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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소수자와 노동

<나, 성소수자 노동자> 토론회에서 무슨 이야기 했게?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가 성소수자 노동자를 만나다.

by 행성인 2012. 3. 5.



 

사람들이 많이 오진 않았지만 가슴이 따뜻해진 토론회였다. (토론회에는 쉽게 얻기 힘든) 힘이 불끈불끈 솟았다.


 이 글은 2011년 11월 11일에 열렸던 <나, 성소수자 노동자>토론회에서 나눈 이야기들을 정리한 것입니다.


<1> 비정규직 여성노동자가 성소수자 노동자를 만나다.


성소수자 노동권팀에서 발표를 한 후에, 토론자로 와주신 이경옥(민주노총 서비스연맹 사무처장), 김소연(기륭전자노동조합 분회장)님과 함께 오순도순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경옥님은 자신도 소수자로 사셨다고 했다. 남편이 없는 이야기를 쉽게 하기 못하고, 사람들과 섞이지 못했다고 했다. 별종이라고 할까봐 동정할까봐 할 수 없었다. 동료들이 왜 혼자만 자기 얘기를 안 하냐고 수군거리고, 그럼에도 밝히지 않고 사는 건 너무 괴로운 일이었단다. 혼자라는 생각에 신문에 한부모회 같은 데를 찾아서 나갈까 했다. 투쟁할 때는 회사 측에서 이력서의 가족 상황란에 있는 걸 보고서는 남편도 없는데 이러다가 일 잘리면 어쩔 거냐고 회유하고 협박했단다.

이야기를 하시는데 눈에서 물이 나왔다. 그냥 툭하고 터져 나왔다. 다시 떠올리고 말을 하는 것만으로도... 나에게도 그런 일들이 있다. 나도 눈물이 났다. 거기 있는 사람들, 많이들 질질 짰다. 남 이야기가 아니었으니까. 따뜻한 눈물들.

그러다가 동료들에게 이야기한 계기는 이랜드 투쟁을 하면서, 나도 이런 상황에서 투쟁하는데 우리 모두 힘내서 같이 하자고 말하면서였다고 했다. ‘커밍아웃하니까 후련하다고 했다. 같이 울고 웃다보니 이경옥님이 너무 친숙하게 느껴졌다. 이런 마음으로 함께 할 수 있을 거야.

이경옥님은 자신의 이야기로부터 시작된 눈물을 쓱 훔치고 노동조합 이야기를 해주셨다. 서비스연맹에 있다 보니 노동조합에 남성조합원들이 많지 않단다. 그래도 여성고객들이 남성사원을 좋아해서 남성사원 채용도 많아지고 있다고 한다. 그동안 남성조합원을 보면 그냥 발랄하구나,라고만 생각했었다. 근데 실제로 조합원 중에 성소수자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래서 (토론회에 와서) 이런 부분도 알아가고 내 동료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알아야 되지 않을까 생각을 하셨단다.

김소연님은 평소에 살면서 젠더같은 용어도 익숙하지 않고, 게이가 정말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본 적도 없었단다. 장애인도 마찬가지였다. 장애인이 이 사회에 이렇게 많았나? 그러셨단다. 그러다 투쟁을 하게 되면서 무지개 깃발도 보게 되고 소수자 문제도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저들도 함께 하는 투쟁의 현장에서 만나다보니, 우리 간에 차이는 있지만 동지란 생각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만나면서 평상시 알고 지냈어야 하는데 미처 왜 몰랐을까, 그런 생각도.

노동자들도 사실 잘사는 것처럼 포장되어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이 사회에서 약자로 산다는 것. 그것은 이상한 상식을 만들어서 여기에 포함되지 않는 사람을 배제하고 숨게 하는 것. 그런 걸 극복해야 하는 것 아닌가? 김소연님은 투쟁하지 않았으면 평생 갇혀 있었을 것이라며 투쟁한 게 다행이라고 웃으셨다. ~ 이 넘치는 희망!

물론 (노동운동가들 중에는) 동인련 모르는 사람들도 있단다. 소수자 문제가 해결되고 커밍아웃을 자연스럽게 하려면, 자기 삶을 변화하려는 집단부터 교육을 하고 그런 만남이 확산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현장은 개선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첫 출발은 조직단위에서부터 변화가 필요하다고 했다. 그러려면 용기 있는 결단이 필요하다. 이야기하지 않으면 모른다. 그런 용기를 같이 가지면서 계기를 마련하는 것이 중요할거란 이야기를 해주셨다.

이 토론회에 간다는 이야기를 주변에 했더니 오지랖도 넖다고 하더란다. 집회에서 성소수자들의 무지개 깃발을 보고 처음에는 저 분들이 왜 왔지? 라고 갸우뚱 했었는데, 사실은 이 분들(성소수자들)이 노동자로 있었던 거다. 나도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걸 깨우쳐야 한다. 그걸 인정하고 알려지도록 하자. 나랑 같다. 같은 공간에서 밥 먹고 일하고. 그걸 인식시키지 않으면 딴나라 사람들 이야기로 들릴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어디에나 있습니다라는 말이 인상적이셨단다.

이경님은 2010년 봄에 처음으로 열었던 토론회에는 노동조합 측에서 오겠다는 사람이 없어서 서운했었는데 이렇게 와주셔서 너무 기쁘다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또 다른 기쁜 소식을 이야기해주었다. 10월 비정규직 노동자 대회에서 학생인권조례 서명을 받는 중에 건설노조 조합원 한 분이 호모포비아적 발언을 해서 마음이 상했지만 딱히 말할 곳이 없었다. 그러던 와중에 한 회원이 트위터에 관련한 내용을 올렸는데, 그 트윗을 보고 건설노조 활동가 중 한 분이 연락을 해서 사과하고 싶다고 했다. 교육 같은 부분으로 같이 만나고 연대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고 싶다. 진짜 변화를 꾀하려면 많이 부딪혀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연대를 하면서도 소리 낼 수 있어야 하고 앞으로 노조에 교육을 갈 수 있게 된다면 참 좋을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2> “, 성소수자토크쇼

- 생긴대로 살고 싶은 성소수자 노동자의 인생역전

 

2부는 동인련 회원인 감성청년이 진행하고 우체국 노동자 임선생님과 그를 동인련에 소개해준 동인련 회원이자 임선생님의 직장 동료인 지수씨가 이야기손님으로 초대된 감성어린 토크쇼로 진행되었다. 임선생님은 워낙에 말씀을 잘하셔서 농담에 빵빵 터졌는데, 이렇게 속기록으로 전하려니 참 막막하네. 부족한 속기록이라 잘 전달되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임선생님의 인생역전으로 한번 들어가 봅시다.

(임선생님의 이야기는 보라색 글씨로 보이게 했습니다.)



나는 나. 

-17살 때 어릴 때 학교를 그만두고 노동자가 되었는데 어떤 이유로?

그건 백프로 교복 입는게 싫어서, 진학을 포기했지. 그 이후로 후회는 한 번도 하지는 않았지만 사는 내내 어려움은 많이 겪었죠.

-처음 들어간 곳이 봉제공장이죠?

1년을 거기서 다녔어요. 그 시절에는. 거기를 들어가게 되었는데, 어떻게 하다가...

-남자들이 하는 일을 하겠다고 했는데 반감은 없었나?

그런건 없었어요. 역시 그 중에서는 키도 큰 편이고 했기 때문에. 당연히. 내가 이야기를 했더니 너가 적임자다 해서. 그렇게.

-그러면 1년 동안 그 때는 무엇을 하고 놀았나요? 청계천에 가서 테이프에 노래 녹음해서 듣고 그러셨다면서요. 친구를 사귀거나 그런 건요?

사실은 1년동안 공장에서 보통 여자애들이 하는 . 쪽가위로 따거나 그런 일은 안 했고. 보통 힘쓰는 일을 했어요. 키도 좀 크고. 그런 쪽으로 해야 회사 쪽에서도 이득이 되기도 하고. 사실 일이 호락호락한 일은 아니였는데, 다 여자라 그런 일이 많이 중요했죠. 이쁜 여자들이 많죠.(웃음) 또래들 중에 괜찮다 싶은 애들이랑 어울려 다니는. 그런 재미로 1년을 한것 같아요. 그렇게 해서 버틴 게 아닌가. 지금 생각하면. 오늘 오면서 생각해보니깐. 그 나이에 하루 종일 그 생각만 하는데. (모두 웃음) 뭔가. 어떻게 하면 좀. 특별한 관계를 만들까. 그게 최대 관심사 아닐까.

-상대방들은 친구로 생각했을까요?

개네들은 내가 자기들과 똑같다고 생각진 않았겠죠. 다르다.

-전에 봤을 때. 그런 이야기를 하셨잖아요. 뭐가 되고 싶다 이런게 아니라, 나는 나다. 설명할 필요 없다. 라고.

나를 소개할 때, 트랜스젠더라고 썼는데. 나는 사실 트랜스젠더는 아니에요. 그냥 나 있는 그대로 이거지. 뭐 나를 바꿔서 다른 사람이 되고 싶은 그런 건 아니에요. 그냥. 난 내가 있는 그대로 그거지.

-지금은 일을 하시잖아요. 어떻게 보면 조끼도 유니폼일 수 있는데. 갑옷 같다고. 임선생님한테는 갑옷 같다고 이야기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나는 트랜스젠더는 아닌데, 나는 타고난 생물학적인 성이 있는데. 외형으로 드러나는게 싫어요. 조끼를 항상 입죠. 우리 작업장에서 조끼가 나와요. 다른 사람이 안 입어도, 나는 입어요. 여름에 아무리 더워도. 우리 직장에 우리 팀 중에서도 굉장히 나는 나이가 어린 축에 들어요. 사람들이 한번 그러는거에요. 임선생은 어쩌고저쩌고 저게 갑옷이야.

-오랫동안 일을 하셨는데, 사람들 사이에서 오가는 뒷이야기들이 힘들잖아요. 되게 가족적인 분위기이던데. 총각은 여자친구 안 만나? 이런 이야기도 하고. 사적인 이야기도 많이 하는데, 그런 이야기할 때 소외감이나 느끼시나요? 농담을 할 때는 맞춰주시는 식이세요 아님 아니면 무시하는 식이세요?

내 인생이 누구에게 맞추는 성격이 아니에요.(웃음) 사람 자체가. 4살 이후로 현재까지 투쟁적이고 누가 타협을 안 해요. 그런데, 나 파트너랑 9년째예요. 굉장히 중요한 사람이죠. 근데 그거와는 다르게. 이쁜 여자를 보면. 우리 부서에 고객들이 많이 와요. 정말 예쁜 여자들이 오면 아저씨들이 이쁘다고 하죠. 근데 내가 그런 이야기를 같이 하지 못하는 게 좀 그렇더라. 나는 속으로만 그래요. 그런데 내 파트너에 대한 신의가 없거나 그런 건 아니에요. (웃음) 평범치 않게 보는 사람들도 있는데. 결혼을 해라 라는 말은 안 하죠. 언제 결혼할거냐. 이런 이야기는 입에 띄우는 순간. 내가 집어쳐라.”그럽니다. 그런 이야기는 뭐. 누가 애인 있냐고 물어봐도 있는 걸 없다고 하지는 않아요. 꼭 거짓말을 해야 할 이유가 있다면 차라리 나는 말하지 않아요. 꼭 말을 해야할 때는 진실을 이야기하죠. 진실을 이야기 할 수 없을 때는 말을 하지 않는거죠. 맞추지를 않아요.

-오래 일하면 회사에 나랑 같은 사람 없을까? 궁금하지 않아요?

아무리 봐도 없어요. 전혀 없어요. 사실 나는 여자 직원들 앞에서는 부끄러워요. 아무리 게이다를 돌려도 없어요. 17살 때 하루는 남자 둘이 신참이 왔는데, 하나는 키가 175정도 됐는데, 선이 되게 강해요. 근데 한분은 머리가 되게 길고. 염색을 했는데 약간 밝은 빨간색. 그 남자애는 작은데, 다부지게. 유심히 봤지. 굉장히 좋은 느낌을 받은 게, 둘이 많이 친하고 많이 유대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 특별히 말하지 않아도 눈에 보이는 거예요. 그걸 굉장히 느꼈어요. 둘이 굉장히 말을 안 하는데, 둘이 상당히 그러구나. 말을 안 해도 배려하는게 느껴졌죠.

-지금 파트너와도 그런 관계를 가지나요?

우리는 뭐... 좋죠. 우리는 사실은 제 파트너는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 저는 좀. 처음에는 우리도 많이 다투었는데 지금은 그런것도 없고, 배려도 많이 해줘요.

-화나면 화를 못 참으시다고.

굉장히 사이가 좋은 편이에요. 난 지금도 야자를 안 해요. 지금도 존칭을 사용하죠. 어떻게 보면 어쩌다 한번. 내가 화가 나면 불같은. 그러면서 느끼는 점이 우리는 이러다가 한번 화나면 끝나겠다. 이런 생각을 몇 번했어요. 왜냐면. 저쪽에서 사과를 안 하면 나는 절대 안 하니깐. 내 성격이. 우리는 무슨 자녀가 있는 것도 아니고. 자기도 나를 믿고, 나도 자기를 되게 믿지만. 수가 틀리면, 잡아줄 수 있는 게. 우리 사이에는 그게 상당히 위험하다. 요새는 그런 생각을 안 하는데.

 

이 답답한 곳에, 한 모금의 산소.


-저 같은 경우도 커밍아웃할 때도 있는데, 잠깐 그러는 거지 이런 얘기도 듣는데. 그 친구분(직장 동료이면서 임선생님을 동인련에 소개시켜준 회원이다)이랑 얼마나 됐나요?

6. 직장동료인데, 발랄한 분이 오셨더라고요. 행정직 공부를 해서 오셨는데. 사실은 그 당시에 내 필요에 의해서 도움을 많이 청했어요. 나중에 공부도 하고 지수씨에게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우리가 많이 친해졌죠. 이 사람이 나랑 나이가 굉장히 차이가 많이 나요. 그런데 그런 마음은 안 먹었어요. 그런데. 나이는 굉장히 어린데, 진중하고. 처음 만났을 때 그런 마음이 들었어요. 사람은 3년 지내봐야 안다. 빨리 판단하면 안 된다. 굉장히 사람은 오래 지내야 진가가 나온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 자기도 자기 업무도 바쁠 텐데, 한 번도 싫다 소리 안하고 도와줬어요. 굉장히 많은 부분에 지수씨가 있지요. 이 분이 날더러 이주노동자 단체도 후원한다고 하고, 또 성소수자 단체도 한다고. 이 사람이 의식이 있는 사람이다 했어요. 사실은 내가 굉장히 어릴 때 직장에서 커밍아웃하고 난 다음에 23년 만에 커밍아웃을 한 거에요. 최초로. 23년 만에. 믿음이 갔어요. 직장 내에서는 힘든데, 이 사람한테는 괜찮겠다. . 이야기 한 다음에도 여러 일이 있었어요. 직장에 직원이 400명 되는데, 갇혀있는 공간에. 한 모금의 산소 같은 존재다.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할 존재가 있다는 게 기쁘다. 잘 못 만나긴 하지만, 이심전심으로.

지수씨: 저는 아무 눈치도 못 챘어요. 어느 날 갑자기 저녁을 먹게 되었는데, 그 날 이상하게 밤늦게까지 속에 있는 이야기를 하는 날이었어요. 서로. 저도 그 때 참여는 힘들지만, 이주노동자나 성소수자 쪽에 관심이 있다. 자연스럽게 속에 있는 이야기를 쏟아냈죠. 그 때 분명하게 이야기는 안 해주셨지만, 대충 알려주셨고, 시간이 지나면서 잘 알게 되었죠.

지수씨가 좋은 분이죠. 우리가 인터뷰 할 때도 이야기했는데. 내가 만약에 이런 위치가 아니라면. 내가 일반인(이성애자)라면. 나 같은 사람이 내 주변에 있다면 나는 이해 못할 것 같다. 흔쾌히. 그런데 상당히 열린 마음인거에요. 타고난 성품이. 좋은 거에요. 아니 정말.

- (동료들끼리) 밥 먹는 모임이 있다고 들었어요.

한분이 더 있는데, 그 사람은 절대 몰라야해요. 그 친구도 굉장히 친한데. 사람은 굉장히 좋은 사람이지만, 내 이야기를 할 정도는 아니죠. 내 생각에는 (커밍아웃을) 한명한테 더 할 건데 준비하고 있어요. 직장 동료 중에 한명. 해보니깐 좋더라고요. 굉장히 안 할 때랑 다르다. 지원군을 가진 느낌. 사람하나가 주위에 있다는게. 양 날개는 있어야. 좀 조심스럽게 준비를 하고 있어요.

 

또 다른 들을 위한 이야기


-처음 뵈었을 때 3xFTM 다큐멘터리를 볼 때였어요. 끝나고 나왔을 때. 많이 감동을 받으시고 주인공들하고 이야기 한 것도 인상이 남거든요. 영상을 통해서 세 명의 이야기를 봤을 때. 영상을 보고 느낀 점은 어떤가요?

일단은 그 영화가 너무 좋았고, 뭐랄까 세 주인공이 나왔는데. 생긴 것과 연령대 직업이 다 다른데 나랑 다 똑같았어요. 나는 트랜스젠더는 아니지만, 그 사람들 살아온 게. 다 다르지만 똑같은거죠. 살아온 과정이나 생각하는 것들이. 나하고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어디에나 있구나. 그것도 굉장히 용기잖아요. 영화를 찍는다는게. 그 용기에 속으로 많이 감동도 받았고. 주인공들과 악수를 하면서도 고맙다는 말도 속으로 많이 했어요. . 아무래도 누군가가 드러내줘야, 주변에서 자극도 받고. . 중요한 일을 했다라는 생각을 했어요. (동인련 노동권팀과) 인터뷰 하게 된 계기가. 짝꿍이 그걸 뭐하러 하려고 하냐고 했거든요. 내가 굉장히 어릴 때 방송에 게이바가 나올때 범죄. 이런거 보여주는거에 나왔어요. 이런게 있구나. 내가 어렸을 때 저런 사람이 나와서 힘이 되었는데, 나도 나이가 먹고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면. 내 이야기를 해줄 필요가 있겠다... 그래서 인터뷰에 응하게 되었어요. 나하고 비슷한 길을 걸을 후배들을 위해 이런 이야기를 해야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던 거죠.


토크쇼에 함께 한 20대 초반의 게이 참가자가 질문을 던졌다.

- 나는 성소수자로써 누나, 형들이 없었어요. 롤모델들은 이성애 중심 주의적이었고요. 어릴 때부터 항상 난 나이 많은 성소수자를 만나고 싶다. 그랬던 것 같아요. 그래서 (임선생님을) 뵈었을 때 나는 살아있다는 자체만으로도 멋있다.”고 느꼈어요. 저는 20년밖에 안 살았지만, 힘들었거든요. 그 오랜 시간을 힘든 시간을 사셨는데. 그래서. 질문은 그 본인께서 10대 혹은 20대 나이가 어렸을 때 어렵게 생각했거나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면?

굉장히 절망적인 시절을 많이 보냈어요. 시절도 절망적 이었지만, 나는 기회가 올까. 나는 여러 가지 면에서 약자이니까요. 나는 평범하지 않은 삶을 살았기 때문에. 나는 절망적인 삶에서 벗어나서 사람답게 살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은 늘 들었죠. 그렇지만 용기는 한 번도 잃은 적이 없어요. 지금 오면서 생각한건. 그래 내가 절망적이었지만, 포기하거나 그런건 안 했다. 열심히 살았다. 지금 내가 짧은 시간 안에 살아온 이야기를 다 할 순 없지만. 누구나 바라는 정규직을 꿰찼잖아요. 안정적인 직업을 얻기까지 고생을 많이 했죠.

그 소리가 참 좋네요.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고맙다.” 내가 더 고맙게 더 받아들이고요.
용기를 잃지 않은 건 나 자신한테 항상 고맙게 생각해요.


-난 뭐가 되고 싶은게 아니라, 그저 나로 있고 싶다는 이야기가 굉장히 인상적이었어요.

난 긴 터널을 몇 년 전까지도 수없이 지났어요. 한줄기 빛도 없이. 순서대로 지나고 나니 기회가 오더라구요. 지금은 굉장히 행복해요. 하루하루가 행복해요. 나이 먹은 게 나쁘지 않아요. 지혜도 생기고 안목도 넓어지는데. 난 갈수록 좋아요. 살면서 나이 먹는게. 제일 좋은건 선과 악을 구별 할 수 있는 눈을 가질 수 있는 거지요. 꿋꿋하게 차근차근 지내다보니 어느 순간 다 이루어지더라고요. 하나하나 성취가 되더라고요.

중학교 때는 거의 체육복을 입고 살았죠. 치마입기 싫어서요.
그게 그만큼 나에게는 중요한 일이었어요. 그래서 지름길을 놔두고 굉장히 오래 돌아야하는 길을 왔지요
.
하지만 지름길을 가기는 싫었어요. 그러고 싶지 않았어요
.
너무 먼 길을 돌아 왔지만 그래도 이게 좋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박수와 따뜻한 품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을 뒤로 하고, 우리는 인근의 치킨집으로 뒤풀이를 하러 갔다. 임선생님은 그날 받은 보잘것 없는 사례금으로 배고픈 성소수자 친구들에게 맛있는 치킨과 맥주를 쏘았다. 고마워요, 임선생님!



정리 _ 오리 (동성애자인권연대 성소수자 노동권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