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랜스 추모주간] 당신의 이별은 당신 혼자만의 것이 아니다
하루(행성인 트랜스젠더퀴어인권팀)
우리는 살면서 참 많은 인연을 만나고, 많은 것들을 잊으며, 소중했던 것들을 잃기도 한다. 최근에도 우리는 우리의 벗 중 한 명과 이별을 해야 했고, 그 소식을 들은 날의 충격은 아직도 마음 한 켠에 남아 무겁게 나를 짓누른다. 그는 수없이 많은 족적을 남겼지만, 나는 그가 있었던 자리에 서서 다른 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얼마나 무거운 짐이 그의 어깨 위에 있었는지 느낄 수 있었다. 그가 단 몇 그램의 재가 되기 전에 그의 벅찬 짐들을 함께 나누지 못한 것들이 지금도 너무나 안타까울 뿐이다. 이 자리를 빌어 이연수 활동가의 명복을 빈다.
소수자라는 것
성소수자 당사자로서, 특히 트랜스젠더로서 한국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살면서 많은 이별을 할 각오를 해야만 한다. 준비되지 않은 죽음과 뜻하지 않았던 불화, 그 이외에도 우리의 마음에 큰 흉터를 남기고 누군가를, 또는 어떠한 장소를 떠나야만 하는 계기가 이전의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생기곤 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주어진 삶을 살아가야 하고, 그렇기에 지금의 감정과 생각을 조금이나마 잊을 수 있도록 피난처를 찾아 그것에 매몰되기를 택하기도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당장의 힘듦을 이겨내기 위해 해결하지 못한 감정으로부터 도망치는 자신에게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것이다(물론 그것이 자기파괴적인 행동이 아닌 선에서). 지금의 감정과 힘듦을 잊는 것이 그와의 소중한 시간들까지 잊는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명심하자.
죄책감, 그리고 자신에 대한 혐오의 감정
으레 우리는 타인과의 영원한 이별을 막지 못했다는 이유로 우리는 스스로에게 가혹한 형벌을 내린다. ‘내가 그렇게 말하지 않았더라면’, ‘내가 조금만 더 신경 썼더라면’…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은 자신에 대한 자책이 아닌, 우리가 누군가의 죽음을 목도했고, 그가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었으며, 다른 이들이 같은 어려움으로 힘들어할 때 우리가 손을 내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는가이다. 우리는 모든 상황에 대비할 수 없다. 누군가와의 갑작스러운 이별을 막을 수 없듯,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해 건조하게 받아들이며 다시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스스로에게 다짐하는 것이 필요하다. 혹자는 이런 의연한 태도에 대해 ‘타인의 죽음에 익숙해지는 것’이라 말할 수 있으나, 우리는, … 아니, 적어도 나는 다시금 겪고 싶지 않은 일에 대해 정제된 감정만을 남기고 부단히 노력하는 것이 익숙해질 수도 없고, 익숙할 수도 없는 일에 대한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이야기
성소수자 청소년으로 자라 오면서 나는 숱한 이별을 했다. 그것이 사람 간의 불화로 인한 이별일 때도 있었고, 누군가의 죽음으로 인한 피치 못한 이별일 때도 있었다. 사회적 스트레스에 취약한 나로서는 그 무게를 감당하기 너무나 어려웠다. 나의 잘못으로 인해 누군가를 만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 그 책임이 모두 나에게 있는 것 같았다. 그로 인해 사람이 무서워 피하게 되거나, 최대한 거리를 유지하며 내가 그와 이별하더라도 상처받지 않을 수 있는 방식을 택하는 등 방어적인 태도를 취하게 됐고, 성인이 되어서야 이것이 건강한 인간관계를 유지하기 어려운 방식이라는 걸 깨닫게 됐다.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건강한 인간관계란 무엇인지에 대해 수없이 고민한 끝에 나의 문제는 대부분 반추적 사고(반추적 사고란, 같은 일에 대해 반복적으로 생각을 하는 것을 뜻한다.)에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피상적 의미만을 생각하지 않고, 그 이면에 숨은 뜻을 자꾸 찾으려 하니 상대방이 별 뜻이 없었음에도 지레 겁을 먹게 된다는 걸 알았다. 생각보다 사람들은 별 생각 없이 말을 하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 이별하는 일을 나처럼 무겁게 생각하려 들지 않는다는 걸 인지했을 때, 나는 마음 한 켠에 짊어지고 있던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기분이었다.
물론, 아직도 인간관계에서 오는 허무함과 상처가 되는 말들을 듣는 건 괴롭다. 그럼에도 나는 살아남았고, 이러한 힘듦을 나누고 의지할 안전망을 구축해 두었다. 내가 그들의 도움을 기꺼이 받을 수 있고, 그들 역시 힘들 때 내가 도움을 줄 수 있는 관계를 만들어 둠으로써 나는 내가 안전한 공간을 만들 수 있었고, 소수자성을 가진 우리들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이런 건강한 관계를 많이 만들어 두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런 건강한 관계를 잘 구축해 두었기에 나는 이별을 건조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연습을 할 수 있었고, 그제서야 홀로 설 수 있었다.
마치며
혼자 모든 것을 떠안는다는 것은 결코 건강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을 무겁게 짓누르는 강박이 되기 마련이다. 내가 무너지더라도 함께 나를 일으켜 세워줄 사람들을 곁에 두자.
이별은 때론 너무나 무겁게 다가오곤 한다. 그러나 그 아픔과 힘듦이 나만의 것이 아님을 알고, 함께 나누고 더 많은 이야기를 하자. 당신의 안녕을 바라는 동지들이 언제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