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적지향 · 성별정체성/트랜스젠더

[회원 에세이] 트랜스혐오x여성혐오= ?

행성인 2024. 5. 26. 19:28

연수(행성인 트랜스젠더퀴어 인권팀)
 
 
나는 바이너리 트랜스여성이다. 트랜스젠더인데 여성이고, 여성인데 트랜스젠더인 것이다. 이 복잡미묘한 위치성 때문에 사는게 지루할 틈이 없다. 정말이지 너무나 많은 일을 겪으며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따로 브런치 글을 쓰고 있기는 하지만 여기서도 조금 풀어보고자 한다. 마침 국제 성소수자 혐오 반대의 날(IDAHOT)이 있는 달이기도 하니, 나는 트랜스여성혐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1. 시스남성집단의 트랜스여성혐오
 
다들 알다시피 시스(헤테로)남성 집단이 여성·소수자에 대한 혐오가 가장 극심하다. 트랜스여성에 대해서는 어떨까? 그들은 트랜스여성을 여성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트랜스여성이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그들에게 트랜스여성은 여장남자에 불과하다. 이 여장남자는 남자로 태어난 주제에 여자행세를 하는 역겹고 혐오스러운 존재이다. 주류 남성성을 수행하지 않는 지정성별남성에 대한 혐오라는 점에서 게이혐오와 궤를 같이한다. 또한 여성성을 수행하는 사람에 대한 혐오라는 점에서 여성혐오이기도 하다. 예를들어 트랜스여성 방송인에 대해 ‘저렇게 뚱뚱한게 무슨 여자냐, 똥꼬충 역겹다’는 식의 악플들이 달리는데 이건 게이혐오+여성혐오인 것이다. 트랜스여성은 이렇게 교차적인 억압을 받는 위치에 놓여있다.
 
 
2. 시스여성집단의 트랜스여성혐오
 
시스여성집단은 어떨까? 남성집단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나아보일 수는 있다. 여성에 대한 차별이 극심한 사회이다 보니 여성들은 남성들에 비해 여성,노동자,아동,노인,장애인,동성애자 등 소수자에 대한 감수성이 상대적으로 높긴하다. 단, 트랜스여성에 대해서는 예외다. 시스여성들에게 있어서 트랜스여성은 여성도 아니고 소수자도 아니다. 그저 우스꽝스럽게 과도한 여성성을 수행하는 여장남자일 뿐이다. 그들이 떠올리는 ‘여장남자’는 주로 젠더바 같은 유흥업소에서 일하는 트랜스여성들이다. 주변에서 직접 접할 일은 많지 않으니 아마 미디어의 영향이 클 것이다. 시스여성들에게 그런 트랜스여성은 여성이 아니라 잘 쳐줘봐야 제3의 성일 뿐이다.
 
그러한 시스여성들의 트랜스여성에 대한 인식은, 2016년 이후에 아주 큰 전환을 맞이했다.
 
 

모두에게 완자가 – 82화 댓글

 
 
<모두에게 완자가> 라는 레즈비언 일상 웹툰이 있다. 주제 특성상 독자들은 대부분 시스여성들인데, 트랜스젠더 편에 대한 댓글이 2016년 전후로 크게 차이가 있다. 트랜스여성에 대해 ‘잘은 모르지만 괴로울 것 같다’는 동정적인 시선이, ‘꾸미는거 좋아한다고 어떻게 여자냐’ 라는 적대적인 시선으로 바뀌었다. 어쩌다 이런 변화가 생기게 된 걸까?
 
2016년은 대한민국 페미니즘 운동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사건이 일어난 해였다. 바로 강남역 여성혐오살인사건. 남성이었던 범인은 남자들이 모두 지나가기를 기다렸다가 여자를 표적으로 삼아서 죽였고, 실제로도 범행 동기를 ‘여자들이 나를 무시해서’라고 진술하기도 했다. 이에 여성들은 ‘여자라서 죽었다’라는 구호를 내걸고 온·오프라인에서 강하게 결집하기 시작했다. (나를 포함한)많은 2030 여성들이 이 시기에 페미니스트가 되었고, 한국 사회에서 페미니즘 운동이 크게 대중화 되었다. 페미니즘 리부트의 운동적 의의와 긍정적 효과는 많겠지만 모든 운동이 그러하듯 한계도 역시 존재했다. 여성의 안전을 – 물론 너무나 중요하다 - 너무 강조한 나머지 여성의 존재를 피해자의 위치로만 환원시키는 것과, (트위터 등의)온라인 공간에서 간결하고 직관적인 메시지를 내세우는걸 중시하다보니 여성간의 차이를 지우고 여성을 단일한 존재로 상정한 것, 이 두 가지 지점에서의 한계가 컸다고 생각한다. 그 결과로 페미니즘적 구호를 내세우는 것에 방해된다고 여겨지는 여성들은 페미니스트가 될 자격이 없다고 여겨졌고, 더 나아가 ‘가부장제의 부역자’라고 비난을 받기도 했다. 전통적인 여성성(꾸밈노동,돌봄노동,감정노동 등)을 수행하는 여자들이 주로 그 비난의 표적이 되었다. 이렇게 시스여성들조차 어떤 범주에서 탈락하는 마당에 트랜스여성이 살아남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트랜스여성은 여성인권의 주적이 되었다. 여성들은 가부장제가 강요하는 여성성 수행을 거부하려고 하는데, 트랜스젠더들은 오히려 그걸 적극적으로 수행함으로써 여성에 대한 고정관념을 강화시킨다는게 그 이유다. 여기에 앞에서 언급한 두 가지 한계점과 맞물리면서, 트랜스여성은 ‘생물학적 여성’의 ‘안전’을 위협하는 존재라는 공포가 빠르게 확산되었다. 남성들이 트랜스여성을 ‘남자처럼 살지않는 남자’로 취급하며 조롱하는 것과는 반대로 여성들은 트랜스여성을 너무나 ‘남자같은’ 존재로 묘사한다. 어쨌든 시스남성집단이나 시스여성집단이나 트랜스젠더는 혐오의 대상인 것이다.
 
 
3. 페미니즘 진영에서의 트랜스여성혐오
 
나 역시도 페미니즘 리부트 시기에 페미니스트가 되어서 지금까지 페미니즘 운동을 해오고 있다. 시스젠더여성들이 주류인 곳에서 트랜스여성인 나의 위치는 어디일까, 내가 발딛고 있는 곳을 자주 내려다보게 된다. 페미니즘이라는게 오랜 역사와 다양한 갈래가 있다고 하지만, 나에게는 결국 트랜스젠더를 포함하느냐(교차성) 마느냐(래디컬)의 차이가 제일 중요했다. 교차성 진영과 래디컬 진영 사이에서는 트랜스젠더가 항상 가장 뜨겁고 치열한 주제였다. 누군가는 페미니즘의 이름으로 온갖 트랜스혐오적인 말들을 내뱉었고, 누군가는 페미니즘의 이름으로 그 혐오를 비판했다. 개인간의 단순한 언쟁을 넘어서 단체끼리 입장문을 내고 분열하기까지하는 사태도 일어났다. 트랜스혐오에 대해 비판하고 대항했던 비(非)트랜스 페미니스트들도 물론 마음고생이 많았겠지만, 가장 고통받고 상처받았던건 역시나 트랜스 당사자들이다. 온라인 공간에서는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는 이들이 몰려다니며 온갖 트랜스혐오표현을 쏟아내는 덕분에 많은 트랜스젠더들은 페미니즘에 강력한 반감을 갖게 되었고, 심지어 어떤 트랜스 커뮤니티는 한시적으로 ‘지정성별 여성’의 가입을 제한시키기도 하였다.
 
나 역시도 교류하던 페미니스트들에게 사이버불링을 당한 적이 있다. 정체성을 드러내지 않은채로 페미니즘 얘기만 할 때는 분명 ‘옳은 말 한다’고 환호하던 사람들이, 내가 트랜스여성이라는 정체성을 밝히자 돌변해서는 조롱과 비난을 쏟아내거나 그냥 ‘치마입는 남자’ 하면 안되냐고 친절하게(?) 설득을 하려고 했다. 개중에는 내가 페미니즘 의제로 1인시위 했을 때 고생한다며 커피를 주고 갔던 사람도 있었다. 그 때의 그 배신감이란.
 
그렇지만 사이버불링의 정도가 수십명 대의 불과한 나 정도면 운이 좋은 편이었다. 트랜스젠더 만화를 그렸던 트랜스여성인 내 지인은 트위터에서 수천 명의 TERF들에게 조리돌림을 당했으며, 살해협박과 강간 사주 위협까지 겪으며 극심한 정신적 고통을 받았다. 그 지인은 페미니즘을 지지하는 편이지만, 그러한 경험으로 인해 시스여성들을 남성보다도 더 무서워하게 되었다.
 
나도 사실 여성혐오하는 남자들보다 트랜스혐오하는 페미니스트들이 더 무섭다. 물리적 위험의 정도야 당연히 남자들이 훨씬 높겠지만, 존재를 부정당하는 고통을 생각한다면 차라리 얻어맞거나 강간당하는게 낫다고 느껴지기도 한다. 그리고 여성혐오하는 남자들은 여성뿐만 아니라 다른 소수자들도 혐오하지만 TERF들은 성별,인종,장애,국적,종교,성적 지향 등에 따른 모든 차별은 반대해도 ‘성별정체성’ 항목 만큼은 그 차별 금지사유에 들어가면 안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다. 소수자 중에서도 트랜스젠더만을 배제하는 것이다. 그래서 다른 혐오자들의 공격보다 TERF들의 공격이 유난히 더 고통스럽다.
 
나는 트랜스혐오 자체는 이제 별로 새롭지 않다. 혐오자들이 트랜스젠더를 모욕하고 조롱하려고 온갖 말들을 쏟아내지만 이미 다 최소 6969번씩은 들어본 것들이라, 아프긴 해도 특별히 더 괴롭진 않다. 나를 더 괴롭게 만드는건 내가 페미니즘 진영 안에서 겪는 고립감이다.
 
물론 트랜스젠더를 배제하지 않고 오히려 지지해주는 페미니스트들이 적은건 아니다. 그런 분들에겐 항상 고마운 마음이다. 하지만 내가 느끼는건 개인에 대한게 아니라 구조에 대한 것이다. 페미니즘에서 말하는 ‘여성’에, 트랜스여성인 내가 포함되어 있을까하는 의구심이 항상 있다. 한 명씩 붙잡고 “트랜스여성도 여성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라고 물어보면 당연히 당연하다는 대답이 돌아오긴 하겠다만. (시스)여성이 겪는 성차별이나 성폭력에는 분노하면서 (트랜스)여성혐오에는 시큰둥한 반응을 접할 때마다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아, 나만 ‘우리’ 였나? 나는 여기서 ‘여성’이 아니었나?”
 
 
4. 결론
 
그래서 결론이 뭐냐고? 다시 제목으로 가보자. 내가 하고싶은 말은 ‘트랜스혐오 x 여성혐오 = 트랜스여성혐오’ 라는 것이다. 이 수식을 거꾸로 하면 트랜스여성혐오는 트랜스혐오이기도 여성혐오이기도 하다는 뜻이 된다. 꼭 모든 인권을 ‘쓰까’먹지 않더라도, 그저 여성인권만을 위하고 싶다고해도 그 여성의 의미를 되짚어봤으면 좋겠다. 트랜스여성의 무엇을 공격한다면, 바로 그 무엇에서 시스여성도 자유로울 수 없다. 트랜스여성이 가진 어떠함 때문에 여성이 아니라고 한다면, 바로 그 어떠함 때문에 당신 또한 여성에서 탈락될 수 있다.
 
 
“트랜스여성은 여성이고 싶은 사람이 아니다. 여성이 되고싶은게 아니다. 잘못된 몸에서 태어난 것도 아니다. 뇌가 여성인 것도 아니다. 여성을 선망하거나 남성을 미워하는 것도 아니다. 여성이라고 느끼는 것도 아니다. 여성으로 돌아가고 싶은 것도 아니다. 그저 여성인데 다른 사람들이 남성이라고 헛소리를 하고 있을 뿐이다. 시스젠더여성과 같은 이유로 트랜스젠더 여성도 여성이다.”
 
출처: <가부장제 뒤의 혐오자들에게>, 쟁🌹☂️ 블로그, 당신들은 우리를 이해할 능력이 없다.

링크: https://kimzakga.postype.com/post/5789469

 

가부장제 뒤의 혐오자들에게.: 그들을 반박하고 비웃을 것이다.

*내가 같은 법적 성별과, 같은 생식기 상태와, 같은 외형을 가지고 여기 등장하는 모든 일화를 경험했을 것이라는 납작한사고는 지양해주기 바란다. 나는 트랜스젠더다. 나의 생식기도, 염색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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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llustration by Ashluka Draws



남성만 인간인게 아니듯이, 시스여성만 여성인게 아니다. 여성해방을 원한다면 트랜스여성을 놓쳐서는 안 된다. 트랜스여성에게 cis-ter가 아닌 sister가 되어주기를, 트랜스여성이 포함된 성평등을 함께 이뤄갈 수 있기를, 한 명의 평범한 트랜스여성인 내가 간곡히 부탁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