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30. 어디에나 존재한다: 필리핀 퀴어 친구를 소개합니다 1탄
행성인의 오랜 회원인 여기동님이 필리핀에서 안부를 전합니다. 2015년 한국에서 결혼식을 하고 남편의 나라로 가서 살림을 꾸리는 여기동 님은 딸 '인보'를 입양하여 육아일기를 쓰고, 최근에는 성소수자 연구들을 리서치하며 공부에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 |
여기동(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모국에 늦더위가 찾아와 많이들 힘들었다고 들었습니다. 동지들 추석 명절은 잘 보내셨는지요? 저희는 잡채와 파전을 만들어 먹었습니다.
며칠 전 한강 작가님의 노벨 문학상 수상 소식을 듣고 기뻤습니다. 사진에 비친 그녀의 모습과 잔잔한 음성이 무척 인상 깊었습니다. 제 글의 대부분은 혐오와 차별에 맞서 날 선 글이 많은데, 저도 말하고 글을 쓸 때 그녀를 닮고 싶어 졌습니다.
사고 쳤다: 싹둑싹둑(?)
인보는 세 살 하고도 육 개월이 되었습니다. 아이가 점차 크면서 말도 잘하게 되고 행동의 폭도 넓어져 갑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저와 함께 책놀이를 합니다. 동화책을 가져와 많이 많이를 외치며 책을 잔뜩 챙기자고 성화입니다. 동화책의 시작은 늘 “옛날에 옛날에 인보랑 엄마랑 아빠랑 살았어요…”로 시작합니다. 녀석의 흥을 돋우기 위해 성우들 내레이션의 버전으로 (코맹맹이 소리도 내면서) 익살스럽게 읽어 줍니다. 이 녀석은 제 옆에 앉아서 듣지 않고 침대 위를 뛰고 뒹굴면서 듣는 답니다. 그러면서 가끔 동화책에 뭐가 있다 들여다보아요.
한 번은 이 책을 읽어주었어요. 주인공이 학예회를 준비하면서 가위로 잘라 소동이 벌어지는 ‘똑같은 것은 싫어’를 재미나게 읽었지요. 다양성을 담은 이야기라 좋았어요. 이후 인보는 가위만 보면 ‘싹둑싹둑’이라며 손가락으로 가위질 시늉을 냈어요.
그런데 드디어 사고를 쳤습니다. 하루는 귀신같이 가위를 낚아채 방으로 들어가 (엄마 아빠가 자신의 즐거움을 빼앗지 못하도록) 방문을 걸어 잠겄습니다. 나중에 열어보니 가위로 바지를 잘라버렸습니다. 엄마와 아빠의 따라쟁이가 되었습니다.
아이표 달달한 뽀뽀와 허그
책놀이를 마치면 아빠 침대로 갑니다. 아이가 잠자기 전 저는 매일 “우리 인보 많이 많이 사랑해요 내일 또 만나요” 하면서 뽀뽀를 해줍니다. 그런데 이 녀석 어제는 잘 자요 뽀뽀를 마치고 돌아서는 나를 다시 불러대는 겁니다. 가보았더니 엄마 사랑해해주고 싶답니다. 그러더니 저를 껴안고 뽀뽀해 주는 겁니다.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습니다. 아이가 크니 이런 달달함도 주더라고요(남편이 주는 것보다 100배나 달달해요).
행성인에서 만났던 미셸 동지
FTM트랜스젠더 미셸은 필리핀에서 온 이주노동자 친구입니다. 미셸은 행성인 회원이었고 이주노동조합 위원장을 맡기도 했습니다. 자신의 성적지향을 당당하게 커밍아웃하고 위원장으로 당선된 멋진 리더였지요. 하지만 정부에 의해 강제 출국당해서 다시 필리핀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2015년 찰스와 결혼을 하고 이듬해 필리핀으로 이민을 가서 미셸을 다시 만났습니다. 수도 마닐라에 있는 이주노동단체(Migrante International, MI)에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이 단체는 해외로 이주노동을 많이 나갈 수밖에 없는 필리핀의 정치사회경제적 배경으로 이주노동자와 가족을 위해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필리핀 사회의 변혁을 위해 혁명과 무장투쟁을 꿈꾼 트랜스 전사 미셸 동지가 그립습니다.
레이디 니꼴
니꼴은 가사도우미로 일하는 친구였습니다. 트랜스젠더 여성으로 천상 여자 입니다. 화장하고 드레스 입고 하이힐 신는 것을 아주 좋아했습니다. 2016년 니꼴과 함께 처음으로 필리핀 퀴어퍼레이드에 참가했습니다.
이 퀴퍼에서 두 가지 인상적인 장면이 떠올라요. 하나는 반동성애 기독교(개신교) 세력과 친동성애 기독교 그룹이 길가에서 피켓팅을 하더라고요.
친동성애 그룹 친구들은 기독교가 동성애를 혐오해서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캠페인이었습니다. 마음이 참 고운, 고마운 친구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혐오세력은 딱 두 놈(者)인 거예요. ‘엥(?), 이게 뭐야 서울 퀴어문화축제처럼 떼거리로 몰려와야 익사이팅 헌데’. 이들을 보자마자 저는 자동반사적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그 놈들 코 앞에서 가운데 손가락으로 퍼큐를 날려줬어요. 그동안 제가 혐오세력에게 당했던 혐오와 저주를 되갚아주는 심정으로, 통쾌한 미러링으로.
필리핀에서 이 퀴퍼 이후로 8년 만인 올해 두마게티 퀴퍼에 참가할 수 있었답니다. 정말 퀴어들은 대도시에서 살아야 퀴퍼도 참여하고 구경도 할 수 있어요.
트랜스젠더 마담 마이클
이곳 두마게티로 이사 오면서 은행 일을 보러 갔습니다. 담당 직원에게 우리 가족과 가족사를 이야기했어요. 그랬더니 자기도 게이라고 하는 겁니다.
아니, 아니, 정말 맞잖아 ‘우리는 어디에나 존재한다’잖아. 퀴어들은 세상 어디에나 살아가고 있지요. 과거에서부터 현재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쭈욱.
마이클이 어느 날엔 화장을 하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물었더니 사연은 이러했어요.
가톨릭 계열의 학교를 다니면서 힘들었데요. 지금은 부모님과 함께 양성애자 파트너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다행히 양가에서 반대하지 않는데요.
자신의 트랜지션을 위해 본사에 문의를 했데요. 트랜스젠더 인데 화장하고 출근하고 일해도 되는지? 본사에서 OK 했데요. 사실 필리핀은 종교적 배타를 빼면, 사회문화적으로 동성애에 대해 매우 관대한 나라입니다(떡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다음 기회에 이와 같은 한국과 필리핀의 LGBT 통계를 들여다, 따져 보려고 해요).
주류인 가톨릭과 소수 개신교 세력이 동성결혼과 차별금지법을 적극 반대하지요. 하지만 성당 공동체에서 퀴어들은 맹활약합니다. 인보도 생후 1개월 만에 세례식을 했어요. 성당에서 신부님이 우리 커플을 아심에도 흔쾌히 해주셨어요
마이클에게 앞으로의 계획을 물어봤더니 태국에 가서 수술을 받고 싶어 해요. 그러나 수술을 해도 필리핀 법원에서는 성별정정을 해주지 않는다고 해요. 참 부글부글입니다(‘트랜스 여성 제럴딘 로만 Geraldine Roman 필리핀 상원의원이 있는데 그녀는 성별정정을 어떻게 했지?’)
마이클에게 물어봤어요 호칭을 어떻게 해주면 좋겠는지? 대답이 여성으로 호칭해달라고 해서 (여성에게 매우 존칭인) 마담 Madam으로 불러줬어요. 그리고 이름도 (원래 마이클은 가톨릭에서 미카엘인데) 미카엘라로 지으면 좋겠다고 했더니 웃더라고요.
퀴어한 명제: 우리는 세상 모든 곳에 존재한다!
눈에 쉽게 띄지 않는다 해서 없는 것이 아닙니다. 주변에서 내가 성소수자라고 말하지 않는다 해서 없는 것도 아니지요. 눈에 보이지 않도록, 자신이 성소수자라고 커밍아웃하지 못하고 벽장 속에 꼭꼭 숨게 만드는 것은 혐오와 차별입니다. 정말 역겹기 짝이 없는 혐오와 차별은 성소수자를 유령으로 만들어 버리는데 한몫을 하는 주범이지요. 가찬지도 않은 이성애우월주의와 동성애혐오증이 그 중심에서 작동하고요.
나의 필리핀 퀴어 동무들은 각자 자신이 삶과 노동의 터전에서 아름다운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자신뿐 아니라 자신이 속한 지역사회 공동체 안에서 타인과 공동체를 돕고 기여하는 멋진 퀴어로 말이죠.
행성인 동지 여러분,
이제 제법 선선해지는 가을이지요? 환절기에 건강 잘 챙기시고, 마음 넉넉한 가을 보내셔요.
원고를 작성하는 도중 웅 님이 첫눈 이야기를 전해주었어요. “기동형, 잘 지내시나요?! 서울은 벌써 쌀쌀하네요. 설악산은 첫눈이 내렸다고 하고요. ⛄️ 인보도 나중에 눈구경 하면 좋겠다 ㅎㅎ”라고요. 저는 “아하 벌써 눈이 오는구나, 아무렴 인보도 눈 보면 무척 신기해할 거야(항상 덥고 크리스마스 시즌에도 눈이 내리지 않는 필리핀에서 살고 있으니)라고 답했어요. 정말이지 남편과 함께 우리 딸내미 손잡고 모국, 한국, 대한민국에 한번 가보는게 소원 이랍니다.
다음에 필리핀 퀴어친구들 2탄으로, 레즈비언 지아와 영국-필리핀 커플 마틴 형님과 프랭클린 그리고 예전에 우리가 살았던 (찰스의 고향) 민다나오섬 샌프란시스코 퀴어 친구들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