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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성인 활동/활동 소식

동인련 엠티 후기 - “퀴어 여러분 사랑합니다!”

by 행성인 2013. 9. 5.

흠냐 (동성애자인권연대 청소년자긍심팀)


나는 18살, 벽장 속 동성애자다. 성소수자 모임에 참가하려면 가족들에게 늘 거짓말을 해야한다. 또한 늦게까지 집에 오지 않으면 엄마에게 문자와 전화가 끊임 없이 온다. 이런 나에게 외박은 그저 꿈같은 얘기였다.


많은 동인련 사람들이 엠티를 가자고 설득해왔다. 처음에 갈 생각이 없었다. '무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내가 가질 수 없는 것이라 단정해버렸다. 한편으로는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싶다, 소중한 사람들과 재밌는 시간을 보내고 싶다, 취하고 싶다. 통금에 구애받고 싶지 않다 등… 엠티는 나의 욕망이 모두 합쳐진 결정체와 같았다. 나는 무리를 하기로 결심했다. 엄마에게는 '컴퓨터 교육 프로그램'에 간다고 거짓말 했다. 위태위태한 속임수가 시작되고 나는 매우 불안해졌다. 엠티 전날, 결국 엄마는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엄마는 나에게 매우 실망한 눈치였다. 나는 우울한 기분으로 침대에 누워 생각했다. '나는 이런 좋은 것들을 전혀 가질 수 없는 걸까?'


그날 새벽, 반짝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엄마에게 진실을 말하고 허락받는 것이었다. 다만 단체 이름은 말할 수 없었으므로 다른 인권 단체 이름을 빌려썼다. 그렇게 엠티 당일 아침에 엄마의 허락을 받아내고, 겨우 동인련 엠티에 갈 수 있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약속장소에 도착했더니 반가운 얼굴들이 맞이해줬다. 우리는 지하철을 타고 양평으로 향했다. 팬션에 도착했을 때에는 모르는 사람이 많아서 뻘쭘했지만 어쨌든 여기에 왔다는 사실에 기뻤다. 처음 일정으로 팬션 주위의 강에서 물놀이를 했다. 그 차가운 물줄기와 미끄러운 바위들. 나는 옆사람이 뿌리는 물을 맞으며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 물놀이를 얼추 마치고 위에 올라가 강을 내려다보는데, 사람들이 노는 모습이 참으로 보기 좋았다.


팬션으로 돌아가 사람들과 한참 대화하고 있는데,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매우 당황했지만, 사람들이 당당하게 말하라고 조언해주었다. 엄마와의 통화는 다행히도 문제 없이 지나갔다.


엠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다들 원으로 둘러 앉아 자기소개를 했다.


"힘들게 엠티 온 흠냐입니다."


게임을 통해 조를 4개로 나누었다. 우리조에서는 오렌지와 내가 공동 조장을 맡게 되었다. 우리 조의 이름은 '시크릿조'로 지었다.


그 이후로는 조별로 촌극을 만들었다. 주제는 '동성 결혼, 그 이후'였다. 우리 조는 성소수자를 위한 결혼 정보 회사 '게연'을 소재로 했다. 아이디어가 빵빵 터지는 옆조와 달리 우리 조는 아이디어가 활발하게 나오지 않아서 걱정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나의 우려와 달리 공연은 대성공이었다. 다들 무대 체질인 것 같았다.


촌극도 모두 마치고 마지막 일정, 뒷풀이가 시작됐다. 어두운 밤, 야외의 불빛 아래서의 왁자지껄한 분위기. 고기를 굽는 숯불과 함께 열기가 더해졌다. 나는 이전까지 취해본 적이 한번도 없었는데 샤넬님이 가져온 뽕주를 마시고 한방에 훅 갔다. 전에는 몰랐는데 한 번 취하니 술이 술술 들어가더라. 기분은 오르고 분위기는 절정이다. 주위를 둘러보니 다들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나도 분위기를 타고 마음 속 깊숙한 이야기를 쉽게 얘기할 수 있었다. 취해서 비틀비틀대며 걷는데 오렌지가 수학 문제를 풀어달라고 부탁했다. 내 정신을 긁어모아 한 문제 풀어줬다. 다음날 보니 잘 풀려있었다. 새벽 3시쯤에 잠들어 4시간 후에 일어났는데 다들 나보고 왜 이렇게 멀쩡하냐며 놀라워했다. 아쉽게도 떠나야할 시간이 다가오고, 마무리로 엠티에 처음 참가한 사람들이 소감을 발표했다.


“제가 경험했던 외박 중 가장 재밌었습니다.”


청소년 성소수자들 중 다른 성소수자를 만나본 적도 없는 경우가 많다. 그들에게 주위에 성소수자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은 확연히 다른 삶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나는 모든 청소년이 나와 같은 기회를 가질 수 있기를 바란다. 그야말로 소소한 행복이지만, 이마저도 갖기 힘든게 현실이다.


그리고 내가 아는 모든 퀴어 한분 한분에게 전하고 싶다. 엠티 때 계속 머릿속에 멤돌던 말이다.


“퀴어 여러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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