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추모주간 기획] 행성인 기억모임
남웅 (행성인 미디어T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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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4월 16일 여러분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기억하나요? 라는 질문에서, 묻고싶은 건 무엇을 했는가보다도 기억여부에 있다.
당시 난 뭘했지? 홍대에 있던 행성인 사무실에 있었다. 제 2회 육우당문학상 2차 심사를 진행중이었고, 소설가 김비 님과 송경동 시인님, 조이여울 기자님을 심사위원으로 한자리에 모시고 작품들을 이야기나눴다. 심사가 끝나고 두리반에서 식사를 하면서 배가 침몰했다는 뉴스를 봤고, 그때만 해도 그 순간이 지금까지 생생하게 각인될 줄은 몰랐다.
세월호참사 10주기 옴니버스 다큐멘터리 《세 가지 안부》 중 주현숙 감독의 〈그레이존〉에 인터뷰이로 등장한 기자와 언론인들도 비슷한 경험을 이야기한다. 누군가는 이날 먹은 점심 메뉴까지 기억한다는데 남의 일이 아니다. 강렬하게 침투해온 현상이 계속해서 플래시백 되는 건, 찾아보니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의 대표적인 증상이라고 한다. 언론을 통해 재난이 알려지면서, 동시에 언론을 통해 재난의 정황이 방치되고 조작되었음을 알게 되면서 4월 16일은 한국사회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세월호'로 각인되고, 노란색부터 떠오르게 만드는 집단적 상흔으로 남았다.
아니 어쩌면, 노란색을 지금까지 떠올리게 된 건 재난 이후 세월호를 바득바득 기억해내고자 하는 이들이 있기에 가능했다고 다시 써야 할지 모른다. 앞서 재난 '이후'를 말했지만, 실상 강렬한 경험은 4월 16일 이후 쭉 이어졌다. 진상조사와 정부의 책임을 묻기 위해 몇 달이고 거리에 나온 유가족과 시민들은 대로를 점거하고 국토를 종단했다. 경찰은 최루액이 섞인 물대포를 뿌렸고, 2016년에는 물대포에 백남기농민이 맞아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밤중에 촛불을 들고 나온 시간은 같은 해 끄트머리 즈음 국정농단으로 박근혜 퇴진을 외치는 행진까지 이어졌다. 공동이 만들어낸 기억의 시간들은 어떤 변화를 가져왔을까. 여전히 안전에 대한 책임이 개인을 향해 지워지는 상황 속에 국가의 책임을 묻는다. 대체 무엇이 바뀌었냐고 한탄하면서 우리는 2022년 이태원참사를 겪었다. 유감스럽게도 10월 29일의 기억 또한 너무 구석구석 선명하게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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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성인은 육우당 20주기 즈음부터 추모주간 앞에 '육우당'을 잘 붙이지 않는다. 그의 아호가 갖는 상징적인 의미는 다른 곳에서 그 의미를 확장하는게 맞겠다는 판단이 하나가 들고, 다른 하나는 행성인이 기억하는 다른 얼굴들도 가까이서 볼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4월 26일 행성인은 《세 가지 안부》 공동체상영회를 가졌고, 같은 날 대학로에서는 무지개예수 주최로 '청소년 성소수자 기독인 故 육우당 21주기 혐오와 차별에 희생된 벗들을 추모하는 기도회'가 열렸다. 천주교도였던 육우당이 생전 기독교에 큰 실망을 했던 점을 기억하면 종교계에서 그를 계속 언급하고 '육우당'을 앞에 달아 기도회를 매년 진행하는 것이 감사한 일이다. 같은 날 서울시의회는 서울 학생인권조례 폐지안을 의결했다. 이 날은 육우당 기일이다.
학생 인권이 선생의 '교권'을 위축시킨다는 논리는, 학생과 교사의 권리를 상정하고 제로섬게임처럼 저울질하는 얄팍한 계산 아닌가. 이해할 수 없는 건 권리의 책임을 개인에게 떠넘기고, 인권을 정치공학적으로 치부하면서 국가와 학교는 책임은 방관한 채 그저 위에서 저울질하며 판단하는 역할만 하고 있다는 점이다. 재난을 접할 때면 항상 대면하는 기시감 같은 것들이 있는데, 이 패턴이 기억에 계속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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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도 어김없이 추모테이블을 꾸렸다. 이전 교육장보다 좁아진 새 사무실에서 유품까지 꺼내기는 어려웠고, 사진들만 꺼내 공간 한쪽에 전시했다. 몇몇 사진들은 너무 커서 앞으로 누가 떠나거든 사진은 작은 사이즈로 뽑자는 이상한 농담을 주고받았다.
기일 다음날 '기억모임'을 진행했다. 행성인뿐 아니라 운동의 역사는 사람들의 얼굴보다는 깃발의 행렬로, 또는 대표성 있는 활동가의 얼굴들로 채워지기 쉬운데, 떠난 이들을 이야기하는 자리가 역사의 빈틈을 채우지는 못할 망정 적어도 더듬을 수는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여는 행사다. 무엇보다 최근에 활동에 관심을 갖고 단체에 찾아오는 이들은 사진 속 얼굴을 모르기가 쉽다. 거꾸로 오래된 회원들은 근래 자리를 채운 이들의 얼굴이 낯설다. 하기에 행성인의 기억 모임은 의무나 부채 여부를 떠나 회원모임 번외편, 혹은 회원모임 저세상 편 정도로 꾸린다.
매년 추모테이블을 설치하고 행사를 준비하면서 개인이 맺은 친밀함의 관계와 소소한 활동들이 퀴어 커뮤니티를 일구고 성소수자 운동의 역사를 만들어왔음을 체감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당신의 삶이 그저 운동만으로 채워진 것은 아님을, 행성인도 당신을 활동해온 유닛 정도로만 생각하지 않음을, 당신이 남긴 공적이 애도의 무게와 비례할 수는 없음을, 해서 공적인 애도 한편에 사적인 기억 또한 품고 나누기를, 어쩌면 그 과정에 내려놓을 것은 내려 놓는 것 또한 미덕일 수 있음을 잊지 않는다.
어떤 기억은 트라우마처럼 집단에게 체화되고, 어떤 애도는 국가의 책임을 물을 만큼 중대한 구조적 결함 위에 투쟁으로 이뤄진다. 하지만 그 아래에는 잊히기 쉽고 굳이 밖에 꺼내지 않는 사사로운 감정과 만남이 있고, 기억될 자격을 물을 만큼 과오를 남긴 이들도 있다. 그런 점에 추모테이블은 공적인 시간만을 기리거나 과거를 지향할 수 없다. 과거의 시간을 현재에 다시 살피며 태도를 다잡는 시간, 우리의 역사에 공적인 투쟁 외에도 사적인 관계들이 명멸하며 얽히고, 과오를 어떻게 기억하거나 묻어둘 것인가를 따지는 자리는 올해도 내년에도 계속할 수밖에 없다. 추모테이블은 다분히 현재적이고 윤리적인 역동성을 갖는다.
다만 느슨하게 완급을 조절하면서...이번 기억모임에도 특별한 프로그램을 기획하지는 않았다. 매년 신청하고 찾아오는 사람들에 맞춰 조금씩 다르게 이야기를 풀어내는데, 올해에는 참여한 이들에게 추모테이블에 있는 동료를 다른 참여자들에게 소개해주십사 요청하고 함께해온 경험을 나눴다. 생전의 바람과 사사로이 나눈 대화가 어떻게 지금의 자신을 만들었는지도 이야기나눴다. 모르면 모르는 대로 궁금한 이들을 소개해달라 청하는 자리도 가졌다. 그냥 보내기는 아쉬워서 종이와 펜을 나눠주고 이들에게 남길 수 있는 문장을 써보자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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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반의 몇 시간을 제하면 기억모임은 여느 친밀한 자리들과 다르지 않게 지나갔다. 추억을 이야기하고, 자리에 나온 이들의 근황을 묻고, 최근 뉴스들을 이야기하고.
더 이상 추모테이블에 갑작스럽게 자리를 채우는 일이 없기를 바라지만, 한편으로는 앞으로 어떻게 기억의 자리를 만들어갈지 고민도 든다. 나처럼 단체에 오랜 시간 머물면서 두루 알고 있는 이들이 없는 상황이라면, 낯선 얼굴을 대면하면서 단체의 역사과 개인의 시간을 연결할 수 있는 자리를 어떻게 지속할 수 있을까. 꼭 그들의 구체적인 생애를 아는 것이 추모의 방식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단체의 역사를 말하기 위해서 친밀함의 궤적은 무시할 수 없다. 그것이 성소수자 운동에 필수적으로 수반되어야 하는 활동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적어도 가벼운 기억의 모임들이 행성인의 역사, 성소수자 인권운동의 시간은 어떻게 기억해야 하는가의 고민에 연결되어 있음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과음으로 정신이 흩어지기 전에 자리를 파하고 돌아오는 길에 잠깐 생각에 잠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