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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소수자와 가족/비범한가족이야기

이주 여성, 시작과 정착: "아직 정착하지 못했어요" 새로운 가족 만들기와 여성으로 정착하기

by 행성인 2012. 4. 6.
<비범한 가족이야기>는 언니네트워크, 가족구성권연구모임, 언니네트워크 사진창작기록집단 어떤사진관이 함께 만드는 프로젝트인 “비정상 가족들의 비범한 미래기획”(http://family-b.tistory.com/)의 일환으로 연재되고 있는 칼럼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조금은 다른 가족이야기를 가진 사람들의 기고와 인터뷰로 꾸며지는 칼럼으로 프로젝트 기획단의 동의를 얻어 웹진 랑에서도 공동 연재합니다. 개제를 허락해주신 비범한 기획단에 감사드립니다. 

베트남 이주여성 원옥금 씨 인터뷰

공익변호사 그룹 공감 인턴 명화


 “아직 정착하지 못했어요.” 원옥금 씨와의 인터뷰 중에 가장 많이 나온 말이다. 1996년, 통역사로 일하던 원옥금 씨는 베트남으로 파견 나온 한국인을 만나 사랑에 빠졌다. 그해 결혼하고 이듬해 남양주로 이주해 쭉 지금의 집에 살았으니, 한국 생활만 햇수로 15년이다.


이주여성의 ‘시작’을 듣고 싶어 찾아왔다는 설명에 그녀는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며 “그땐 지금이랑 많이 달라서…”라고 운을 뗐다. 첫 만남 이야기, 어릴 적 동네 이야기를 거쳐 남양주 아파트에 살기 시작한 시기로 넘어가자 그녀는 갑자기 펜을 꺼내 들었다. “여기 써볼게요. 이면지.” 그녀는 뒤에 있을 재판에서 통역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들고 있던 종이에는 이주노동자 파업과 관련한 법령들이 적혀있었다. 이윽고 종이의 빈 곳에 아래로 뻗은 강과 그 위를 흐르는 물결이 그려졌고, 다음엔 옆으로 볼록 튀어나온 웅덩이가 생겨났다. “강물은 계속 흐르는데 여기(웅덩이) 있는 물고기가 된 것 같아요. 정체되고 소외된 느낌.” 나는 들고 있던 질문지 빈 곳을 찾아 잽싸게 그 그림을 따라 그렸다. 지금부터 이어질 인터뷰의 기록이 물고기와 강, 한 가족의 시작과 또 다른 시작, 원옥금 씨가 겪어온 기쁨과 고통 모두를 되도록 훼손하지 않기만 바라고 있다.

물고기 : 한국으로 건너와 가족을 만들고

원옥금 씨가 남편과 처음 만났던 15년 전, 베트남 사람들에게 한국은 생소한 나라였다. 당시 베트남은 미국의 압력 하에 있었고, 사회주의권 바깥의 나라와는 교류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듣도 보도 못한 나라로 가겠다는 딸 앞에 부모들이 고집스럽게 반대를 외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럼 어떻게 하셨느냐는 싱거운 질문에 원옥금 씨는 남편이 큰 절을 올리자 부모님이 크게 감동하여 결혼을 허락하셨다는 이야기, 알고 보니 남편의 성씨인 하산 이 씨 가문이 베트남 왕족의 후예였다는 이야기, 부모님이 보관하던 족보를 뒤져봤더니 남편의 이름이 버젓이 등재돼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재산이 다르고 집안도 다른 주인공들이 마침내 사랑의 약속을 완수하는 드라마를 볼 때처럼, 우리 둘은 눈이 마주칠 때마다 흐뭇한 웃음을 지었다.


천천히 한국의 이야기로 넘어왔다. 베트남에서 결혼식까지 올렸는데 왜 굳이 한국에 살 생각을 했냐고 물었더니, 그녀는 “원래 베트남에 살 생각이 없었어요.”라고 답했다. 아직 어리둥절해 있는 내 표정을 보더니 “원래 베트남 사람들이 외국에 나가는 걸 좋아해요. 언니도 지금 호주에 있고.”라고 덧붙였다. 당시 베트남은 75년 전쟁이 끝나고 나라 전체가 황폐함에 달리고 있었고, 의료·교통·복지 등 제반 환경 역시 마찬가지였다.

 

특히 결혼을 생각하고 있는 베트남 여성들에게 중요한 문제는 배우자와의 관계였을 것이다. 어릴 적부터 그녀는 베트남 남성들이 알콜에 중독되거나, 가정폭력을 휘두르거나, 무책임하게 집안을 방관하는 모습을 숱하게 보고 들었던 터였다. 한국에서 나고 자란 나 역시도 자상한 아버지를 상상하기란 어려운 일이어서, 나도 모르게 어디나 남자는 다 비슷하지 않느냐는 냉소가 흘러나왔다.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한국은 1366(여성긴급상담전화)도 있고, 여성단체 활동이 활발하잖아요. 베트남에서는 정부도 (가정폭력 피해여성을) 보호해주질 않아요. 112에 신고해도 오지 않아요.” 원옥금 씨가 가부장적인 지역사회를 탈주하고자 했던 욕망은, 풍문으로 부풀어진 장밋빛 상상에 멈추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베트남 여성들을 흡수하는 베트남 남성과의 결혼이라는 미래의 장단을 신중히 가늠해 보았고, 두 국가의 경제구조와 제도적 지원을 고려하여 한국으로의 이주를 결정했다.

강물 : 한국에 살면서 다시 가족을 만들고

시부모와의 관계도, 남편과의 결혼생활도 “어려울 게 없었다”던 원옥금 씨는 가장 힘들었던 기억으로 “취업”을 꼽았다. 당시 살던 동네가 개발제한구역이라 공장도 별로 없었고, 아직 외국인 채용이 흔하지 않았던 시대였다는 것도 문제였지만, 제일 벅찬 장애물은 한국 가족들의 “배려”였다. 시부모님은 원옥금 씨가 집안일하며 편히 지내길 바라셨고, 남편은 원옥금 씨의 피부색이나 말씨 때문에 차별을 받을까 취업을 반대했다. 어쩌면 그건 맞벌이 부부나 이주노동자가 어색했던 당시 한국문화의 반영일수도 있고, 혹은 아내를 안전한 곳에서 호강시켜주고 싶은 따뜻한 마음씨의 표현일 수도 있다. 그러나 가족들의 배려는 원옥금 씨의 생각과 어긋나버렸는데, 그녀의 지난 삶은 베트남에서 영위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랫동안 만들어진 가치관과 관계들은 하루아침에 뒤엎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맨 처음 고민은 베트남에 살고 있는 가족들이었다. 해외 통화에 비싼 데이콤료가 부과되던 때, 한 달에 한 번으로 제한된 통화에서조차 가족들은 못내 섭섭함을 내비치곤 했다. “(베트남에서는 딸이) 외국 가면 당연히 돈 부쳐주는 게 의무예요. 안 부쳐주면 동네에서 망신이에요.” 원옥금 씨 가족의 살림이 어려운 편은 아니었지만, 국제 결혼한 딸이 보내주는 외화며 가재도구 따위로 집안의 위신을 세우는 분위기가 워낙 주변에 팽배했던 탓이다. 누구네 집은 브로커를 통해 결혼시키더니 몇 천 만원을 송금 받더라 하는 종류의 소문이 공공연하게 마을을 들쑤시고 다녔다. 게다가 원옥금 씨 자신과의 다툼도 있었다. 한국의 자본주의 가족임금제 하에서 부인의 역할은 주로 남편을 위한 가사노동, 감정노동, 재생산노동에 한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공산주의를 기조로 한 베트남에서는 결혼을 하든 안하든 모두는 노동을 하길 바랐고, 하고 있었다. 취직을 못하고 종일 집안에 있으려니 “돈 안 버니까 나는 쓸데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한 고민들은 2006년 방송통신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하고, 가족의 우려 속에 첫 학기 5과목을 모두 수료해냈을 때부터 사그라지기 시작했다. 그 뒤로 원옥금 씨는 점차 외국인 노동과 관련한 법에 흥미를 가졌고, 이주노동자 기관이나 법정에서 통역 요청이 속속 들어왔다. 지금 천주교 의정부교구 이주센터에서 활동하고 있는 그녀에게 법을 공부하고, 인권활동을 시작하면서 가족과의 관계는 어떻게 변했는지 물었다. “시어머니도 자랑스럽다고 그러죠. 제가 TV에도 나오고, 전에 온 가족이 함께 상 받으러 갔었어요.” 본인으로서는 자신감이 생겼고, 가족들은 놀라운 마음으로 지지했다. 두 달 뒤, 원옥금 씨 가족들은 15년간 살던 남양주를 떠나 서울로 이사할 계획이다. 왜 서울로 이사하냐고 묻자 그녀는 그곳에서 전공과 관련된 일을 하고 싶다고 했다. 그때는 좀 정착이 되고 맘도 편해질 것 같다는 말 속에서 처음으로 “정착”은 긍정적인 가능성을 암시하고 있었다.

김현미는 이주여성 엔터테이너를 연구하면서 그들의 욕구와 고통을 동시적으로 직면하는 어려움을 고백했다. 그녀의 말처럼 이주여성들은 “자신이 처한 사회적 맥락을 이해하고 자신의 경험이 지니는 모순성을 끊임없이 해석하는 주체란 점에서, 억압의 생존자이며 동시에 변혁자”(『글로벌시대의 문화번역』)일 것이다. 원옥금 씨는 법을 공부하면서 한국 사회를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녀가 계속해서 부정형 혹은 미래형으로만 말하던 “정착”은 아마도 가족이 탄생하는 순간을 계속적으로 직면해야 하는 그녀의 생활에서 비롯한 단어일지도 모른다. 가부장적인 로컬을 벗어나기 위한 노력, 베트남과 한국의 결혼에 대한 서로 다른 기대들 사이에서 협상하는 과정, 오랫동안 형성한 자신의 세계관을 낯선 사람들에게 설득한 시간들. 그렇게 그녀에게 가족의 “시작”은 한 번으로 그치지 않고, 여러 번 반복되었으며 그때마다 좀 더 현실성을 갖추어 갔다.


 재판장에 다다른 베트남 이주노동자들의 전화를 받은 원옥금 씨는 가족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노력을 끊임없이 해야”하는 사람들이라는 말을 남기고 재판준비를 위해 식당을 나섰다. 법정으로 들어서는 손에는 서류들이 경쾌하게 흔들려서 찰랑거리는 물결과 비슷해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