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성인 활동/활동 평가

뜨거웠던 여름, 세달 간의 기록

행성인 2009. 10. 23. 17:13

 

  2006년부터 매년마다 개최해온 성소수자진보포럼은 동인련에서 계획되는 굵직한 프로그램들 중 하나이다. 포럼은 소규모의 토론들과 달리 성소수자와 관련된 다양한 이슈들을 많은 사람들과 나눌 수 있는 장으로 자리매김해왔다. 또한 기존의 활동들을 점검하면서 동인련의 정체성이나 활동방향에 대한 생각을 한번쯤 할 수 있게 되는 기회가 되어오기도 했다. 무엇보다 활동에 관심을 가져주는 새로운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자리라는 점에서 포럼은 동인련 활동에 중요한 행사이다. 


  이번 여름에도 성소수자진보포럼이 있었다. 이번에는 세 달에 걸쳐 매달 하루씩 하나 내지 두개의 주제를 가지고 토론하는 방식으로 진행했다. 세 번으로 나뉜 포럼이라 계산해보면, 홍보도 세 번씩, 장소섭외도 세 번씩 해야 된다. (물론, 뒤풀이도 세 번씩 했다.) 한번에 끝내면 좋으련만, 준비기간이 길지 않은 상황에서 생산적인 이야기들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라면 이렇게 나눠서 준비하고 진행하는 것이 나쁜 방법 같지만은 않다.


 하여 이번 포럼에는 네 가지 주제를 정했다. 주제들은 아래와 같다.


- 스톤월항쟁을 기억하자! 40년 전 성소수자, 어떻게 거리로 나왔을까

- 더 나은 삶을 위한 쟁점토론 청소년성소수자를 향한 학교에서의 혐오와 폭력,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 더 나은 삶을 위한 쟁점토론 성소수자차별금지법 제정, 필요성과 가능성에 대해

- 연대, 변화의 바람이 불다 여섯 활동가에게 듣는 성소수자 운동과의 연대


  7월 첫 주에는 동인련 활동가 나라님의 발제로 스톤월 항쟁 이후 운동의 역사를 들었다. 스톤월항쟁 40주년을 기념하며 마련한 주제의 토론이었다. 참석자들은 사진자료들과 함께 당시의 상황들을 들을 수 있었으며, 이후 조직화된 운동과 그 효과, 한계를 논의했다.

  무엇보다도 기억에 남았던 것은 스톤월 항쟁의 당시 상황이었다. 애초에 스톤월 항쟁은 조직된 활동가들의 투쟁이 아니었다. 그리고 거창한 구호 같은 것도 없었다. 투쟁은 일상의 생활 속에서, 성소수자를 차별하고 억압하는 상황으로부터 출발했던 것이다.

  여느 이반바와 다름없었던 스톤월 인(Stonewall Inn)에서 동성애자들은 연행되는 동료들을 보면서 환호와 격려를 해주고, 연행되는 와중에도 그들은 흡사 레드카펫을 밟듯 온갖 끼와 교태를 부렸다고 한다. 거기다 경찰들에게 기갈을 부리며 분노를 표시했다고 한다. 우리도 집회에 나가면 각 잡히고 의미심장한 구호와 노래들 속에서도 상큼하고 끼스러운 구호와 선전물들을 만들어냈는데 말이다. 누군가의 말마따나 " I'm gay, You are gay, We are gay!"인 걸까?


  두 번째 포럼은 8월 첫 주에 있었다. 삼복더위가 정점에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50명에 가까운 참석자들이 함께했다. 냉방은커녕 선풍기하나 없던 열악한 강의실에서 주제를 두개씩이나 잡았던 포럼인지라 ‘열기’하나는 끝내줬던 자리였다. 게다가 이 때부터 토론자 수의 압박이 조금씩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 첫 번째 주제였던 ‘청소년성소수자를 향한 학교에서의 혐오와 폭력,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토론에는 인권교육센터 들의 민진님,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 퀴어뱅의 잘해보지님, 청소년성소수자커뮤니티 라틴의 찌난님, 동성애자인권연대 청소년자긍심팀의 은찬님이 함께했다. 인권단체부터 청소년성소수자커뮤니티, 청소년 활동가까지 골고루 섭외한 덕에 청소년 문제에 관한 포괄적인 문제부터 청소년 자신들의 구체적인 경험들까지 골고루 들을 수 있었다.

  특히 이번 토론에 주목한 것은 청소년 문제 중에서도 학교와 관련된 것들이었다. 토론자들은 학교의 발생부터 그 안에 있는 청소년의 위상을 얘기해주고, 그 중에서도 청소년 성소수자가 학교 안팎에서 겪는 문제들과 청소년 성소수자로서 활동해온 경험들을 들려주었다.


  다음은 성소수자차별금지법에 관한 토론이 있었다. 공익변호사 그룹 공감의 장서연님과 한국 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 대표 가람님, 동성애자인권연대 활동가 장병권님이 패널로 참여해 주셨다.

  참가자들은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토론자들에게 성소수자차별금지법 제정에 대한 다각도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차별금지법의 법적인 정당성에 관한 논의와 어떻게 설득해나갈 수 있는지, 그리고 성소수자들에게 차별금지법이 왜 필요한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성소수자차별금지법’이라는 화두가 다소 낯설게 들려질 지도 모르겠지만,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은 추상적인 개념이 절대로 아니다. 성소수자로서 가족구성권을 인정받지 못하고, 아웃팅 당할 경우 사회와 가정으로부터 소외와 편견의 낙인을 찍히는 것은 여전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차별은 일상생활 구석구석에 찌든 때처럼 껴 있다.

  성소수자차별금지법은 현재 틀이 잡혀있기 보다는 수면 위로 떠오르는 문제이다. 그래서 이번 주제에서는 구체적인 실천 안들을 내놓기보다는 문제의식들을 공유하고 확인할 수 있는 자리라는 데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 같다. 한편으로는 ‘우리가 그 법안을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로 운동이 성장했구나’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처럼 두 번째 포럼은 살짝 고무되는 감정과 함께, 이후의 과제들을 남겨놓았다.


  세 번째 포럼은 날짜가 미뤄져 9월의 마지막 토요일에 있었다. 주제는 연대였다. 주제가 주제인 만큼 패널들도 자리를 꽉 채웠다. 패널이 많으면 시간분배가 쉽지 않을 텐데, 대체로 시간분배도 잘 되었다. 요즘 개인적인 관심을 가지는 주제이기도 하지만, 최근에 있던 포럼인지라 기억은 제일 많이 남는다.

  포럼에는 청소년인권활동가네트워크의 공현님, 인권운동사랑방의 명숙님, HIV/AIDS인권연대 나누리+의 변진옥님, 한국기독교청년학생연합회의 신하나님, 서울경기인천이주노동자 노동조합의 이정원님, 동성애자인권연대의 정욜님 등 평소에 동인련과 연대하면서 많은 활동을 같이했던 단체들을 섭외한 것 같다. 토론자들은 자신의 활동경험과 함께 연대를 하며 부딪친 문제와 각자가 생각하는 연대에 대한 이야기들을 공유했다.

  일상적인 상황에서 우리가 체감하는 차별은 복합적이다. 동성애자라고 해서 동성애에 대한 차별만 받는 건 아닌 것처럼, 우리들은 비정규직/백수로서, 이주노동자로서, 청소년으로서, 감염인으로서 차별받을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차별에 대한 저항의 목소리가 단지 나를 둘러싸고 있는 정체성 안으로만 맴돈다면 그건 외부에 대해 벽을 두르고 다른 소외를 만들어내는 데 지나지 않는다.

  바로 여기서 필요한 것이 연대라고 하는 점이 마지막 토론에서 공유하는 주제였다.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연대의 정치는 ‘나만 잘살자는 마인드로는 아무것도 못한다.’는 심오한 이야기가 뼈를 이루고 있다. 우리는 연대를 통해 다른 사람을 생각하고, 연대를 통해 내 안에 있는 편견을 깰 수 있으며, 보다 넓은 관점에서 세상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분들이 참석하게 되다보니 포럼은 어느새 연대활동의 장이 되어있었다. 특히 HIV/AIDS인권운동과 이주노동자운동 분야의 토론자들이 토론진행과 별개로 즉석에서 연대활동을 기약한 부분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이주노동자에 대한 외부의 시선은 HIV/AIDS를 퍼뜨리는 존재라는 편견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고 ‘우리는 주범이 아니다!’라는 소극적인 수준의 방어에 그칠 것이 아니라, 이주노동자, 성소수자, 비정규직 할 것 없이 ‘We are positive’라고 말하는 적극적인 방향전환은 소수자운동을 연대의 매듭을 통해 효과적으로 이끌어내는 지점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기나긴 포럼이 끝났다. 스톤월항쟁 이후부터 성소수자 운동의 역사를, 현재 한국사회에서 화두가 되고 있는 성소수자 이슈에서 나아가 앞으로 나아갈 연대의 방향까지 논의했다. 과거-현재-미래의 삼박자가 들어맞는 내용의 구성은 동인련의 활동에 대한 지평을 넓혀보자는 의도라고 생각해도 무방할 듯하다.


  포럼을 준비하면서 직면했던 가장 큰 문제는 장소섭외가 아니었나싶다. 간격을 두면서 개최하다보니 매번 장소섭외를 해야 하는 문제는 피할 수 없었던 난관이었다. 초반에 준비팀들은 세 번의 포럼을 모두 한 장소에서 개최하기로 계획했다. 하지만 외부의 공간을 세 번에 걸쳐 빌리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포럼준비를 하면서 장소섭외의 문제는 항상 따라다녔고, 포럼 몇 주 전에 장소가 섭외되기도 하여 홍보에 차질을 빚기도 했다. 안정적인 장소선점은 이후의 활동들을 위해서 매우 중요한 과제일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포럼의 진행이 한 달에 한번씩 걸치는지라 포럼과 포럼 사이의 시간동안 흐름이 다소 늘어지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포럼이 하나씩 끝날 때마다 그때그때 평가를 했지만, 그것과 더불어 세 달 동안의 이야기들을 하나의 큰 틀로 묶어 정리하고 평가하는 작업들도 필요하다.

 

  포럼에는 활동가와 동인련회원 뿐 아니라 타 단체 활동가들, 개별적으로 참석한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질의응답시간에는 모두들 적극적인 참여를 통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그 중에는 기존에 나왔던 질문들이 반복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분명 크고 작은 차이들을 감지하게 된다. 매 회 포럼을 치를 때마다 등장하는 진부한 질문들에도 이전과는 다른 대답을 내놓을 수 있게 된 것은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사소하지만 분명 중요한 변화이다.

 

  한편 질문들 중에서는 자신의 경험에 입각하여 활동가들의 경험들을 듣고자 하는 질문들이 많이 나왔다. 가령 성소수자로서 기독교신자로서의 경험, 청소년 성소수자로 살아가는 예들이나 활동의 경험까지 말이다.

  포럼에 참석한 후배 하나는 “성소수자로서 자신의 문제의식을 ‘왜’ 현실의 실천으로 옮겨야 하는 것일까” 에 대한 답을 내게 구하기도 했다. 단순하지만 쉽지 않은 질문이다. 이전부터 여러 사람들을 통해 “운동, 그거 해서 뭐가 바뀌나.” 라는 말은 수차례 들어올 때마다 매번 부딪히는 게 귀찮아서 그냥 지나치고 말았지만, 회의와 질문들은 한동안 나의 고민거리가 되었다. (그렇다고 내가 활동을 열심히 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누구나 일상 속에서 성소수자로 살면서 문제들에 직면하지만, 그걸 당장 행동으로 옮기기에는 주저하게 된다. 하지만 실천이라는 건 무조건 큰 뜻을 필요로 하는 건 아니다. 부담을 갖거나 거리를 둘 문제는 더더욱 아니다.

  더불어 꾸준한 관심과 활동을 통해 많은 사람들을 만나며 넓은 안목을 갖고 보다 적극적인 실천들을 계획할 수 있었던 우리의 경험들을 비춰보면, 운동의 성패에 전적으로 기대어 회의감을 가질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이번 포럼 또한 활동의 연장선상에 있음을 기억하며, 앞으로의 활동들을 기약해본다.


동시신호_동성애자인권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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