長篇小說





金 飛




그녀인 나와,

나의 그에게 




프롤로그 - Cafe, 데리다 




  "그런 건, 좀 유치하지 않아?" 

  "쫌… 그렇긴 해." 

  "뭐가, 그래? 매번 술 먹고나서 서로 들어주지도 않는 말들, 목소리 높여 떠들다가 돌아가면 그게 좋으니?" 

  "잎새 누나 말이 맞긴 하지. 들어주는 사람은 없는데,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들어줬다고 착각하면서 말이야. 그러고 나중에 물어보면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하여간 또 삐딱하다, 저거." 

  "상우 형이야말로 또야? 형, 매번 용호가 무슨 말만 하면 쟤한테 시비거는 거, 알아? 용호 한테 관심 있어? 박쥐네, 간쓸개네, 양성애자라고 매번 시비 걸면서, 그건 항상 쟤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단 이야기잖아?" 

  "난 됐어요." 

  "저게? 나도 아니올시다야, 인마! 내가 밑지는 짓을 왜 하고 앉았어? 난 저렇게 덩치 커다랗고 근육질인 놈, 별로야. 게다가 아무리 마음을 줘도, 결국 저 놈은 나한테 반만 주고 말 거 아냐? 이게 무슨 헛짓꺼리냐고?" 

  "반이라도 제대로 받아본 적이나 있어요, 형은? 스스로는 다 줬다고 생각하면서 혼자만 피해자인 척 죽겠네, 아프네, 여기저기 까발리고 다니다가, 또 다른 놈 만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희희낙락이잖아요? 그러니까 형이 줬다고 믿는 그 전부가, 상대방이 준 반 만큼의 크기나 되기는 하는 거냐고요?" 

  "상대방도 그냥 상대방이 아니고, 애들… 매번 저 형이 철부지라고 깔보는 솜털 보송보송난 애들 마음의 반이지, 그것도." 

  "저게? 야, 유민수, 넌 입 다물고 가만히 있어!" 

  "너나 가만히 있어, 이것아." 

  "아야야… 왜 데리다 형은 매번 나만 갖고 그래? 내가 쟤들한테 시달리는 거, 보잖아? 형이라도 내 편을 들어줘야하는 거 아냐?" 

  "무슨 오비, 와이비 조기축구 하냐?"  

  "그래, 그래… 내가 생각하기에도 상우 오빠는 매번 자기가 먼저 시작하더라. 오빠가 쿡 찌르니까 쟤들이 한꺼번에 우루루 달려드는 거잖아?" 

  "현아, 너마저 그럴래?' 

  "에이, 오랜만에 다 같이 모여 밤새도록 마시기로 한 건데, 분위기 망치지 말자는 거죠, 나는." 

  "유진이는 없잖아?" 

  "걔야 뭐, 모임 안 나온지 한참되었으니깐. 잎새 너는 그래도 가끔 보지?" 

  "네, 가끔요." 

  "잘 지낸데?" 

  "뭐… 그냥 조용히." 

  "그 놈도 많이 늙었지?" 

  "시간이 그만큼 흘렀잖아요." 

  "근데 왜 하필 27년 후야? 10년 후도 아니고, 20년 후도 아니고, 그렇다고 15년이나, 25년도 아니고." 

  "하여간, 저 형 특이해요. 그러니까 돈 많이 주는 직장 때려치우고 이 동네 후미진데서 이런 카페나 하고 앉았지." 

  "27년 후면… 잎새 넌 몇 살이냐?" 

  "나? 나는 예순 셋인가? 그럼 상우 오빠는 예순 일곱인 거야?" 

  "그렇지, 형은 몇이요? 칠 십이요?" 

  "민수가 제일 젊겠네, 그래봐야 오십 대 겠지만." 

  "그냥… 생각해보자고. 우리 매번 그렇게 모여 가까이 지냈어도, 이런 이야기는 의식적으로 좀 피했던 것 같아서." 

  "진지 빠는 이야기 재미 없잖아?" 

  "그래, 넌 유부남 꺼 빠는게 재미있겠지." 

  "형!" 

  "야, 안성준! 너 쟤 한 번 걷어 차! 이번엔 그럴 만 했어, 너 이 자식! 나이 먹어 쟤들하고 꼭 그러고 싶냐? 이러니 쥐어 박히지, 이러니 내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지, 으이그!" 

  "아야야, 형!" 

  "나는 말이야, 그 때에도 어디든 힘없는 사람들 편에 서서, 그 사람들하고 같이 어깨를 걸고 있었으면 좋겠어. 최소한 다 늙어서 이게 뭐하는 짓인가, 하는 생각은 하지 않으면서 살아가고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네. 뭐, 혼자고 외롭고 돈없고… 그런 게 두렵진 않아. 두려운 건, 누가 무너뜨리기 전에 나 스스로 무너져버리는 거겠지." 

  "누나 학교에서 다른 시간 강사들이랑 한다는 그 시위는 아직 안 끝난 거야?" 

  "끝날 수가 있나? 돈이 지배하는 세상과의 싸움인데." 

  "나는 지금처럼 자유롭게 살고 있었으면 좋겠어요. 나이와는 상관없이, 어떤 틀에도 얽메이지 않고 물처럼 흘러가면서 그렇게 늙어가고 있었으면 바랄게 없겠어요." 

  "그렇게 늙어서도 지금처럼 멋대로 살겠다니, 너도 참." 

  "형이 할 소리는 아니지 않아요? 권위주의에, 꼰대 짓에, 동성애자라는 거 빼고 말하는 거만 들어보면, 형 완전 꽉 막힌 인간 같잖아요? 최소한 그거보다는 쟤가 나을 것 같은데."  

  "이게 또?" 

  "인간한테는 원래 자유 의지가 없는 거래요. 뇌과학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우리가 하는 모든 선택이 실은 우리의 선택이 아니라, 이미 우리가 결정하기 전에 뇌가 알아서 모든 결정을 하고 난 후라고 하더라고요." 

  "그게 뭔 소리야, 또?" 

  "아직 정확히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뇌의 선택과, 우리가 인식하는 선택의 사이에는 10초 정도 차이가 난대요. 그러니까 우리가 하는 모든 선택이, 실은 우리 자신의 선택이 아닌 거죠." 

  "그래, 그 말이 맞기는 해. 나도 내가 왜 결혼한 사람들한테만 끌렸던 건지는 잘 모르겠거든." 

  "지금 그거하고는 맥락이 다른 이야기 같은데?" 

  "뭐가 달라요? 형이야말로 왜 그렇게 삐딱해요?" 

  "그럼 넌 환갑이 넘어서도 결혼한 남자들만 쫓아다닐 거냐? 설마 그럼 결혼한 할아버지들만 쫓아다니는 거야?" 

  "할아버지든 아니든 그게 무슨 상관이야? 난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건, 사랑이라고 생각해, 돈이고 사회 정의고 뭐고 난 다 필요 없어. 만약 그 때에도 내게 어떤 열정이 있다면, 그건 아마 오직 진실한 사랑 그거 하나 뿐일 거야. 그리고 그걸 쫓아서 무슨 짓이든 하고 있겠지." 

  "하여간… 집념이냐, 집착이냐? 그 때쯤엔 노망 아니냐, 그건?" 

  "뭐라고 해도 좋아, 난. 나한테는 오직 사랑이니까. 이 삶은, 내게 단 한번이라도 진실한 사랑을 위해 존재하는 거라고 생각하니까." 

  "잠깐만요." 

  "뭐야? 잎새 넌 이 새벽에 누구한테 연락이 온 거야?" 

  "아니에요, 홈페이지에 답글이 달려서……" 

  "누군데? 남자야?" 

  "그렇겠지?" 

  "그렇겠지는 뭐야?" 

  "아직 만나본 적이 없으니까. 이름만 알아." 

  "뭔데, 이름이?" 

  "산! 후산이래. 글 올릴 때는 산이라고 쓰고." 

  "뭐야, 남산? 북한산? 아니면 백두산?" 

  "어우, 정말 유치하다. 저런 아저씨가 지금 데리다 형한테 유치하다고 한 거야?" 

  "어… 잎새 누나, 어디 가?" 

  "잠깐만, 답글만 좀 달고 올게." 

  "저거 뭐 있는 거 아냐?" 

  "그러면 우리 유치하지도 않고, 권위주의도 없으며, 꼰대 짓도 하지 않으시는 민수, 너는? 여자로 태어나 남자가 되기로 해놓고 남자한테 끌린다는 너도, 이십 칠 년 후에는 고작 니가 좋아하는 데리다 형이랑 알콩달콩 잘 먹고 잘 사는 미래 따위나 꿈꾸고 있을 거 아냐? 내 말이 틀려?" 

  "왜 날 봐?" 

  "그럼 쟤가 누굴 보겠어? 이 상황에 레즈비언인 현아 누나를 보겠어, 유부남 좋아하는 나를 보겠어? 데리다 형은 참 똑똑하다가도, 가끔 한번씩 멍청한 질문을 한단 말야?" 

  "아뇨." 

  "……" 

  "그 때에도… 지금과 똑같을 것 같아요. 나는 계속 기다리고, 기다리고… 또 그래도 계속 기다리면서." 

  "미안, 미안… 답글을 좀 길게 다느라고… 아직 안 끝났지? 지금은 누구 차례야?" 

  "형이랑 행복하게 잘 사는 거… 나는 꿈조차… 꾸지 못해요. 난 남자가 아니니까… 형이 선택하기 이전에, 형의 몸이… 형의 뇌가 이미 나를 거부하고 있을 테니까." 

  "……" 

  "뭐… 뭣들 하냐, 마셔! 마셔 들!" 




김비

1971년 남과 북의 경계 위, 삶과 죽음의 경계 위, 그리고 남자와 여자의 경계 위에서 태어났다. 

2000년 서른 살의 나이에 '여자'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났고, 2007년 여성동아 장편소설 공모에 [플라스틱 여인]이 당선되어 '소설가'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났다.

2012년 세계문학웹진 <국경없는문학> www.wordswithoutborders.org의 세계 퀴어문학을 소개하는 자리에 단편소설 [입술나무]의 영어판을 게재하였고,

에세이 [네 머리에 꽃을 달아라], 장편소설 [빠쓰정류장]을 출간했다.

부끄러운 기억 같은 책 몇 권을 썼으며, 영화 [천하장사 마돈나]를 만드는데 함께 했다. 




댓글을 남겨주세요

Name *

Password *

Link (Your Homepage or Blog)

Comment

Secr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