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6 헌재 판결에 부쳐 - 상임활동가들의 말말말
행성인 사무국
편집자 주
이번 군형법 제92조의6 추행죄와 에이즈예방법 19조 전파매개행위죄에 대한 헌재 판결과 관련해서 행성인을 비롯한 많은 단체들에서 성명과 논평이 나왔습니다. 하지만 관련 의제를 오랜 시간 다뤄오거나 함께 연대해온 활동가들은 단체의 대외적인 목소리와는 다른 결의 감상과 평가가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하여 행성인 미디어TF에서는 이번 판결과 관련한 활동해온 사무국 활동가들의 개인적 감상과 평가, 과제에 대한 귀하의 의견을 설문으로 묻고, 두 명의 활동가에게 응답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성명에서 다 나누지 못한 회포와 감정을 웹진에 실어 나누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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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합헌 판결 이후 무려 7년 뒤 판결이었다. 그 사이 운동도 성장했고 성소수자 인권과 관련한 사회적 분위기도 많이 바뀌었다고 본다. 군형법 제92조의6의 경우 공개변론 없이 바로 이루어진 선고라 다소 불안하긴 했지만, 이미 네 번째 선고였고, 그 사이 운동에서 끊임없이 위헌성을 주장하며 의견을 내왔기에 충분히 위헌도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에이즈예방법 19조 또한 과학적 사실이 너무나 분명했고, 공개변론 때 분위기도 나쁘지 않았다고 들어서 군형법 보다도 더 위헌 가능성을 점치기도 했다.
재판장 안에서 직접 선고 결과를 들었다. 재판관이 말하는 합헌 요지가 너무나도 한심하게 느껴졌다. 헌재에 분노가 치솟았다. 어떻게 저런 사람들이 재판관으로 있지? 헌재의 수준이 너무 떨어져 보였다.
군형법 제92조의6은 내가 2013년에 처음 행성인 활동을 시작할 때부터 접한 의제이다. 거리 캠페인에 함께하며 홍대에서 일반 시민들을 대상으로 폐지 서명을 받기도 하고, 종로 술집을 돌며 성소수자들을 대상으로 서명을 받기도 했다. 첫 캠페인 경험이었기에 더 기억에 남는다. 처음으로 밀도 있게 접한 의제이기도 하고, 군성넷에서 활동하고 있어서 그런지 이번 두 개의 선고 결과 중 군형법 합헌 선고가 더욱 쓰라리게 다가온다. 이번이 벌써 네 번째 합헌이기도 하고...
그래도 위헌 의견은 괜찮았다. 군형법의 경우 2016년에만 하더라도 언급조차 없었던 평등 원칙 위반에 대해 다루었고, 19조의 경우에는 심지어 합헌 의견조차 U=U 를 받아들였다. 분명한 진전이고, 성과이다. 어쨌든 조항들의 위헌성은 또다시 확실하게 확인했으니 두 조항의 무용론을 펼치며 운동을 이어가야 하겠으나, 다만 군성넷 활동가로서 한 번 일단락된 군형법 의제 운동을 다시 어떤 방식으로 전개해나가야 할지 다소 막막하기는 하다. 군성넷 활동가들과 세밀한 논의가 필요해보인다.
오소리(군 관련 성소수자 인권침해 · 차별 신고 및 지원을 위한 네트워크)
갑작스런 헌법재판소의 판결 예고 소식을 접하면서 살짝 피로감이 몰렸다. 내년에나 나오겠다고 생각했는데, 대응 성명을 준비해야겠구나 생각했다. 보통 이런 상황이면 몇 가지 경우의 수를 준비해야 한다. 합헌과 위헌, 그리고 헌법불합치까지 성명서 초안도 3종으로. 갑작스런 만큼 일정까지 겹쳐 HIV/AIDS 네트워크 대응회의에 참여를 못했다. 대응 논의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는데 동료 활동가들은 바득바득 3종 성명을 준비하고 결과에 따른 대응 논의까지 마쳤다.
결과를 듣고 행성인 성명서를 내기 직전까지 고민했다. 헌재를 규탄해야 할까, 아니면 긍정적인 해석을 부각해야 할까. 성명의 톤을 잡는 건 의외로 중요하다. 대외적으로 운동의 즉각적인 태도를 보이고 향후 방향성을 제시하는 것 너머 커뮤니티분위기도 좌우할 수 있기에 초반에 잡아둬야 한다는 것인데, 사실 커뮤니티의 반응보다는 그간 대응해온 활동가들이 어떤 결과든 확신을 가지고 응하는게 우선이지 싶다. 너무 규탄만 하면 막연하고 무력하게 보일 여지를 주지만, 그렇다고 긍정회로만 돌리면 공허한 정신승리의 인상을 주기 쉽다. 행성인은 위헌성의 의미를 확인했다는 변화를 짚으면서도 규탄할 부분은 규탄하자고 했다. 다른 단체들의 후속 성명과 논평을 보니 결과를 아쉬워하면서도 판결문에서 위헌성을 인지한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19조의 경우에는 위헌에 손을 들어준 법관들이 더 많으므로 첫 판결임을 고려하면 의의가 크다는 평가들이 많다. 제목은 다르지만 논조는 대동소이하다.
추행죄와 전파매개행위죄는 20년 가까이 대응 운동이 있었다. 매번 낙담하면서도 희망을 찾는 건 활동가 특 아닌가 싶다. 다만 지금의 짜증과 피로의 기분을 확실히 해둘 필요는 있다. 이건 무력함보다는 아쉬움이다. 그간 성소수자 인권운동은 해당 조항들이 얼마만큼 성소수자 군인과 HIV의 권리를 박탈해왔는지, 공동체의 신뢰와 친밀함을 해쳐왔는지 이야기해왔다. 위헌성을 이야기할 수 있는 근거는 충분히 있었기에 무력함을 느낄 필요는 없었다. 헌법재판소는 이를 인정하면서도 통념을 따랐고, 우리는 그들이 얼마나 무책임한 판결을 했는지 이야기할 수 있다. 판결이 갖는 기회비용의 무게는 생각보다 훨씬 무겁다. 이전과 다른 평가를 남기고 감정을 가질 수 있는 것 또한 운동의 성과라면 성과다.
U=U가 대중사회에 좀 더 알려지고, 19조의 쓰임이 질병 예방에 그리 도움이 되지 않는 방향으로 쓰이고 있음을 확인하면 할수록 전파매개행위죄는 그 위헌성이 더 두드러질 것이다. 기실 19조는 관계 안에서 상대가 질병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당신의 활동을 금해야 한다는 응징과 보복의 도구이자 명분으로 동원되는 경우가 많다. 예방은 모르겠고 공동체의 관계들만 망가뜨리는 법이다. 추행죄 또한 위헌성이 입증된 상황에서 지난 육군 동성애자 색출사건과 같은 일의 명분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이 나라는 어차피 사라질 법을 오래도 붙잡고 있다. 헌재판결이 나온 이후, 우리는 만남도 넓히고 할얘기도 만들어야겠지만 그 방식이 꼭 19조와 추행죄만 가지고 이야기하지는 않을 것 같다.
남웅 (HIV/AIDS인권활동가네트워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