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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소식/해외 인권소식

아래로부터 운동이 변화의 열쇠를 쥐고 있다

by 행성인 2008. 12. 8.
 오바마 당선과 주민발의안8 통과 항의 운동


버락 오바마가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된 날 캘리포니아와 플로리다, 아리조나 주에서 치러진 주민투표에서 동성결혼을 금지하는 주민발의안(캘리포니아의 주민발의안8로 대표된다)

이 통과됐다.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 당선이라는 역사적 사건과 모순돼 보이는 주민발의안 통과는 많은 이들에게 실망과 동시에 혼란을 자아낸 듯하다. 그러나 주민발의안 통과 직후 미국에서는 평등한 권리를 요구하는 LGBT들의 운동이 분출했다. 그리고 이 새로운 운동은 미국 LGBT 운동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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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발의안 8 통과에 분노하며 거리로 나온 사람들. 동성애자 시민권을 옹호하기 위한 연대 단체들인 반전단체 앤서와 미국 사회주의노동자 조직 팻말도 보인다.


주민발의안8 통과에 분노한 사람들은 선거 다음날부터 거리로 나왔다. 선거 다음날에 캘리포니아 곳곳에서 주민발의안8 반대 단체들이 호소한 집회에 수천 명이 참가했다. 11월 7일 샌프란시스코에서는 두 명의 개인이 호소한 시위에 2만 명 이상이 모였고, 11월 15일에는 미국 전역의 300여 도시에서 12만 명 이상이 시위를 벌였다. 캘리포니아의 샌프란시스코, 로스앤젤레스, 샌디에고에는 각각 2만 명 이상, 보스턴 1만 명, 뉴욕 4천 명, 시카고 3천 명, 텍사스 오스틴 3천 명, 덴버 1천5백 명 등. 심지어 오늘날에도 여전히 동성애자라는 것을 드러내기 어려운 작은 도시들에서도 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강력한 항의 때문에 캘리포니아주 대법원은 주민발의안8에 대한 이의신청을 받아들였다.


주민발의안 통과에 대한 분노가 이렇게 신속하고 강력하게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었던 데에는 어렵게 얻은 권리를 1년도 안 돼 빼앗겼다는 분노와 함께 오바마 당선이 영향을 미친 듯하다. 주민발의안이 통과됐다는 사실에 대한 실망보다는 ‘역사는 우리 편’이라는 자신감, 변화가 가능하다는 기대가 더 커 보인다.


시위는 활력과 자신감이 넘쳤다. 사람들이 집에서 손수 만들어온 팻말에는 “모두를 위한 평등”, “증오[H8, 헤이트라고 읽는다, Prop.8을 패러디한 문구다]에 맞서 싸우자”, “결혼은 시민적 권리다” 등의 구호가 적혀 있었다. 참가자들은 “그래, 우리는 할 수 있다(Si, se puede. 또는 Yes, we can)”라는 구호도 많이 외쳤다. 이 구호는 오바마 선거운동 구호로 유명하지만, 2006년 벌어진 거대한 이민자 권리 운동의 구호이기도 하다.


또 이들 시위에서는 다양한 사람들의 연대가 돋보였다. 동성애자, 이성애자, 흑인, 백인, 이민자 등 다양한 사람들이 이 운동에 참가하고 있다. 11월 15일 샌프란시스코 집회에서는 몰몬교도(주민발의안8 통과 운동에 가장 앞장섰던 교파 중 하나가 몰몬교다), 무슬림, 이성애자 흑인 목사들도 연단에 올랐다. 지금의 동성결혼 권리 투쟁에서 1960년대 흑인 공민권 운동을 떠올리고 동일시하는 분위기도 큰 듯하다. 한 시위 참가자는 인종간 결혼 금지법 때문에 다른 주에 가서 결혼해야 했던 부모의 사진을 들고 나오기도 했다. 많은 이들이 동성애자들의 결혼을 금지하는 것은 그들을 2등 시민 취급하는 것이고, 동성결혼이 시민권 문제라고 말한다.  

이런 분위기는 오바마 당선으로 표현된 변화에 대한 열망과 자신감을 반영한다. 오바마는 역대 어느 대통령보다도 동성애자 권리에 우호적이다. 실제로 오바마는 중요한 LGBT 권리 법안들을 지지해 왔고, LGBT 공동체를 인정한다.


오바마는 지배계급 정당인 민주당 소속이지만 그를 지지한 많은 사람들은 늘어가는 불평등과 전쟁에 반대하고 진정한 정의를 원한 사람들이었다. 주목해야 할 것은 오바마 자신보다 그가 어떻게 대통령이 됐느냐다. 이전에 정치활동을 경험해보지 않은 수많은 사람들이 오바마 선거운동에 참여하면서 능동적으로 행동하는 법을 배웠다. 오바마가 이들의 기대를 저버릴지 아닐지는 결정돼 있지 않다. 민주당이나 오바마 자신이 믿을만해서가 아니다.

 변화를 결정짓는 힘은 누가 권좌에 있느냐 보다는 아래로부터의 운동에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오바마가 그를 지지한 대중의 기대를 저버렸을 때, 아래로부터 운동이 오바마를 넘어서 그를 비판하고 변화를 강제할 수 있느냐가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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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지금의 주민발의안 통과 항의 운동은 쟁점 자체를 넘어선 의미가 있다. LGBT 권리 단체들도 그랬지만 미국의 대다수 운동진영이 대선 기간에 득표활동에 집중하면서 대중운동 건설을 중단했다. 변화를 강제할 힘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오바마와 민주당은 선거 논리로 우경화와 오락가락을 정당화했다. 그대로라면, 미국의 운동진영이 오바마에게 기회나 시간 따위를 주면서 그에게 의존해서 변화를 기다리기만 한다면, 오바마는 배신하고 사람들은 환멸에 빠지는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운동은 다른 가능성을 보여준다.

많은 이들이 이 운동은 시작일 뿐이라고 말하고 있다. 사실 이번에 통과된 주민발의안만이 문제가 아니다. 클린턴 정부 시절 통과된 DOMA(Defense of Marriage Act)는 연방 차원에서 결혼을 한 남성과 한 여성의 결합으로 정의했다. 그래서 대다수 주들에서 동성결혼이 인정받지 못할 뿐 아니라, 동성결혼을 인정하는 주에서도 연방 차원의 복지는 보장되지 않는다. 연방 차원의 동성결혼 권리 인정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도 지금 벌어지고 있는 운동이 중요하다. 단지 주민발의안 반대가 아니라 완전한 동성결혼 권리를 주장하는 운동으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벌어지는 운동의 또 다른 특징은 기성 LGBT 단체나 활동가들이 아닌 새로운 사람들이 주도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가운데 많은 이들은 이전에는 운동과 연관 맺은 경험이 없었던 이들이다. 여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는 듯하다.


주민발의안8 반대 운동을 주도한 기존의 LGBT 단체들은 풀뿌리 운동보다는 대기업 후원에 의존했다. 더 중요하게는 이 쟁점에 모호한 태도를 취한 민주당 지지에 매달렸다. 그래서 주민발의안8 반대 운동은 매우 수세적이었다. 2004년 대선 당시 동성결혼 문제가 부각됐던 것이 캐리의 패배 이유 가운데 하나로 여겨지면서 LGBT 운동진영에 압력이 된 듯하다. 주민발의안8 반대 운동은 ‘동성애자’, ‘편견’ 등의 단어를 직접적으로 사용하는 것조차 꺼렸다.

그러나 동성결혼 반대 세력이 거짓에 기대 편견을 부추기는 상황

에서는 정면으로 그들을 반박해야 했다. 공식적으로는 주민발의안8에 반대했지만, 오바마와 바이든은 동성결혼에 반대한다는 언급을 했고 동성결혼 반대 세력은 이런 발언을 이용했다. 운동은 오바마와 바이든의 발언을 비판하며 동성결혼 금지의 부당함을 설득해야 했다. 그러나 거대 LGBT 단체들은 민주당에 폐가 되지 않으려 조심하느라 공세적인 활동을 벌이기를 주저했다. 이것이 동성결혼 반대 세력보다 두 배 가까운 후원금을 모았는데도 선거에서 패배한 주된 이유일 것이다.


주류 언론에서는 특히 민주당 텃밭이고 진보적인 성향의 캘리포니아에서 주민발의안8이 통과된 원인이 흑인 투표율이 높았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많다. 이번 캘리포니아 주민투표에서 많은 흑인들이 동성결혼 금지를 지지한 것이 사실이다. 캘리포니아 선거 출구조사에 따르면 흑인은 70퍼센트, 라틴계 53퍼센트, 백인 43퍼센트가 주민발의안8에 찬성했다.

그러나 주민발의안8 통과의 책임을 흑인들에게 돌리는 것은 부당하다. 우선, 흑인은 캘리포니아 투표자 중 10퍼센트에 불과했다. 나아가 2004년에 다른 주들에서 있었던 비슷한 투표에서는 흑인들이 백인보다 동성결혼 금지를 지지한 비율이 더 낮았다. 사회과학 연구 결과를 보면, 흑인들은 백인보다 동성애자 권리에 더 우호적이다. 흑인 사회에서 교회의 영향력이 크기 때문에 종교적인 이유로 동성애를 잘못된 것으로 인식하는 비율은 높지만, 억압받은 경험 때문에 차별에 반대하는 경향이 높기 때문이다. 이런 자료들은 흑인들이 원래 더 동성애자들에게 적대적이거나 동성애혐오가 강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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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발의안8 반대 운동이 이 쟁점이 시민권 문제라는 것을 부각시키며 흑인과 유색인 유권자들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가 호소했다면 다른 결과가 충분히 가능했을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동성결혼 반대 세력이 오바마와 바이든의 발언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활동가들을 흑인 교회와 백인 교회에 보내서 지지를 끌어 모은 반면, 주민발의안8 반대 운동은 동성애혐오 비판을 자제하고 가가호호 방문, 전화 유세, 거리 행동 등에 소극적이었다.

그동안 미국의 주류 LGBT 운동은 백인 중심적이라는 비판을 받아왔다. 이번 주민발의안8 반대 운동에도 마찬가지 문제제기가 있었다. 거대 LGBT 단체들은 기업의 후원에 의존하며 의회로비에 집중하면서 가난한 유색인종들과 괴리됐다는 것이다. 한 흑인 레즈비언은 로스앤젤레스 타임스 의견란에 이런 글을 썼다. “결혼할 권리는 흑인 동성애자와 흑인 이성애자 모두가 맞닥뜨린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아무 소용도 없다. 노숙자인 사람, HIV로 고통 받는데 의료보험이 없는 사람, 이제 막 감옥에서 나왔거나 실업자인 사람들이 동성과 결혼할 권리로부터 정말로 혜택 받는 게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해서는 있다고 답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쓰라린 감정이 존재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백인 중심의 주류 LGBT 운동 일각에서는 흑인이나 유색인 공동체가 동성애에 편협한 태도를 보인다는 이유로 그들을 멀리하는 경향이 있었던 듯하다. 이런 태도는 흑인 또는 유색인 LGBT들을 운동에서 소외시키고, 소수인종 공동체들 내에서 동성애혐오에 맞서 싸우는 데 걸림돌이 될 뿐이다.


따라서 지금 운동은 주민발의안8 통과의 책임을 흑인들에게 돌리는 것에 단호히 반대해야 한다. 실제로 미국에서 반동성애 운동은 압도적으로 백인들이 이끌고 있다.(당연히 모든 백인들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런 주장은 억압받는 사람들이 서로를 탓하게 만들어 그들 모두를 약화시킨다. LGBT 운동은 연대와 동맹 세력을 넓히면서 말 그대로 ‘모두를 위한 평등’을 요구해야 한다.


주민발의안8 통과에 대한 분노에서 출발한 지금의 운동은 이제 시작일 뿐이다. 이 운동이 어떤 변화를 성취할지는 알 수 없다. 확실한 것은 주민발의안8 통과를 무력화시키고 동성애자 권리의 전진을 이루기 위해서는 이 운동이 지속되고 더 확대돼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오바마나 민주당이 다수가 된 의회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지금처럼 거리 시위와 풀뿌리 운동 건설을 지속해야 한다. 이 운동이 승리한다면 LGBT 공동체뿐 아니라 진정한 변화를 바라는 미국인들에게도 용기와 자신감을 줄 것이다.

먼 나라 이야기로만 여길 수도 있지만, 지금 미국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우리에게도 영감과 교훈을 준다. 스톤월 항쟁과 액트업의 투쟁이 그런 것처럼 말이다. 이 운동을 지지하고 그로부터 배울 필요가 있다. 


덧붙여, 동성‘결혼’ 요구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진 사람들도 있다. 결혼 제도가 이성애 규범적 일부일처제를 강요하고, 국가나 종교와 연결돼 있기 때문이다. 동성결혼은 사람들이 삶을 구성하는 다양한 방식 가운데 하나의 선택사항일 뿐이다. 따라서 이성애자와 동등하게 결혼할 수 있는 권리로 동성애자 운동의 지평을 제한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결혼 제도를 비판하고 반대한다고 해도 동성결혼 권리 요구를 지지할 수 있고, 그래야 한다. 동성결혼 금지는 명백히 동성애자 차별이고, 동성애자가 이성애자와 동등한 시민적 권리를 누려야 하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이다. 둘째, 오늘날 사회에서 결혼이 주는 사회적, 물질적 혜택 때문이다. 특히 노동계급이나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이런 혜택이 결코 쉽게 무시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무엇보다 동성결혼 요구와 같은 제한적인 목표를 위한 운동이 더 급진적인 목표를 성취하는 데 방해가 되는 것도 아니다. 이런 개혁은 더 진전된 목표를 위한 운동을 고무할 수 있다.





나라 _ 동성애자인권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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