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한 번의 여성의 날, 우리에게 필요한 ‘더 더러운 커넥션’
나기(언니네트워크, 퀴어여성네트워크)
지난 3월 5일, 3.8 세계여성의 날을 기념하여 서울시청에서 한국여성대회가 열렸다. 같은 시각, 공교롭게도 같은 날 2016 LGBTI 인권포럼이 진행되었다. 제32회 한국여성대회의 주제 “희망을 연결하라 모이자! 행동하자! 바꾸자!”와 인권포럼의 “THE 더러운 커넥션”이 한 자리에 ‘연결’되어 ‘커넥션’을 이루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첫 번째 세션인 <Gay in the mirror : 우리 안의 여성혐오>에는 메갈리안들이 와서 분탕질이라도 쳐줬으면 싶었다. 다음 날 있었던 <다시 한 번 나는 여성이 아닙니까>에는 그동안 성소수자 인권운동과 긴밀한 관계를 맺어왔던 페미니스트들만이 아니라 다른 단체의 페미니스트들이 와서 이 판의 이야기를 좀 들었으면 좋을텐데, 그러다가도 흠칫- 새삼 ‘아쉽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스스로에게 놀라는 것이었다.
작년 3.8 세계여성의 날 한국여성대회에서 무지개농성단이 성평등디딤돌 상을 받았던 것을 기억하는 사람에게는 놀라울지 모르겠지만 사실 3.8 세계여성의 날 성소수자들이 그 날을 ‘우리’의 날이라고 부르며 다른 주류 여성운동계와 함께 축하한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오히려 늘 같은 시간, 다른 장소에 서서 3.8 세계여성의 날이 ‘우리’의 날이 될 수 있도록 다른 목소리를 냈던 역사가 훨씬 길다.
2003년에는 ‘다름으로 닮은 여성연대’가 만들어져서 2003년 ‘색다른 어울림’, 2004년에는 ‘Wow! 또 다른 세상을 공감하기’, 2005년은 ‘차별을 멈추는 체인지 데이(Change Day)’라는 이름으로 매년 캐치프레이즈를 달리했다. 이곳에서 3.8 세계여성의 날 무지개시위를 열었는데, 주류 여성운동에서 말하는 ‘여성’이 누구인가를 질문했다. 더불어 성별, 성정체성, 장애, 나이 등의 차이들이 어떻게 ‘다른’ 여성을 만들어내는지, 그 차이 속에 있는 여성들의 목소리는 무엇인지 듣기를 요구하고 그 다름을 이야기하지 않은 채로는 같은 자리에서 이야기할 수 없음을 표명하였다.
무엇이 '여성'을 만들어내고 구성되는지를 성찰하고 '여성'을 통해 드러나는 모든 억압과 차별, 그리고 사회적 소수자들을 향한 차별을 더욱 새롭게 고민하고 반차별의 이슈를 재구성해야 한다
소수자의 목소리를 듣고, 여성 내부의 차이를 이야기하고, ‘여성’을 구성하는 구조가 성차별을 만들어내는 구조라고,
다른 자리에 서서 외칠 수밖에 없었던 지난 3.8 세계여성의 날들을 생각할 때 무지개농성단이 한국여성대회에서 성평등디딤돌상을 받고, 퀴어문화축제 개막식에서 페미니스트들이 발언을 하고, 성교육표준안에 여성단체와 성소수자단체가 공동으로 대응한 2015년의 장면들은 바라온 장면이면서도 생소한 것이었다. 전에 여성가족부가 대전시 성평등기본조례에 대해 “양성평등기본법은 어디까지나 여성과 남성의 동등한 권리와 책임에 관한 법이기 때문에 성평등기본조례에서 성소수자 항목은 삭제해야 한다”는 조치를 내렸었다. 이에 “양성평등기본법은 오로지 비성소수자 여성과 남성의 평등만을 이야기하는 것이냐, 여성 혹은 남성이라는 이분법적 젠더 구분의 기획이 성차별을 재생산하는 구조 중의 하나라는 것을 전혀 성찰하지 못하고 있다”고 항의하기도 했는데 이것을 성소수자운동이 여성운동을 ‘향해’ 한 것이 아니라 여성운동 전반과 ‘함께’ 변화를 모색한 것이기에 희열이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2016년 3.8 세계여성의 날 기념 행사가 이루어지는 시각, 과거와 다르게 의도적으로 다른 자리에 앉은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다른 자리에 앉아서 생각한 것은 아직 이 커넥션이 빈약함을 방증하는 것이었다. 일정이 안 맞으면 다른 자리에 있을 수도 있지-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기엔 상황이 좋지 않다는 생각.
날지 못하거든 빨리 좀 뛰어보라고 말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
이제 막 걷기 시작했는데 날아보라고 하는 건 무리겠지만 날지 못하거든 빨리 좀 뛰어보라고 말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 2015년 여성운동과 성소수자운동이 한 목소리일 수 있었던 것은 꾸준히 다른소리를 내면서 다른 ‘여성’의 삶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드러내온 시간들이 쌓인 결과이다. 무지개농성을 치르며 성소수자운동이 성장하면서 인권운동단체와 여성운동단체가 긴밀하게 연대를 요청하고 만나온 시간들이 쌓인 결과이기도 하다. 이것은 한국사회의 성보수화가 성소수자혐오를 기반으로 매우 조직적으로, 전방위로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에 더욱 절실하게 다가온다.
비이성애에 대한 배제와 여성/남성이라는 이분법적 젠더 구분을 넘어서지 못하는 이성애적 젠더 구조가 보수 기독교와 성소수자 혐오세력의 성 보수화 논리의 기저에 깔려있다. 조직적인 혐오를 이겨내지 못하면 여성운동이 나아가지 못한다는 자각이 필요하다. “항문섹스도 인권이냐”고 외치는 성소수자 혐오세력의 언어에는 성소수자의 삶을 섹스로 축소하는 것, 그 섹스에 혐오 이미지를 덧씌우는 것뿐 아니라 남성성기의 질 삽입 이외에 다른 섹스는 상상하려 하지 않는 ‘정상적인’ 섹스와 그렇지 않은 섹스의 위계를 가르는 규범이 있다. 더불어 삽입의 주체로서 ‘남성’의 위치를 흔드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혐오가 깔려있다. 이 두려움과 혐오가 표면적으로는 게이 남성에 대한 혐오로 표현되지만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있는 것은 이성애자 남성에게 삽입당하는 객체로서의 ‘여성’이다. 하도 기가 차서 헛웃음밖에 안 나왔던 “다음 중 올바른 여자아이의 옷차림을 고르시오” 라며 치마를 입고 있는 여자아이의 그림이 정답으로 제시된 초등학생 성교육 표준안의 내용은, 트랜스 젠더나 젠더 퀴어인 성소수자에게만 문제가 되지 않는다. 편협한 여성 이미지 앞에서 “나는 여성이 아닙니까”라는 질문을 되새기는 것 역시 여성 성소수자만의 몫이 아닌 것이다.
‘성소수자도 함께 하는 성평등’은 성평등의 주체를 다양하게 열거하는 수준에 그치지 않는다. 혐오세력의 더러운 커넥션에 대항해 더 질척거리고 단단한 커넥션이 필요하다. 성소수자 혐오가 반성폭력 운동의 위기라고 생각하거나 성소수자 혐오가 성평등 교육의 위기라고 생각하거나 성소수자 혐오가 직장에서 가정에서, 학교에서의 성차별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고 이야기하자. 3월 8일 말고도 많은 날들을 여성으로서, ‘여성’과 싸워가면서 살아가기 위해서 지치지 말고 분탕질을 치자. 우리를 자꾸만 아래로 끌어내리는 혐오의 에스컬레이터에 떠밀려가지 않도록.
*퀴여네는 2015년 “나는 여성이 아닙니까” 축제 기획단이 중심이 되어 만들어진 단체다. 퀴여네는 퀴어여성네트워크의 약자로써, 여성의 범주란 무엇인지, 그리고 성소수자와 여성의 교차성은 무엇인지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것을 목표로 하기 위해 만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