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웅 (미술평론가)
| 편집자 주: 본 원고는 미술잡지《아트 인 컬처》2025년 10월호 포커스에 실린 원고를 수정해서 게재했습니다. |
기억을 삼키고 기꺼이 삼켜지는 몸

갤러리 현대 현대화랑에서 이강승, 캔디스 린이 전시하는 2인전 《나 아닌, 내가 아닌, 나를 통해 부는 바람》(8월 27일~10월 5일)은 자신들이 잡지 못하는 것들을 부단히 잡고, 의식을 빠져나간 이야기들을 채우려 한다. 영국 시인 D. H. 로렌스의 시 〈헤쳐 나온 자의 노래〉 첫 구절을 딴 전시는 어떤 속삭임도, 어떤 표현도 모호하게 하거나 훼손하지 않으리라는 다짐보다는 그것의 불가능 속에서도 남길 수 있는 것들과 그릴 수 있는 것들을 보여준다.
이강승은 피부에 주목한다고 밝혔다. 미술사 속 퀴어 예술가와 커뮤니티에 대한 기억과 기록을 소재이자 주제로 삼아온 작가는 진주와 자개, 삼베와 양피지를 콜라주 해왔다. 이들은 피막의 속성과 더불어 기록의 지지체이자 지표로서 피부를 환유한다. 그 일환으로 사용하는 건 벌우드(Burl wood)다. 감염되거나 스트레스를 받으면 뒤틀리고 변형을 일으켜 옹이와 소용돌이치는 무늬를 만드는 나무의 속성은, 그의 콜라주가 상처의 표식이자 과거의 기록으로서, 그리고 기록 자체에 문자와 물성을 부여하는 것에 상응한다. 기억하고 다시 쓰기 위한 언어는 이미 오염된 무늬이고 옹이에 가깝지만, 이는 섬세한 드로잉과 자연의 사물들로, 수어의 손짓과 다른 창작과 협업으로 연결된다. 기억하고 기록하며 수집하는 이의 역능은, 불가능을 기술하고 표현하는 일에 가깝다. 기억의 갈급을 피부의 얇은 두께와 같은 기록들로 남기는 가벼움은 접촉과 연결을 쉬이 이어갈 수 있다.




이강승의 기록과 수집, 콜라주 작업이 잔잔하게 공간을 채운다면, 그 사이로 캔디스 린의 작업이 톤을 조절한다. 이강승이 가볍고 얇은 형식성을 피부로 풀어낸다면, 그는 섭취하기를 택한다. 운석, 약용 흙, 숯, 나무 수액 등 자연물에서 추출한 액체를 잉크 삼아 식용 종이에 그린 드로잉 작업은 독일과 오스트리아 등지에서 부적을 먹어서 치유할 수 있다는 민간 신앙인 ‘슐룩빌트헨’(Schluckbildchen)을 참조한다. 이는 다시 다양한 허브들을 알코올로 우려 추출한 액체인 ‘팅크’(Tincture)를 통해 약용과 정화, 치유 등을 떠올리게 한다.
무엇으로부터의 치유이고 염원일까. 작가는 ‘무엇’에 몰두하기보다는 치유와 염원의 방식 자체에 주목하는 것처럼 보인다. 염원과 치유의 표상과 질료를 삼키는 일은 세상의 풍파에 맞닿아 살아낸 피부를 뒤집어내면서 흡수하고 침습 당하기를 자처하는 일이다. 사물을 삼키지만, 사물을 부리는 세계가 내 안으로 비집고 들어온다. 결국 세계에 삼켜지고 다시 삼키기를 반복하는 순환은, 〈구토 시계〉처럼 뱉은 물이 다시 펌프로 끌어올려져 다시 뱉기를 거듭하는 것과 비슷해 보인다. 외피이자 내피가 되기를 자처하는 태도는 환경을 이용하고 착취하지만 결국 환경에 의존적일 수밖에 없는 일을 상기한다. 혹은 반려 고양이와 가자지구 학살을 나란히 피드에 올리는 일이 부조리처럼 보여도 이질적인 무게의 현실에 이미 놓여 있음을 말하는 작가의 언급에 밑줄을 긋게 한다.
이강승이 82세 퀴어 댄서 메그 하퍼(Meg Harper)와 협업한 영상은 부조리한 피부가 어떻게 몸으로 보여낼 수 있을지 알려준다. 1980년대 HIV/AIDS합병증으로 세상을 떠난 싱가포르계 무용수 고추산(Goh Choo San)을 생각하면서 작업한 퍼포먼스는, (장애여성공감 극단 ‘춤추는 허리’가 자신들을 설명하는 표현을 빌린다면) 퍼포머가 그 기억과 기록을 통과하는 동시에 그의 몸을 경유하면서 이뤄진다. 시간과 세파에 삼켜지는 이는 동시에 기억과 기록을 먹으며 몸짓한다. 핏줄과 내피가 비출 만큼 얇은 피부, 세월에 호응하며 살아낸 피부가 들썩이면서 기억을 삼키고 몸짓으로 토해낸다. 이는 활기를 띠며 쇠락을 살아내는 일이며, 기억의 표상들로 기억의 불가능성에 접근하는 일이자 사람이기를 생각하면서 사람임을 재고하는 일이다.
흉내가 되고 흉내이길 자처하는 일
하지만 부조리를 품는다는 문장은 매끄러울 수 없다. ‘퀴어’를 키워드 삼은 작업은 예전처럼 슬쩍 끼워 넣거나 반대를 무릅쓰고 열었다는 결기가 옛말처럼 느껴질 정도로, 올해 미술 페어 시즌 전후 유수의 미술 기관과 행사들은 퀴어를 주요 키워드 중 하나로 놓는 듯 보였다. 하여 이맘때면 모순이 휩쓴다. 형용사로서 퀴어는 미적 코드로 분리되고 시장에 쉽게 편입되는 것은 아닌가. 제도는커녕 일회적인 소재거리가 되는 것은 아닌가. 물론 그조차 하지 않거나 침묵하는 일이야말로 더 나쁜 선택일 것이지만 말이다.

같은 시기 또 다른 전시를 찾았다. 아트선재센터의 연중 기획 《오프사이트 2: 열한 가지 에피소드》(8월 26일 ~ 10월 26일)는 기존 전시 공간에 머무르지 않는 공간적인 실험과 더불어 역시나 기존의 전시할 만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구분과 판단을 재고하는 프로젝트다. 《오프사이트2》는 여성 및 젠더퀴어 작가 11팀을 모아놓고 전시했다고 밝힌다. 정작 아트선재센터 본 건물에서는 아르헨티나-페루 작가 아드리안 비야르 로하스의 대규모 전시 《아드리안 비야르 로하스: 적군의 언어》를 진행하면서 건물의 정문을 애초에 흙으로 막아버렸다.
‘오프사이트 프로젝트’는 기존 전시 공간을 벗어난 장소를 점한다는 것을 취지로 삼는다. 올해는 국제갤러리 k2와 (투게더)(투게더)다. 손꼽히는 민간 갤러리에 들어온 90년대생 이후의 젠더퀴어와 여성 작가들은(이들은 왜 나눠서 부르는가에 대한 물음은 차치하자) 때마침 국제갤러리의 다른 전시 공간에서 루이스 부르주아와 갈라 포라스 킴의 개인전과 동시에 전시를 진행하면서 비상한 에너지를 잠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국제갤러리라는 포석은 예외적이고 낯선 풍경에 미술의 위계와 명망의 차이를 상기하며 활용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하게 만든다.
그럼에도 전시의 차별점을 생각하면, 이른바 (잭 할버스탐의 '저급 이론'을 활용한 이연숙의 언어를 빌어) 저급의 퀴어 미학적 재현 방식을 펼쳐낸 점이다. 이는 단지 미감의 비평을 가리키지 않는다. 가령 장영해의 영상처럼 부재를 더듬으며 남성과 여성의 규범적 역할을 집요하게 좇아 묻는가 하면 조현진의 조각처럼 홀로서지 못한 채 파편들을 엉성한 상태로 맞추거나 장소에 의존해 세우는 모습으로 출현하고, 한솔이 제작한 영상 속 인물들처럼 자조적이고 잉여로운 몸들의 비생산과 비효율적인 랠리로 반복한다. 하지만 이러한 몸들은 곽소진과 문상훈이 바라보는 손들처럼 장난치고 접촉하는 쾌락 도구가 되기도 한다. 자조적이고 불온한 쾌락을 지향하는 태도는, 루킴의 작업에 이르러 그것이 호락호락하지 않음을 보인다. 텍스트와 설치는 물을 사용하면서 이윤을 챙기고 막대한 에너지를 얻지만, 그들이 사용하는 물은 누군가 투신자살하고 난민이 살기 위해 건너는 길이었음을 숨기지 않는다. 이는 같은 물질이 동등할 수 없음을, 죽음과 이윤이 이미 연결 되어왔음을 시각화한다.

2층에 오르면 좀 더 직접적인 광경들을 만난다. 야광의 설치는 가난한 몸과 마음을 노골적인 표상으로 드러낸다. 인간이라기엔 불완전하거나 인정과 거리가 먼 이들은 그저 흉내 내는 이들로, 노골적으로 자신이 껍데기이고 가짜이며 오물임을 보인다. 죽이는 약에도 살아남았지만 변형되어 기생하고 착취당하면서도 언제고 잔존하는 이는, 성재윤이 두 벽면 가득 투사하는 트랜지션 중인 자기 몸에 연동한다. 이원적 구분에 포획되지 않는 몸들은, 이미 갤러리 바깥에선 본질주의적 성별을 이탈하거나 흉내 낸 몸으로 비난하며 이성애적, 이원 젠더적 정상성에 갈려 나간 지 오래다. 하지만 흉내를 자신의 존재론으로 삼켜버린 이들이 사라지거나 도구처럼 쓰임당하기를 강제하는 현재에도 바득바득 출현하기를 멈추지 않는다면.
(투게더)(투게더)에 전시된 윤희주의 〈실리 힐리 밀키 쇼〉처럼 메타버스 공간에 이주하면서 동시대 퀴어가 디지털 네이티브의 성격을 자처하는 동안, 하지민의 〈니콜라스〉는 동명이인들이 교차하면서 상이한 이미지가 격자로 쪼개진 채 재조합하기를 반복하며 낮은 해상도의 스킨십을 성립시킨다. 이는 존재론적으로 얄팍한 상황에서 얄팍하기를 선택하는 결기일까, 자발적인 축소와 웅크림일까.


이강승과 캔디스 린이 피부-되기를 택하며 기억을 삼키고 다시 삼킴 당하는 이의 예술적 기예를 보였다면, 다른 한편에는 자신을 통과하고 경유하는 행위가 ‘흉내’로 취급당하고, 부수적이고 장식적인 것들로 치부되면서도 이를 실존의 기반으로 삼는 이들이 있다. 전시 기간과 비슷한 시기에 (최근 개관한) 프리즈하우스에서 진행하는 《언하우스》가 국내외 퀴어 작가들의 작업이 단정한 집안에서 불온한 기운을 품고 있다면, 《오프사이트》의 작가들은 한시적으로 빌붙거나 점거하는 모습에 가깝다. 하지만 한시적인 점거가 대형 이벤트에 초대된 것이라고 할 때, 우려하는 건 그 하찮음을 폭로 당하는 것보다 홍지영이 보여낸 우정 같은 것, 죽음을 애도하는 것, 혹은 죽음을 만드는 구조에 반목하는 몸짓까지도 일종의 이벤트로, 흉내의 한시적 스펙터클로 소비되리라는 사실이다. 하지만 흉내가 퀴어로서 의식하는 실존뿐 아니라 페어 주간의 열광 속에 손님으로 초대되고 언제 다시 초대될지 몰라 괴이쩍어하는 이들이 보이는 섬광 같은 결기라면, 그것대로 의미의 체제에 구멍(또한 흉내에 지나지 않더라도)을 낼 수 있지 않을지 생각했다. 하찮아 보일지라도 그 안에 동료의 죽음과 몸을 바꾸는 일과 경찰 앞에 조롱당하며 몸을 파는 일과 어떤 몸들이 저질 취급받는 일들을 장식의 가면으로 응축하고 있다면, 그걸 다 알고서도 부름에 기꺼이 응하며 망나니 칼춤처럼 흉내를 극단으로 이행하고 말겠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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