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이해하는 차이코프스키

Posted at 2010. 5. 26. 23:23// Posted in 무지개문화읽기

 

한국에서 동성애자 차이코프스키 받아들이기


유명인에 대한 일화는 그 유명인보다 그런 일화를 제기하는 이들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말해준다. 특히 어린이들이 읽는 위인전은 당대 사회가 아이들에게 주입하고 싶은 가치가 순진한 척하는 말투로 뒤덮여있다. 1993년에 출간된 음악춘추사 문고판『차이코프스키』에서는 이 작곡가가 결혼에 실패한 이유를 여성을 바라보는 차이코프스키의 순수성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차이코프스키는 평범한 남성들과 달리 여성을 지나치게 이상화해서 결혼생활, 즉 성생활을 할 수 없었는데, 아내였던 밀류코바가 성생활을 밀어붙여서 그가 자살을 시도하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이야기이다. 이런 식이라면 자식을 스무 명이나 낳은 바흐는 여성을 동물로 보아서 그런 것이냐고 반문하고 싶다. (저자가 누구인지 찾아보니 저자는 '편집부'라고 되어 있다.)




반면 2008년에 출간된『조윤범의 파워클래식』에서는 대놓고 "차이코프스키는 동성애자였다. 이것은 하나의 설이 아니라 당시에도 공공연히 알려진 사실이었으며 그의 인생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결국 그는 그 사실을 감추기 위해 비극적인 결혼을 하게 된다."라고 밝히며 이 작곡가에 대한 소개를 시작한다. 출판으로만 보자면 한국에서는 위대한 작곡가 중 한 명이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까지 15년이 걸린 셈이다. 이러한 변화에서 한국사회에서 동성애를 이해하는 방식이 변한 그 더딘 걸음을 추측해볼 수도 있겠다.


차이코프스키의 자기 인식


한편, 이미 1998년에 번역 출간된 에버렛 헬름의 평전『차이코프스키』에서는 그가 동성애자라는 점을 전제로 하고 논의를 전개한다. 저자는 그가 누구와 사귀었는지 밝히는 일은 흥미롭기는 하겠지만 근본적으로 중요한 게 아니라고 일침을 놓는다. 대신 차이코프스키가 겪은 재앙의 근원은 본질적으로 자기 자신을 '비자연적 인간으로 받아들이는 수치심, 자신의 비밀이 탄로 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 다른 이들과 달랐기 때문에 스스로 멸시받을만한 인간이라고 확신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자신의 성정체성을 인정할 수 없으면서도 결혼을 회피하다, 소문을 없애기 위해 충동적으로 결혼을 하는 등 그는 자신의 고통에 속수무책이었다. 그가 27살일 때 결혼하면 우울증이 나을 거라는 주위의 덕담에 지쳐 누이에게 전하는 편지에서, 자신은 "삶에 지쳐 나태한 까닭에 새로운 관계도 맺을 수 없으며 편안하게 지내고 있으니 가정을 꾸밀 능력도 없다. 아내나 자식의 운명을 떠맡기에는 너무 태만한 것 같다. 한 마디로 결혼은 생각조차 할 수 없다."고 토로한다. 소문은 공공연한 비밀이 되었지만 그는 침묵했다. 그러다가 37살이 된 그가 동생 모데스트에게 보낸 편지에는 사람들의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 아무 여자라도 골라서 결혼하겠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그 결혼은 한 달도 못 가서 자살 시도라는 비참한 상황으로 귀결되었다.


작곡가의 사인은 콜레라가 아니다


그가 이렇게까지 자기를 부정할 수밖에 없었던 외부환경은 당연히 19세기 러시아라는 상황 때문이었다. 전통적으로 러시아는 동성애에 대해 별다른 제제조치를 취하지 않았지만 1832년에 법으로 동성애 행위를 금지했으며 위반자는 시베리아 유형에 처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 이러한 법이 적용된 경우는 거의 없으며 실질적인 압박은 핵가족을 신성시하는 서구자본주의의 영향과 혁명이 고조되는 가운데 혁명세력의 금욕주의적인 분위기였을 것이다. 차이코프스키 생애에 걸쳐 점차 동성애에 대한 탄압이 심화되었던 셈이다. 동성애는 차이코프스키가 평생 우울증이 시달리게 된 원인이면서 그가 죽음을 선택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이라는 사실까지 밝혀지고 있는 상황이다.


그가 실수로 콜레라균이 들어있는 물을 마셔 죽었다는 주장이 오랫동안 의심받지 않았지만 납득이 안 가는 부분은 분명히 있다. 3-4일 사이에 발병을 거쳐 죽음에 이르는 증상은 콜레라 환자의 증상이 아니다. 장례식에서 관 뚜껑을 열고 조문객이 그의 손에 입맞춤을 했다는 사실도 기록되어 있다. 콜레라가 사인이었다면 전염 때문에 그런 의식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1978년 음악학자 오를로바는 새로우면서도 충격적인 주장을 제기했다. 차이코프스키가  슈텐보크-페르머 공작의 손자와 교제하고 있었는데, 이를 눈치 챈 공작이 자신의 친구이기도 한 황제에게 그를 고발하려 소장을 작성했고 이 소장은 입법부의 고관 야코비에게 전달되었다. 야코비는 차이코프스키와 법률학교 동급생이었고 비밀법정을 열어 차이코프스키가 비소를 넣어 자결하는 조건으로 그 소장을 접수하지 않기로 했다. 차이코프스키는 동생이 보는 앞에서 비소가 들어있는 물을 먹고 4일 뒤에 사망한다. 비소가 일으키는 증상은 콜레라와 유사해서 의사들은 콜레라를 사인으로 정했고 작곡가는 '불명예'를 피할 수 있었다. 이러한 주장은 2000년 이후에는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비창 교향곡, 인정받은 작곡가의 절망적인 내면세계


그의 죽음은 1893년 자신의 교향곡 6번 비창을 직접 지휘한 지 9일 만에 일어난 일이다. 화려한 피날레 대신 고요하게 잦아드는 소리로 끝나는 교향곡은 당시에 아주 드문 경우였다. 종교적 구원이나 세속적 희망을 바라는 대신 절망을 담은 이 작품은 차라리 작곡가 자신에 대한 독백에 가깝다. 작품 속에서야 자신의 내면을 비로소 드러낼 수 있으니 봐라, 나는 이렇게 고통 받고 있다며 눈물을 떨구는 듯 하지 않은가.


미국 초청 연주와 이어지는 찬사, 러시아 내에서 감히 넘볼 수 없는 입지와 명예 등 가장 성공한 시기를 맞이해 작곡가로서 그는 벅찬 대접을 받았다고 할 정도였는데도 편지에서는 절망을 줄곧 느낀다고 쓰고 있다. 진실을 말하기는커녕 가면을 쓰고 자신이 아닌 자로 살아야 하는 이의 운명은 가혹하다. 음악이라는 매개체조차 없었다면 그는 더욱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가 그렇게 고통에 몸부림치며 썼을 이 작품이 가장 사랑받는 교향곡 중 하나라는 사실은 잔인하기까지 하다. 한참 지난 뒤에도 여전히 남아 드러나기를 갈구하는 상흔이 창작의 뿌리가 된다. 차이코프스키의 위대함은 평생 시달린 자신의 고통에 보편성을 담았다는 점이다. 그러니 양식적으로 그가 뒤떨어졌다는 전문가의 평가는 공허하게 들릴 뿐이다. 인생의 어느 시기에 우리에게 힘든 일이 생기면 비창 교향곡은 우리를 위로해줄 것이니까.




형수 _ 동성애자인권연대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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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5.28 23:36 [Edit/Del] [Reply]
    전 차이코프스키의 곡 중 1812년 서곡을 가장 좋아합니다. 러시아의 승리를 기념하고자 쓴 이 곡을 듣고 있으면 어쩌면 차이코프스키의 개인적 구원을 위해서 쓰고자 한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곤해요. 끝 부분을 들으면 더욱이 그런 느낌이 들더군요. 차이코프스키의 생애야 말로 성정체성과 삶을 분리시킬 수 없다는 정말 절절한 예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갑자기 비창교향곡을 다시 듣고 싶네요. (카라얀이 지휘하고 베를린필이 연주한 곡이 있었는데...)
  2. 어람
    2010.05.31 22:33 [Edit/Del] [Reply]
    이런 내용이 있는 줄 몰랐네요.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3. 나그네
    2018.09.25 00:03 [Edit/Del] [Reply]
    치콥스키가 동성애자가 아니란 주장도 있습니다. 기정사실화 하기엔 동성애자설도 설에 불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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