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27. 아이 손 잡고 달려! 퀴어퍼레이드
행성인의 오랜 회원인 여기동님이 필리핀에서 안부를 전합니다. 2015년 한국에서 결혼식을 하고 남편의 나라로 가서 살림을 꾸리는 여기동 님은 딸 '인보'를 입양하여 육아일기를 쓰고, 최근에는 성소수자 연구들을 리서치하며 공부에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 |
여기동(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요즈음 요 녀석: 눈치도 늘고 고래고래 소리도 지르고
아이가 세 살 하고도 두 달이 되었습니다. 요즘 요 녀석은 기억력, (엄마와 아빠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를 가려내는)눈치력, 조금씩 단어 수가 늘어나는 문장력 등에서 큰 변화를 보여줍니다.
지난 5월 아이의 생일 잔치를 마치고 떠나시는 할머니를 버스 터미널에서 배웅해 드렸어요. 이걸 기억하여 버스터미널을 지나갈 때 마다 ‘할머니 할머니 버스’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얼굴 표정이 보고싶다는 의미로 시무룩해져요. 저는 “할머니 또 오세요”라고 전화하자고 달랩니다.
눈치도 많이 늘었습니다. 자신이 한 행동으로 엄마와 아빠가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를 기똥차게 아는 겁니다. 자신이 실수 했다며 미안하다고 “쏘리”를 합니다(어떤 때는 전혀 미안한 기색도 없이, 아주 뻔뻔한 얼굴로 모르는 척). 그러면 저는 “괜찮아요”라고 응답하지요. 어려서부터 미안함을 표현하는 행동을 몸에 익혀 대인관계가 원만 해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 합니다. 정중한 미안함을 건네면 상대방이 화를 내지 않고 사과를 수용할 수 있기 때문 입니다. 제가 이 개념을 처음 접하게 된 계기는 미국에서 시작된 의료사고 분야의 운동인 Sorry Works 1를 통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요즘 저와 아이는 손가락으로 숫자 세는 연습을 하고 있습니다. 마트에 갈 때 누구랑 같이 가냐고 물으면 손가락 셋을 펼치고 “인보랑, 아빠랑, 엄마랑 같이”라고 답을 곧잘 합니다. 운동하러 공원 가는 길 주차장 바닥에 쓰인 숫자도 저와 함께 큰 소리로 읽어보곤 합니다.
정말이지 말하기도 아주 늘었습니다. 동요를 흥얼거리는가 하면 혼자 말로 고래고래 소리를 지릅니다. 상황이 생기면 조금씩 긴 문장으로 말하기를 가르치고 있습니다(저랑은 늘 한국말로 한답니다. 모국어로 말해야 가슴에 와 닿거든요).
아이와 새롭게 시작한 일은, 저녁 식사를 마치고 식탁에 앉아 공부하는 책놀이 입니다(내 새끼 공부하는 모습에 딸바보 아빠 찰스는 흐뭇흐뭇.) 3세 아동의 한글과 숫자 공부 책으로 색칠하기, 스티커 붙이기 놀이 입니다. 책놀이 중간 중간에 딴짓을 정말 많이 하지만 이 녀석 제가 하는 말을 다 들으면서 엉뚱한 말로 따라 합니다. 이럴 땐 정말 외계인 같아요. 아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스티커를 붙이기 입니다.
잔치, 잔치 열렸네: 퀴어퍼레이드
두마게티 시티로 이사온 지 3년만에 처음으로 퀴어퍼레이드에 참가했습니다.
사실 자긍심의 달 6월에 어떤 행사가 열리는지 인터넷으로 검색했는데 과거 행사만 있었습니다. 올해도 퀴퍼가 없나 보다 생각하고 접었습니다. 그런데 찰스씨가 라디오 뉴스를 듣더니 6월 30일에 열린다고 말하여 제 귀가 쫑긋했지요. 아싸~ 옆집 조안 이모와 우리 집 세 식구가 오전부터 준비하느라 야단 법석을 떨었습니다.
저는 행진할 때 들 피켓을 아이가 먹는 우유 박스를 뜯어 두 장 만들었습니다. 하나는 우리 부부의 소원이요 소원인 ‘(동성결혼 법제화를 원한다는 요구로) Marriage Equality’를 새겼습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퀴어 가족구성권의 상징이자 우리 가족을 표현하는) Rainbow Family’를 떡 하니 써 넣었습니다. 혹시 비 오면 젖을까, 스카치 테이프로 덮어씌웠습니다. 내년에도 또 들고 나가려 구요. 그런데 아뿔싸 스펠링이 한 개씩 틀렸지 뭡니까. 아무렴 거리의 시민들과 퀴어들이 찰떡같이 알아듣겠지 하고 다시 만들지 않고 행사장으로 갔어요.
행사 시작 한시간 삼십 분전에 공원에 갔더니 썰렁한 겁니다. 전혀 행사하는 분위기가 아닌 거에요. 혹시나 하고 행사장 주변을 주 욱 둘러보고 물어 보아도 아는 사람이 없더라구요. 시청 홈페이지에 가서 기사를 다시 확인해보니 3개월전에 올린 기사였더라구요. 그래서 아마 변경되었 나보다 하고 마트로 가서 장을 보았어요. 집으로 출발하는 길에 찰스씨가 다시 한번 행사장에 가보자고하여 갔습니다. 이게 왠일이니? 행진이 시작되었더라구요.
필리핀에는 필리핀 타임이 있습니다. 예전 코리안 타임과 같아요. 약속이나 정해진 시간 보다 한참 늦게 만나는 것입니다. 보통 1시간 정도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아뿔싸, 퀴퍼 시간도 한 시간 늦게 시작된 것이지요. 서프라이즈 필리핀 타임 입니다.
기다리고 기다린 이 시간을 놓칠 수 없지요. 무지개 깃발과 피켓을 들고 행진을 했어요. 아이도 신나게 무지개 깃발을 들고 달리고 걸었습니다. 행진 도착지는 볼리발드 해변 공원이었습니다. 부스는 몇개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굿즈를 팔고 타로 점을 봐주고 HIV/AIDS 검사를 해주었습니다. 행사가 늦게 까지 진행될 듯 하여 도시락 세트를 사와 배를 든든하게 채웠습니다.
만국의 성소수자들, 퀴어한 끼를 내뿜다.
행진에 이어 두번째 행사로 드랙쇼가 펼쳐졌습니다. 뭐니뭐니해도 드랙쇼는 퀴어들의 춤과 노래 그리고 퀴어한 액션이 백미지요. 다섯 명의 드랙 언니들이 현란 하고도 아슬아슬한 복장으로 무대를 장식했습니다.
행사 중간 중간에 사회자가 참가자의 소견을 물었어요. 저에게도 마이크를 입에 대어주어 우리가 동성결혼 커플이고 아이를 입양하여 키우고 있는 레인보우 패밀리라고 소개 했더니 모두가 환호성을 질러주었습니다. 저는 전세계에 퀴어들이 있고 오늘 퀴퍼가 너무 신나고 즐겁다는 소감을 답했습니다. 우리 인보도 퀴어 부모의 피를 물려 받은 딸내미 인가 봅니다. 혼인평등과 레인보우패밀리 피켓을 들고 여기 저기 뛰어다니며 사람들에게 보여주더라구요.
어디 갔니 호모포비아 족속들
2016년 마닐라 퀴어퍼레이드에 참가한 적 있었습니다. 수도답게 퀴어 단체도 많고 앨라이 단체도 많이 왔습니다. 행진을 하던 중 두 세명의 호모포비아가 반동성애 피켓을 들고 아주 초라하게 서 있더라구요. 그들을 보자마자 반사적으로 달려가 손가락으로 (동성애를 혐오하고 퀴퍼 꽁무니를 쫓아다니며 단죄하고 저주를 퍼붓는 보수기독교 호모포비아 너희들이나 지옥으로 떨어져! 작렬하게 불타버리라는 퀴어의 분노를 담아) 가운데 손가락을 날려주었습니다.
아 정말이지 속이 시원해지더라구요. 원래 필리핀의 문화는 상대가 싫어도 대놓고 표현하면 안되는 문화가 있어요. 이때 참가한 혐오자들은 상당히 무례한 행동을 한 것이지요. 혐오의 무리가 너무 적어서 그런지 행진하는 퀴어들이 신경을 하나도 안 쓰고 지나가더라구요.
그런데 이곳 두마게티 퀴퍼에는 한명의 혐오자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다행히도 필리핀은 한국처럼 반동성애 보수기독교 세력이 조직화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국민의 80%를 차지하고 있는 카톨릭과 5%의 이슬람교가 동성결혼을 반대하고 있지요. 보이지 않을 뿐 보이지 않는 적이 첩첩 산중 입니다.
성정치: 우리에겐 퀴어의 함성과 구호가 필요하다.
이번 퀴퍼를 참가하고 아쉬운 점이 있었습니다. ‘왜 두마게티 퀴어들은 성소수자 (차별금지법 제정과 동성결혼 법제화 같은) 아젠다를 외치지 않을까?’ 참가자들은 무지개 깃발과 레인보우가 새겨진 옷, 모자, 장신구 등으로 자긍심을 드러냈습니다. 그러나 성소수자의 정치적, 사회적 요구를 담은 피켓이나 선전물 그리고 캠페인 부스 등은 볼 수 없었습니다.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소도시 여서 그럴까요? 아니면 조직화된 퀴어 커뮤니티가 적어서 그럴까요? 추측컨대 아직은 성정치적 토론이나 퀴어 의식화 또는 해방투쟁의 경험이 부족해서 그런 듯 합니다. 앞으로 퀴어 친구들과 부스를 만들어 성정치를 요구하는 선전물을 나눠주고 스티커와 다양한 굿즈를 판매하고 싶어요.
이런 아쉬움 가운데 멋진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다름 아닌 성소수자의 인권을 지지하고 퀴퍼를 축하하기 위해 (두마게티에서 6시간 정도 걸리는 도시) 바콜로드 시티에 있는 필리핀 연합그리스도 교단 (United Church of Christ Philippine, UCCP) 소속의 목사님께서 축복해 준 것입니다. 앨라이 그룹도 함께 참여했더라고요.
가장 멋진 일은 두마게티 시정부가 이 행사를 공식적으로 열고 후원했다는 일 입니다. 시홈페이지에 프라이드먼스를 맞이하여 6월에 퀴어퍼레이드를 연다는 기사를 떡하니 올렸더라구요.
멋진 시의 행정 입니다. 올해 대한민국의 서울시와 대전시가 퀴어문화축제와 행사에 비협조적, 딴지걸기를 한 만행과는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주는 일이지요. 올해 대전에서도 퀴어문화축제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무척 반가웠습니다.
우리들의 사랑이 혐오를 물리칠 때 기존에 열린 퀴퍼 보다도 더 많은 도시에서 무지개 깃발을 휘날리며 행진할 것입니다. 한반도 전체가 무지개로 수 놓일 그날이 오면.
- Sorry Works!는 의료과실을 공개하고 환자와 가족에게 진심 어린 사과하도록 하는 미국의 비영리 단체이다. Sorry Works!는 2005년 Doug Wojcieszak에 의해 설립되었다. Doug는 1998년 의료과실로 형을 잃었으나 병원과 의료진이 실수를 설명하거나 사과도 하지 않아 분노를 경험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2005년부터 병원이 의료사고를 공개하고 유족에게 사과하는 운동을 Sorry Works!라는 이름으로 브랜드화 되었다(Sorry Works홈페이지 https://sorryworks.net/history-and-mission).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