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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V AIDS

그의 절망에 눈물짓는 능력이 마비되지 않기를

by 행성인 2009. 1. 30.

 

2006년 말, 한 HIV/AIDS 감염인 친구는 이 땅에서는 구할 수 없는 약이 필요했다. 그는 국내에서 공급되는 12가지의 에이즈 치료제에 내성이 생겼고, 그래서 그에게는 새롭게 개발된 약이 투여되어야 했다. 푸제온(Fuzeon)이라는 약을 이 때 나는 처음 알았다. 1인당 국민소득 2만 달러인 나라에서 연간 2만 달러의 비용을 요구하는 약이었다.

모두들 ‘금값보다 비싼 약’이라고 했다. 그 말이 내 머리 속에서 뽑아내는 생각의 줄기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정말 비싸구나.”라는 놀라움, 다른 하나는 금속의 차가움이다.


엄마 손은 약손


어렸을 적에 자주 앓았다. 툭하면 편도선이 붓고, 열이 났다. 그래서 남들은 평생 한두 번 일으킨다는 경기도 수십 번을 경험했다. 그 때의 기억이 지금도 잔상처럼 남아 있다. 열이 펄펄 끓어서 눈앞이 뿌옇게만 보였다. 몸에 차가운 물수건이 닿아 놀래서 눈을 뜨면 근심어린 표정의 엄마가 내 몸을 닦아주고 있었다. 아빠의 서늘한 손은 내 이마를 쓰다듬어주면서 먹기 싫은 쓰디 쓴 가루약을 입 안에 넣어주었다. 며칠을 엄마와 아빠의 품속에 안겨 있으면 들끓던 내 체온은 서서히 내려갔다.


나에게 약은 ‘온도’로 다가온다. 내 몸속에서 나를 괴롭히던 열, 엄마 품의 체온, 서늘한 아빠의 손, 그보다는 무척 차가운 물수건. 그리고 따뜻한 물과 함께 들이킨 약. 그리고 얼마 후 열에 들떠 공중에 부유하는 듯한 나의 신체가 서서히 제자리를 찾아가는 그 안정감 등. 내가 기억하는 약은 나의 체온에 녹아 내 몸에 들어와 흔적도 남기지 않고 몸의 일부가 되는 그런 것이었다. 먹으면 똥이 되어 나오는 음식과는 달랐다.


아픈 것을 우리의 신체가 스스로 이겨내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누구에게나 빈틈이 있다. 그래서 약이 만들어졌다. 비어있는 부분을 채워주는 약의 따뜻함은 피를 돌게 하고, 열을 내리고, 머리를 맑아지게 한다. “엄마 손은 약손”이라는 말도 거꾸로 보면 약이 인간의 체온을 지닌 것이라 생각하기에 가능한 비유이다.


금속의 온도를 지닌 약


약이 인간의 체온을 지닌 것이라고 믿어왔던 나에게 ‘금값보다 비싼 약’의 존재는 충격이었다. 이 약을 투여 받은 사람들은 과연 어릴 적 나의 부모가 나에게 약을 먹였을 때처럼 ‘따뜻함’이나 ‘안정감’을 연상할 수 있을까?

‘엄마 손이 금손’이 되어버렸을 때, 즉 사람의 체온을 가져야 할 약이, 그래서 우리 몸의 비어있는 부분을 채워 36.5도의 건강한 따뜻함을 만들어야 할 약이 금속이 되어버릴 때 약은 몸의 일부가 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박히는 딱딱한 이물질이 된다.


다행히도 친구는 여러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푸제온을 투약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나와 나의 친구들에게 푸제온은 이제 약이라기보다는 마음 속 진한 생채기를 남긴 금속이 되어버렸다. 의사에게 시한부 인생 선고까지 받았던 감염인 친구의 절망에 눈물지었던 그 시간이 내내 가슴에 남는다. 살기 위해 그가 먹는 그 약도 그에게 ‘따뜻함’으로 다가오진 않을 것이다.

사람의 체온을 가지고 있었던 것들이 하나 둘씩 금속성의 외피를 덮어쓰게 되면 심지어 사람마저 그렇게 되어간다. “돈 없으면 약 먹을 생각도 하지 말라.”는 말이 상식이 되어버린 자도 있다. ‘인간다움’이라 불리던 것들이 어느 순간 차가운 금속성을 지닌 것으로 변하게 됐을 때, 남겨지는 것은 절망이 가져다주는 공포. 새로운 약이 만들어 지고, 그것이 국내에 공급될 예정이라는 뉴스를 보면 이제는 반가움보다는 두려움이 앞선다. 생명력을 내뿜으며 빛나고 있는 것이 사람이 아니라 화폐로 변이된 차가운 물질이기 때문이다.







절망에 대해 눈물짓는 능력


2006년부터 푸제온이 나에게 말해주는 세상은 이런 거다. 공포가 지배하는 세상. 공포에 잠식될수록 미래를 그리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우리 사는 이 세상이 점점 희망이 사라지는 것 같다고들 이야기 한다. 그래서 지난 3년간 친구들과 함께 흘렸던 눈물이 그 무엇보다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누군가가 받고 있는 인간적 절망에 대해 눈물짓는 능력이 마비되지 않는다면 공포가 모든 것을 잠식하지는 않을 것이다.



 

홍지 _ 진보네트워크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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