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회원 이야기/정욜의 세상비틀기

4명의 게이들이 함께 떠난 4일간의 솔직 담백한 여행 이야기

by 행성인 2008. 8. 25.
정욜


 

4명이 모이기 전까지는 과연 여행을 갈 수나 있을까! 서울을 벗어날 수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만만한 삶을 살고 있지 않다보니 지나가는 말로 "같이 여행가자. 놀러가자."라는 말을 습관처럼 했어도 자동차에 몸을 싣는 순간까지 우리가 어딘가로 떠난다는 사실이 실감나지 않았다. 처음 가고자 했던 곳은 남도였다. 광주 망월동 묘지를 시작으로 강진, 목포, 해남을 거쳐 서울로 돌아오는 코스를 생각했다. 그 지역에 대해 아는 것 하나 없었지만 그냥 그곳에 가면 뭔가 볼 만 한 게 있겠지 하는 가벼운 마음뿐 이었다. 빡빡한 여행 일정이 아니라 아침에 늦게 일어나면 늦게 일어난 데로 주변을 산책하며 쉬면되는 그런 여행을 원했다. 큰 욕심도 없었고, 그냥 조용한 곳에서 얽히고설킨 생각들을 정리하고 싶었다. 이것이 내가 기필코 여행을 가야겠다고 생각한 이유였다.


  혼자가 아니라 여러 사람이 함께 가는 여행은 장단점이 있다. 외롭지는 않겠지만, 자칫 여행 스케줄에 차질을 주는 행동이라도 하게 되면 함께 여행하는 사람들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 특히 나처럼 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추천할만한 일이 못된다. 하지만 '쉼'을 목적으로 한 여행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한다면 그 관계는 더 가까워질 수도 있다. 동성애자인권연대를 통해 알게 된 우리는, 시간이 허락될 때마다 부담 없이 볼 수 있는 사이지만 이번 여행은 서로에게 또 다른 의미로 와 닿았을 것이다.


아! 여행 이야기기에 앞서 함께 한 4명의 게이에 대한 소개를 잠깐하자면!

방년 40대 후반을 지나고 있지만 늘 소녀 같은 마음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동인련 섹시 디바, 원더기동'

  주말 종로포차는 내가 접수한다. 손에 연장을 잡았다하면 모든 걸 다 고친다. 귀엽고 어린 친구들은 모두 나에게로 오라고 외치는. '가제트 만능 뚱가이버'

  한때 레즈비언의 마음도 훔치고 갔던 외모의 소유자! 하루 24시간 수다도 자신 있다! 하지만 이제 애인을 잘 못 만나 몸 상태가 '메롱'이 된 '척척박사 강박사'

  마지막으로 나! 이 바닥 나온 지 10년.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겪다보니 웬만한 일엔 잘 놀라지도 않는다. 변하고 있는 건 30대에 접어들면서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로 내 몸이 변하고 있다는 것!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현재 헷갈리는 상태다.


여기 소개된 4명의 게이들이 3박4일을 함께 보냈다!


 키워드 하나. 자전거


남도에서 경주 -부산- 통영으로 우리의 여행코스가 바뀐 건 아주 간단한 이유였다. 남도 역시 특별한 계획이 없었던 터라 조금이라도 '누군가 알고 있는 지역에 가면 길을 잃지는 않겠지' 라는 단순한 생각에서였다. 함께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 가운데 부산 출신의 미모의(?) 게이가 있다 보니, 나름 알고 있던 코스가 있었던 것 같다. 떠나기 며칠 전 아주 수다스럽게 경주, 부산 지역으로 가야한다고 사람을 혼미하게 해놓더니, 결국엔 우리가 오랜 시간 고민하고 결정한 여행코스를 변경시켜 놓았다. 그래도 경주는 우리가 간 세 지역 가운데 최고의 여행지인 것은 분명하다. 중, 고등학교 시절 수학여행 코스의 대표 지역이라고 하지만 지금은 그 누구도 이 지역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날씨가 좋아서였을까. 높이 솟은 고층빌딩 대신 국사책에서만 봐 왔던 유적지로 가득 찬 경주는 따뜻하고 여유로움이 느껴지는 도시였다. 맑은 하늘 아래 우리는 아주 오랜만에 자전거를 타러 천마총 앞으로 갔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자전거, 스쿠터를 타고 다니며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천마총을 시작으로 예쁜 꽃길을 따라 첨성대, 대릉원, 석빙고, 안압지, 마지막엔 국립박물관 앞까지 달렸다. 가다 힘들면 도로가에 자전거를 세워두고 주변 경치를 구경했다. '여유'를 누가 가르쳐주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경주에서는 자연스럽게 체득하는 것 같았다. 처음엔 비틀거리며 자전거 위에 올라탔지만 기억을 더듬어 자전거에 금방 익숙해졌다. 10년만이었을까. 한 때 자전거 매력에 흠뻑 빠져 동호회까지 가입했었던 나였지만, 이제는 올라가는 것도 비틀비틀. 오르막길에선 숨을 헐떡거리기까지 했다. 하지만 시원한 바람과 함께 한 경주에서의 자전거 타기는 그동안 잊고 있었던 어린 시절 나의 모습을 추억하기 충분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진1. 대릉원 근처 자전거 도로에서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진2. 태종대 위에서 내려다 본 바닷가

 


키워드 둘. 바다


'억겁 시간 늙지 않아 늘 푸른 당신. 제 몸 부딪쳐 퍼렇게 멍들 줄이야. 제 몸 부서져 하얗게 빛날 줄이야...' 통영의 달아공원 위에서 한산도가 펼쳐진 바닷가의 모습을 본 뒤 어느 시인이 표현한 시 구절이다. 이 시를 보며 여러 생각이 들었다. 바다는 늘 겸손하고 정직하다는 것. 그리고 서로 부딪치는 모습 속에서 희생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 우리는 여행 내내 바다의 다양한 모습을 접했다. 부산 달맞이고개에서 본 해운대의 모습. 태종대 위에서 내려다 본 바다의 모습. 통영항구의 바다. 멀리 거제와 통영 경계 속에서 섬을 품고 있는 바다. 우리가 본 바다는 모두 달랐지만 고요한 바다의 모습 속에서 게이로서 사는 삶을 투영해보기도 하고, 지난 삶을 되돌아보기도 하였다.


  여행 기간 동안 바다가 가깝다는 단순한 이유만으로 "이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참 좋겠다."라는 생각을 많이 했던 거 같다. 어쩌면 바다가 생계고, 삶의 터인 사람들에게 이곳은 낭만이 아닐지 모른다. 우리처럼 도시밥 먹고 자란 사람들이야 낭만 찾아 이곳까지 왔어도, 적어도 그곳은 그런 모습이 아니었다. 통영항 근처에서 담배를 피우며 구석에 있던 이주노동자들과 술에 취해 아무렇게 길바닥에 누워있는 선원들에게 바다는 어떤 의미로 다가갈까. 과연 바닷가 위에서 유람선을 바라보는 뱃사공의 마음에 낭만이 꽃피울 수 있을까.  어떻게 보면 바다가 우리에게 또 다른 물음을 던지고 있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진3. 통영 달아공원에서 본 일몰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진4. 태종대를 찾은 사람들이 남긴 흔적들. 무지개가 있어요.^^

 

 

키워드 셋. 일몰


마지막 코스였던 통영에 저녁 6시가 다 되어 도착했다. 우리가 제일 먼저 찾은 것은 통영 안내도. 안내지도를 꼼꼼히 보다 눈에 띄는 곳이 있었다. 코끼리 어금니를 닮았다고 하는 달아 공원. 지금은 달구경하기 좋은 곳이라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고 한다. 우리가 이곳에 도착할 무렵에는 해가 이미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도착하자마자 우리는 해를 집어 삼키고 있는 바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점점 자신의 모습을 감추고 있는 해의 동선이 눈에 선하게 들어왔다. 감탄사가 절로 나올 정도로 절경이 따로 없었다. 어쩌면 저렇게 아름다울 수 있을까. 바다 위 듬성듬성 놓여있는 섬 가운데 숨바꼭질하듯 숨고 있는 저 해의 모습 속에서 나와 우리의 현재를 발견했다. 자신의 몸을 숨겨야 하는 삶. 해가 지면 또 다시 뜨는 것이 자연의 섭리라고 하지만. 우리의 삶은 늘 일출만을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게이 4명이 함께 여행을 갔으니 얼마나 수다스러웠을까. 4일간 함께하는 시간 동안 우리는 정말 많은 이야기들을 했다. 과거 - 현재 - 미래를 넘나드는 삶 속에서 자기에게만 안주하지 않고, 서로의 삶과 고민에도 깊숙이 참여했다. 예전 연애스토리부터 정치, 경제, 활동, 삶, 고민, 추억, 꿈 이야기까지. 흔하디흔한 술자리에서도 나올 법한 얘기지만, 적어도 여행지에서 나눈 우리의 인생사는 또 다른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여행은 나에게 있어 정신을 다시금 젊어지게 하는 샘'이란 말이 있다. 적어도 이번 여행이 그렇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여행을 떠나기 전 회사생활과 활동으로 나름 지쳐있던 나에게 이번 여행은 예전 열정과 젊음을 회복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휴가가 끝나고 또 다시 일상이다. 아침에 일어나 정신없이 회사가기 바쁘고 쉬는 시간마다 짬을 내 동인련에서 내가 맡은 일을 처리하거나 회원들에게 연락하기 여념이 없다. 퇴근을 하면 집에 돌아와 글을 쓰거나 또 다른 회의장소를 바삐 찾아간다. 4일 간의 여행을 되돌아볼 틈도 없이 돌아가고 있는 일상이지만 여행을 통해 느꼈던 여유와 젊음을 잊지 않고 기억해 내야 할 것이다. 감춰져 있는 해를 끄집어내기 위해서 말이다.



정욜 _ 동성애자인권연대 활동가


사용자 삽입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