혹 가다 게이들 중에 퀴퍼(퀴어퍼레이드)가 너무 문란해서 싫다’, ‘퀴퍼가 문란하기 때문에 사회에서 성소수자에 대한 인식이 더 나빠지는 데에 일조한다정도의 의견을 표명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그런 사람들이 퀴퍼의 문란함을 싫어하는 것과, 문란한 욕망이나 섹스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주저하는 것은 일맥상통하는 것 같다. 퀴퍼가 정말로 사회 통념상 문란하다고 간주될 수 있는지 여부는 둘째치고, 퀴어 당사자 스스로 자신의 성적 욕망에 대한 표현이 문란하다, 혹은 아이들에게 보여주지 적절히 못하다고 평가하는 것은 퀴어 당사자가 자기표현을 적절히 못하다고 스스로 억누르는 기제가 작용하며, 이는 퀴어가 스스로의 성적 욕망과 섹스에 대해서도 제대로 표현하고 돌아보지 못하는 것과 그 궤를 같이 한다. 성적 욕망에 대해 이야기하고, 섹스에 대한 표현을 입에 올리는 것은 스스로 문란해 보이고, 점잖지 못하거나 저급한 사람이 되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한다. 성적 욕망에 대한 표현을 억제하는 것은 퀴어 당사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퀴어와 비퀴어의 성적 권리에 대한 담론을 추잡한 것으로 규정하는 사회의 영향을 받은 것이며, 억압의 대상인 성소수자들조차도 이러한 이데올로기에서 자유롭지 못한 경우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적지 않은 수의 성소수자들은 성적 권리에 대해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것이 퀴어가 문란하다는 인상을 스스로에게도, 일반 대중에게도 강화시킨다는 느낌을 갖는다. 애무, (애널)섹스, 식과 같은 단어를 입에 최대한 올리지 않는 것이 점잖고책임감 있게 세이프섹스를 할 수 있는 퀴어, 사회에서 규정한 정상성에 그래도 부합한 그런 사람으로 스스로에게나 일반 사회에게나 인정받을 수 있을 것만 같다. 내가 그랬다. 그리고 지금도 완전히 그렇지 않느냐 하면, 대답을 망설일 것 같다.

 

그렇지만 나는 참여하는 활동 의제로 중요하게 생각하고 즐거운 섹스를 위해 이러한 담론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해서 세이프섹스라는 슬로건에 안주하지 않는 연습을 하고 있다. 공익적인 이유보다도 나 자신을 위한다는 사심이 솔직히 더 크다. 그것이 나의 성적 권리에 대해 말하는 것이기도 하겠지만 말이다. 성소수자로서 성적 욕망에 솔직해지는 것은, 사회가 나에게 강요한 성적 정상성, ‘착하고 건전한퀴어의 이미지에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며, 나의 몸과 욕망을 자유롭게 탐구하고 내가 나의 신체적, 정신적, 감정적 만족을 추구할 권리가 있음을 선포하는 행위이다.

 

사회가 성소수자를 문란한, 성병을 퍼뜨리는, 양지에 나오지 말아야 하는 그런 대상으로 규정짓는다는 것을 알고 나서야 나는 스스로의 성적 권리에 대해 더 적극적으로 이야기할 준비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착한성소수자는 문란하지 않고 성병을 퍼뜨리지 않기 때문에 정상 사회에 녹아들 수 있고 차별을 받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은, 성소수자와 HIV/AIDS를 분리시키고자 했던 과거의 경향에 연결되어 있다. 성소수자는 문란하고 성병을 퍼뜨릴 가능성이 있어도 성적 권리를 인정받아야 하고 이 권리에 대해 말할 수 있어야 한다. 퀴어라고 해서 비퀴어보다 특별히 더 문란한 것이 아니며, 퀴어의 문란함과 성병에 집중해서 퀴어를 위험한 존재로 매도하고 퀴어 당사자들이 이러한 메시지를 체화하는 것 또한 성소수자 차별이고 혐오이다. 우리의 성적 권리와 욕망, , 섹스 과정에 드는 감정을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투쟁이라고 생각한다. 비퀴어와 퀴어의 문란함이 같은 수준에서 논의될 수 없다는 것이, 비퀴어, 혹은 사회의 상대적 강자인 시스젠더 유성애자 남성이 다른 집단, 즉 여성이나 성소수자 등과 문란함에 대해 같은 수준의 내적 낙인을 가져가지 않는다는 것이 애초에 사회의 불평등을 증명한다.

 

성소수자의 성적 권리를 행성인의 중요한 활동 의제로 가져간다는 것은, 성차별에 맞서기 위해서 성소수자의 에 대해 더 적극적으로 이야기하고 논의할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이 글을 찾아 읽을 정도로 이러한 문제에 대해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혹은 행성인에서 활동하는 회원이기에 이 글을 공유받았다면, 혹은 SNS나 인터넷 서핑의 알고리즘으로 이 글을 접한 사람이라면, 우리가 섹스에 대해 더 잘 이야기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함께 투쟁하고 이야기하고, 문란해질 자유를 외칠 수 있으면 좋겠다. 우리가 저마다의 성적 욕망에 충실해지고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을 때, 그것대로 운동의 결실이리라. 건전한, 안전한, 얌전한, 정상적인 퀴어의 이미지에 무리해서 스스로를 맞출 필요는 없다. ‘퀴어라는 단어 자체가 애초에 정상성에 맞춰지지 않는, 혹은 이상한, 그런 사람들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음을 기억하면 좋겠다. 나는 앞으로도 이상한, 사회의 정상 규범에 맞지 않는, 종종 문란할 수도 있는 그런 섹스를 좇을 권리를 위해 열심히 말하고 논의하고 활동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