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무지개문화읽기/[김비 장편소설 연재] 우리의 우울에 입맞춤

우리의 우울에 입맞춤 | 15. 새 - 달라지는 것들, 사랑하면

by 행성인 2015. 3. 15.

 

 

長篇小說

金 飛

 

 

14. - 달라지는 것들, 사랑하면 



 사랑한다는 말을 듣고 나면, 잠시 세상이 정지한다. 바쁘게 머릿속을 유영하던 모든 것들이 순식간에 증발한다. 오직 사랑한다는 그의 목소리 하나만, 등대처럼 새빨갛게 거기 섰다

 언제나 그건 나에게서 멸종된 언어였다. 가족이나 형제, 혹은 친구들의 이름 뒤에 붙이는 사랑 따위도 꺼내어본 적 없어, 내가 아는 언어 속에는 그런 말이 없었다. TV 속에서, 책 속에서, 사랑을 보고 읽었을 때, 나는 전시물 앞에 선 것처럼 멀찌감치 떨어졌다

 한 번은 사랑한다고 말하는 그에게 안기다가 왈칵 눈물이 쏟아지고 말았다. 거기 유리벽 안에만 있던 사랑이, 아무리해도 가까워질 수 없고 만질 수도 없던 사랑이 하나의 몸으로 마침내 나에게 안긴 것 같았기 때문에. 물 위에 비친 하늘을 담겠다고 두 손으로 물을 담아 올렸는데, 솜 한 덩이처럼 떠진 손 안에 하늘을 들여다보는 기분이었다

 이제 나는 매일 사랑한다고 말하며 산다. 그 말이 보여준 행위 수행적 힘이 너무도 놀라워 나는 가끔 그렇게 말하는 나 자신이 낯설어지고 만다. 말을 처음 배우는 아이처럼 나는 요즘 사랑이라는 말을 여러 번 쓰고 중얼거리며 사랑을 배워가는 중이다. 사랑, , . 사아 랑. 사아 라아앙. 그러면 나도 모르게 웃는 나를 알게 된다. 사랑과 나를, 동시에 발견한다.  




 “누나, 그거 알아? 얼굴 표정도 달라졌어.” 

 “무슨? 말도 안 돼!” 

 “말이 안 되기는 뭐가 안 돼? 누나 정말 달라졌다니깐? 뭐랄까편안해졌어. 예뻐진 건 아니니까 넘겨짚지 말고. 헤헤.” 

 “이게?” 

 

 몽둥이처럼 생긴 샌드위치를 들어 올렸다가 야채들이 후두둑 머리 위에 떨어졌다

 

 “하여간 칠칠치 못한 건…” 

 “아유, 내가 정말 못산다, 못살아!” 

 

 같이 웃는 우리 두 사람의 모습이 유리창에 비췄다. 웃는 나를 보고서 웃고 있는 유진을 보니, 내가 울고 있을 때 그도 같이 울었겠구나 싶었다

 

 “고마워.” 

 “어어어왜 이래, 닭살 돋게?” 

 

 벌레라도 된 듯 그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냥한 번도 그런 말을 해 본 적이 없는 것 같아서. 너한테는 언제나 갚아야할 빚이 있는 것 같은데그런 줄 알면서도 고맙다는 이야기 한 번 제대로 해 준 적 없는 것 같아서.” 

 “이 여자가 왜 이래? 어으, 오글거려!” 

 “그치, 오글거리지? 나도 내가 이럴 줄 몰랐다. 흐흐흐.” 

 “좋네, 사랑이라는 거정말 좋은 거긴 하네. 맞다, 사랑은 그런 거다, 그지? 좀 쎄지, 사랑이.” 

 “너는 그래도 그 동안 연애 몇 번 해봤잖아? 그러니까 너는 이미 벌써 여러 번 그렇게 변해 왔던 건지도 모르지. 변하면서 성장한 거겠지.” 

 “글쎄잘 모르겠다. 분명히 그땐 사랑이라고 믿었는데, 시간이 지나고 나니까 자꾸 달라지더라? 그때에는 분명히 그 사랑을 알고 있고, 그 모양이 어떤지도 안다고 믿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납작하고 미끄덩거리기만 해.” 

 

 갑자기 미안해졌다. 왜인지는 알 수 없지만, 사랑하는 내가 자꾸 미안했다

 

 “넌 왜 연애 안 해? 좀 찾으러 다니고 그래. 게이 바에도 여기저기 좀 다니고, 모임도 나가고.” 

 “귀찮아, 귀찮아져버렸어.” 

 “뭐야, 사랑이 귀찮으면 어떡해? 싫은 것도 아니고너 정도면 웬만한 게이들도 눈 독 들이는 사람 많을 텐데…” 

 “그렇지? 내가 좀 괜찮기는 하지? 헤헤.” 

 “근데 왜 그러냐? 적극적으로 좀 찾아다녀, 적극적으로!” 

 “모르겠다, 그냥 이상해. 그런 마음 알지 모르겠는데정말 간절히 외로운 것 같은데 누군가를 만나기는 싫고, 여기가 싸 아프면서 사람들이 말하는 사랑이란 걸 하면 좀 나을 것 같기도 한데, 내가 바라는 게 정말 사랑이 맞는 걸까 싶기도 하고.” 

 

 그는 그렇게 말해 놓고 잠시 자신의 심장 근처를 어루만졌다

 

 “이성애자들도 마찬가지겠지? 이런 기분 말이야. 사랑하고 싶은데, 그런 사랑은 아닌 것 같은 그런 느낌 말이야. 내가 바라고 원하는 것이 사랑 안에는 없는 느낌말이야.” 

 

 다를 건 없을 것이다. 사랑은 사랑이고, 떨림은 떨림이고, 고독은 고독이고, 외로움은 외로움이고, 그리움은 그리움이고. 결혼이나 아이를 낳는 일이 사랑의 목적이 아니라면, 사랑은 사랑일 것이다

 

 “그거하고는 상관없을 거야. 나누려면 다른 쪽으로 나눠야 겠지. 뭐 저런 게 사랑인가 싶은 껍데기만 사랑인 것과, 그렇지 않고 알맹이까지 같이 있는 사랑으로. 이성애 동성애 그리로 나누는 게 아니고굳이 한자를 붙이자면, 진성애와가성애? 이렇게? 흐흐흐.” 

 

 유진이 무표정한 얼굴로 내 어깨 너머 어딘가를 봤다. 그가 떠올리는 사랑이 무언지, 어떤 건지, 나는 알지 못한다. 어쩌면 알 필요도 없고, 알려고 할 자격도 없는지도 모른다. 그건 아마도 그와 사랑을 하게 될 그 사람만이 자연스레 알게 되는, 두 사람만의 길이고, 계곡이고, 바다일 것이다. 그 나머지 우리에게 주어진 몫이란 호들갑, 환대, 축하, 그리고 잘 됐다!’고 수십 번 수백 번이라도 반복해주는 일.  




 “통화하다 말고, 뭐하는 거예요?” 

 “번역 작업이요. 다음 주가 마감인데, 너무 손을 놨더니 머리가 안 돌아가요.” 

 

 흙냄새가 나는 오래된 책은 나른하고 포근한 일상의 묘사뿐이었다. 미국의 어느 목사가 에세이 형식으로 썼다는 그 책은 종교를 가진 누군가에게는 잔잔한 일상 속 신의 손길을 깨우치는 걸작인지 몰라도, 나에게는 심심하고 재미없는 먹고 사는 일에 불과했다

 

 “돈은 많이 받아요?” 

 “원고지 한 장 당삼천오백 원 정도? 그 정도면 뭐 괜찮은 거죠. 처음 이 일 시작하는 사람들은 그것도 못 받아요.” 

 

 어느 문장 끝에 매달린, ‘two back in a growing line’이라는 표현 앞에서 나는 꽉 막혀 있었다. 분명히 화자가 차를 몰고 가는 도중에 신호를 기다리며 차 안에 앉은 상황인데, 갑자기 중간에 불쑥 드러난 그 표현은 너무 모호했다

 

 “자기도 자기 이름으로 책 같은 걸 써보지 그래요? 자서전 같은 거 말고요.” 

 

 ‘자서전 같은 거 말고요.’라는 그의 말이 아팠다. 부끄러운 개인사를 드러내기로 결정했던 이유를 한 단락으로 말하거나 적기엔 너무도 복잡하고 어려운데, 그는 간단히 그 모든 걸 이해하는 사람처럼 해맑은 말투였다

 

 “번역하는 사람들이나 출판 관련 일을 하는 사람들아니면 집에서 혼자 매일 자판과 씨름하고 있는 사람들까지 전부 다 그런 꿈을 가지고 있을 걸요? 쉽지 않은 일이겠죠. 나도 트랜스 아니었으면 책 낼 기회조차 없었겠죠, .” 

 

 그럴 필요 없는데 말끝이 자꾸 꼬아졌다

 

 “앞으로 써 봐요. 계속해서요. 내가 응원해줄게요.” 

 

 자판을 두드리다 말고 나는 침대 옆 작은 액자에 담긴 사진 속 그를 봤다. 내가 맨 처음 양산에 내려갔을 때 부산에 같이 놀러 가 서면 근처의 도넛 가게에서 같이 찍은 사진이었다

 

 “우리시간은 얼마나 오래 갈까요?” 

 “글쎄요.” 

 “우리 감정도변하겠죠? 지금 우리를 둘러싼 이 마음들이 닳아 없어지고 나면, 우리는 어떤 감정으로 서로를 지키며 살게 될까요?” 

 

 너무도 조심스러워 차마 하지 못한 말이었는데, 좀처럼 이해되지 않는 문장에 눈을 두고서 나는 조용히 물었다

 

 “그땐 의리로 사는 거죠. 그 동안 같이 지나온 시간들을 생각하면서그때에는 같은 길을 걷는 동료처럼 의리를 지키며 살아야하는 거겠죠.” 

 

 사랑과 어울리지 않는 말이란 걸 단번에 알았지만, 이상하게도 믿음직스러웠다. 영원이나 불변의 가면을 뒤집어 쓴 그 어떤 확신의 말보다 더욱 반가웠다

 

 “나야 말로 자기 만나고 많이 편해졌는걸요?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한테 매일 응원을 받는 것 같은 기분이에요. 그러니까 나도 자기한테 응원을 해주고 싶은 거고요.” 

 

 살짝 들뜬 그의 목소리 너머에서 박수 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아무리 힘들어도 흔들리지 말아요. 아니, 흔들리는 건 괜찮아요. 흔들려 쓰러지게 되더라도, 내 쪽으로 쓰러지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오케이.” 

 

 아직 읽어내야할 말과 문장들이 너무 많이 남았는데, 자꾸 눈앞이 흐려졌다. 가뜩이나 이해할 수 없었던 모호하고 흐릿한 표현들이 이제는 서로 뒤엉켜 얼룩덜룩해지고 말았다

 

 “큰일이다일 해야 하는데오늘은 아무래도 힘들겠네. 그냥 수다나 떨다 자야겠네요.” 

 “그래요, 그럼. 억지로 할 필요는 없죠. 내가 노래 불러 줄까요? 오늘 직업 교육원에서 수업 듣고 오다가 버스에서 들은 옛날 노랜데자기 생각나더라고요.” 

 

 휴대폰 건너편에서 그는 벌써 목을 풀고 있었다

 

 “뭔데요?” 

 “잠깐만요, ! 내게도 사랑이사랑이 있었다면그것은 오로지 당신뿐이라오. 내게도 사랑이자기 이 노래 알아요? 잠만요, 그 다음이 뭐더라? 잠깐만요.” 

 

 컴퓨터로 찾고 있는 중인지 똑딱거리는 자판소리가 들려왔다

 

 “찾았다! 함중아함중아라는 가수가 있었나? 근데 이거 트로트인가? 아닌데, 버스에서 들었을 때에는 그런 느낌 아니었는데잠깐만요. 세월이 흘러서 가면그 시절 생각이 나면못 잊어 그리워지면내 마음 서글퍼지네. 원 투 쓰리 포! 내게도 사랑이사랑이 있었다면, 그것은 오로지 당신뿐이라오.” 

 

 까마득히 멀고 먼 거리를 뛰어넘어 서툴고 더듬거리는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몰라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흐릿하고 모호해도 괜찮을 듯했다

 

 “내게도 사랑이, 사랑이 있었다면, 그것은 오로지 잎새뿐이라오. 히히좋죠, 그죠? 잠깐요, 다른 노래도 불러줄게요. 이번에는 최신 곡으로잠깐요, 잠깐만요.” 

 

 그는 또 열심히 노래를 찾는 모양이었다. 여전히 알 수 없는 ‘two back in a growing line’을 머릿속에 담은 채, 나는 침대에 누웠다. 그가 찾은 노래를 기다리며, 여전히 낯설고 해석하기 어렵고 모호한 것들을 떠올린 채, 나는 고맙구나 생각했다. ‘고맙습니다.’ 말하고 나니, 또 눈앞이 흐려졌다

 

 “아유, 청승청승!” 

 

 눈을 여러 번 깜빡이고, 노래라도 하려는 사람처럼 나도 목을 가다듬고, 그리고 그 사람의 다음 노래를 나는 기다렸다.  

 

 

 

김비2007년 ‘여성동아’ 장편소설 공모에 <플라스틱 여인>이 당선돼 등단했다. 장편소설<빠쓰 정류장>·<붉은 등, 닫힌 문, 출구 없음>, 산문집 <별것도 아닌데 예뻐서>·<제주 사는 우리 엄마 복희 씨>·<슬플 땐 둘이서 양산을> 등을 냈다. 한겨레신문에 ‘달려라 오십호(好)’를 연재 중이다.

 

* '우리의 우울에 입맞춤'은 2014년 김비 작가가 웹진에 연재한 '나의 우울에 입맞춤'을 2022년 수정한 원고입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