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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 이야기

이주사와 웅의 일본 여행기

by 행성인 2014. 5. 26.

이주사 (동성애자인권연대)


지난 5월 3일부터 6일까지 나와 웅은 동인련 활동가로서 일본의 성소수자 단체 레인보우액션의 초대를 받아 제1회 레인보우액션영화제의 토크세션에 참석하고 몇몇 일본 단체들을 방문하고 돌아왔다. 


레인보우액션은 2010년 12월 이시하라 신타로 도쿄도지사의 동성애자 차별 발언에 항의하는 활동을 통해 결성된 성소수자 활동가들의 네트워크이다. 이들은 꾸준히 성소수자들의 삶과 존재를 드러내는 활동을 벌이고자 한다는 목표 아래 구성원들이 각자의 관심사와 연결된 다양한 프로젝트와 팀을 구성해 활동하고 있다. 성소수자 난민 문제, 교육, 젠더 문제, 직장내 성소수자 차별 문제, 차별 발언 대응 활동 등을 다루는 팀들이 있다. 주로 2,30대인 10여 명의 활동가들이 활동하고 있다.   

레인보우액션 홈페이지: http://rainbowaction.blog.fc2.com


레인보우액션 로고. 출처:http://rainbowaction.blog.fc2.com


제1회 레인보우액션영화제는 시부야 근처 도쿄여성플라자에서 열렸다. 첫째날 프로그램은 한국 성소수자들의 삶을 보여주는 영화들로 구성됐다. 학교에서 성소수자혐오성 괴롭힘 문제를 다룬 <너를 위해>와 <종로의 기적>을 상영했고 이후에 나와 웅이 게스트로 참여한 한국 성소수자 인권 운동 관련 토크세션이 이어졌다. 한국 성소수자 운동의 쟁점과 현황을 개괄하고 동인련 활동을 소개했다. 동인련이 벌이는 연대 활동, 한국 게이 커뮤니티의 에이즈에 대한 태도에 대한 이야기도 나눴다. 


영화제 장소 내부 전경과 입구. 동인련에서 가져간 한국 성소수자 운동 관련 자료와 기념품도 부스에 비치!



한시간 넘게 이어진 토크세션 뒤에 영화제는 마무리됐고, 저녁엔 ‘X젠더'를 주제로 레인보우액션 ‘X라운지'팀이 주관한 프로그램이 있었다. X젠더는10여년 전에 한 오사카 활동가가 제안한 개념이라는데, 남/녀라는 젠더 구분과 이분법을 반대하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것 같다. 프로그램에는 다양한 젠더정체성을 가진 이들이 패널로 나와서 젠더정체성에 관한 다양한 생각을 나눴다. 행사장소는 구에서 지원하는 노동자복지센터의 30석 정도의 작은 강의실이었는데 추최측 예상보다 참석자들이 많아서 자리가 부족할 정도였다. 8시 반에 프로그램을 마치고 간단히 뒷풀이를 하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레인보우액션 'X라운지' 팀에서 준비한 프로그램. 다양한 젠더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이날 밤엔 진도5의 지진을 경험했다. 큰 쇳소리가 나더니 건물이 심하게 흔들렸지만 아무일 없다는 듯 호텔은 고요하기만 했다. 일본에서는 지진이 잦다고 하니 그런가보다 하고 다시 잠을 청했는데 다음 날 만난 활동가들은 이런 진도의 지진은 흔치 않은 일이라고 했다. 이튿날엔 영화제 집행위원장이자 레인보우액션 주요 활동가인 히로키씨가 연결시켜준 몇몇 단체를 방문했다. 재일교포 3세인 리행리씨가 통역을 도와주고 레인보우액션 활동가 네고로씨도 동행해 주었다. 


처음 방문한 곳은 와세다대학 근처에 위치한 WAM(Women’s Active Museum on War and Peace), 액티브 뮤지엄 여성들의 전쟁과 평화 자료관이었다. 히로키씨는 처음 만났을 때도 한일 역사문제에 관심이 많다고 얘기한 적이 있었다. WAM은 ‘위안부' 여성들에 관한 기록과 자료를 수집, 전시하면서 위안부 문제를 알리고 일본 정부에 제대로 된 사과와 배상을 비롯한  책임지기를 요구하는 활동을 벌이는 단체다. 한국의 민주화운동 및 각국의 관련 단체들과 오랫동안 교류하면서 많은 활동을 벌였다. 활동가가 상세하게 전시물과 활동을 소개해줬는데, 슬픔과 분노, 내 무심함 또는 무지에 대한 부끄러움, 살아내고 목소리 낸 이들에 대한 존경심이 교차했다. 많이 배웠다. 대만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이 진행한 다양한 치유 프로그램 활동을 담은 사진들을 보면서 우리는 나중에 우리도 저 프로그램을 해봐야겠다고 얘기하고 있었다.      

WAM홈페이지: http://wam-peace.org/en/


자료관 입구와 한글로 된 소개지

자료관 전시물 설명을 열심히 듣는 중. 전시중이었던 대만 위안부 피해 여성 관련 활동 사진들.  



다음 방문한 곳은 이케부쿠로에 있는 보건소 건물 1층에 위치한 10대 대상의 에이즈 센터 ‘T4(티포)'였다. 10대들이 편하게 찾아와서 시간도 보내고 활동가들과 대화하며 성과 에이즈에 대해 올바른 정보를 접하고 상담도 할 수 있는 곳이다. 이케부쿠로는 약간 신촌 느낌이 나는 동네였는데 건물 바로 앞엔 옛 신공을 떠올리게 하는 작고 황량하지만 사람들로 북적이는 공원이 있었다. 1년에 9천명 정도가 이곳을 찾는다고 한다. 10대들을 위한 공간으로서의 기능뿐 아니라 교사들에게 에이즈 교육에 대한 정보도 제공하고 에이즈의 날에 대중적인 캠페인도 진행하고 있었다. 티비에는 포켓몬을 틀어놓고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공간이 편안해 보였고 자원활동가들도 2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앳된 얼굴이었다. 우리에게 T4 소개를 해준 활동가는 10대 때 센터에 드나들며 인연을 맺었다고 했다. 센터에는 회의 공간도 있어서 10대 모임이나 단체에 무료로 장소를 빌려준다고 했는데 이날도 10여 명의 10대들이 모임을 가지려고 온 것을 볼 수 있었다. 건물주라 할 수 있는 보건소 쪽이 이런 저런 간섭과 잔소리를 한다는 얘기에 쓴웃음이 나면서 운영이 잘 되고 있구나 생각했다. 그곳이 죽은 공간이라면 그런 얘길 듣지 않을테니까.

T4홈페이지: http://www.fukushihoken.metro.tokyo.jp/iryo/kansen/aids/4t/



건물 앞에는 귀여운 그림과 함께 T4가 있음을 알리는 게시판이 서 있었다. T4 외관과 역시 아기자기 꾸며진 내부의 게시판 모습. 



성소수자 여성들을 위한 도서관 LOUD

95년에 설립됐다는 LOUD는 일본 여성 성소수자 커뮤니티의 역사와 활동을 엿볼 수 있는 곳이었다. 나가노역 근처 주택가의 작은 연립주택에 있었는데 20년 가까이 발행된 레즈비언 소식지를 비롯해 역사적인 여러 자료를 볼 수 있었다. 공간은 곳곳이 무지개로 꾸며져 있었고 게시판에는 40대 레즈비언 모임(R40) 홍보물이 붙어있다. 처음에는 그냥 여성도서관이라고 해서 별 기대가 없었는데 아무래도 제일 친근하고 재미있었던 곳이다. 공간에 대해 설명해 준 레인보우액션 회원이자 LOUD 회원은 자신이 진행한 레즈비언과 빈곤에 대한 조사에 대해 얘기해 주기도 했다. 회원들의 후원과 기념품 판매, 다양한 모임에 공간을 대여해서 얻는 수익으로 운영된다고 한다. 20년 동안! 

http://space-loud.org/english



라우드 소개 리플릿과 소식지 '라우드 뉴스'


80년대부터 발행됐다는 레즈비언 소식지 "레즈통신', 레즈비언, 동성애와 관련해 중요한 의미가 있는 책들. 




빽빽한 일정에 동행해준 분들도 힘들 것 같고 우리도 휴식이 필요해서 LOUD를 나와서는 네고로씨가 추천한 근처 코엔지에 가서 각자 시간을 보냈다. 코엔지 역 앞에서는 복직 지지 서명을 받는 JR노동자들과 마주쳤다. 서명을 하며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철도노조 상황을 물었고 세월호 참사에 대한 안타까움도 표했다. 젊은이들과 시민단체 활동가들이 많이 사는 동네라는데 구제 가게들과 독특한 카페, 술집들이 늘어서 있었다. 코엔지 남쪽 거리를 산책하다 나나츠모리라는 가게에 들어가 커피를 한잔 하며 쉬었는데 알고보니 40년이나 된 유명한 곳이었다. 


나나츠모리의 메뉴판과 재털이. 부엉부엉.




마지막으로 찾은 곳은 니초메의 ‘akta(악타)’. 2010년 여름 에이즈 활동가들과 한 회의에 참여했을 때 방문한 적이 있는 곳이다. 하세가와씨도 이때 처음 만났다. 드랙킹 퍼포머이기도 한 악타 운영책임자와 하세가와씨와 한참 이야기를 나눴다. 콘돔 배포를 하며 악타를 알리고 커뮤니티에 에이즈를 드러내는 접점 구실을 하는 딜리버리보이즈는 4년 새 무척 성장해 50명에 이른다고 한다. 당시는 10여명이 활동한다고 했었다. 니초메 중심 한복판에 악타가 제작한 커다란 광고판도 걸려있었다. 여전히 활발히 진행중인 듯 보인 리빙투게더 캠페인도 인상적이었고 JaNP+는 HIV감염인들의 커밍아웃을 지지하는 프로그램을 벌이고 있다고 한다. 프로그램에 참여한 20명의 감염인들이 사회적으로 커밍아웃했다고 한다. 악타에 대한 정부지원이 줄어 운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고 내년 운영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모든 곳에서 삭감, 긴축 투성이다. 



악타 공간을 소개하는 포스터와 콘돔을 배포하며 악타와 커뮤니티를 연결하는 활동을 하는 딜리버리 보이즈. 콘돔 디자인도 귀엽!


악타 내부 벽에 빼곡히 붙어있는 포스터들과 비치된 자료들. 어마어마하게 많음. 


니초메 한복판 사거리에 걸린 대형 광고판. 에이즈 감염인에 대한 편견과 혐오에 반대하는 '리빙 투게더' 캠페인.


모든 일정을 마무리하고 레인보우액션 활동가들과 마지막 저녁을 먹고 신주쿠 니초메의 이반바에서 뒷풀이를 가졌다. 일본 활동가들의 고민, 한국의 경험, 운동 얘기가 시끄럽게 이어졌다. 갈때도 올때도 순탄치만은 않았던 고단한 짧은 여행이었지만 각자의 공간과 상황에서 변화를 고민하는 친구들을 만난 즐거운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