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 에세이] 개의치 마세요 - HIV/AIDS인권주간 행성인 HIV/AIDS인권팀 특별기획 〈중장년 게이/PL 토크쇼 - ‘게이로 나이든다는 것’〉 후기
마루(행성인 HIV/AIDS 인권팀)
어느덧 내년이면 만 나이로 마흔이 된다. 사람의 일생이 ‘리니어’한데 굳이 20대 30대라는 표현을 쓰며 십진법으로 인생을 무 자르듯 숭덩숭덩 나누는 것이 영 마뜩잖지만, 이어져 내려온 관념의 영향을 벗어나기는 쉽지 않다.
나이듦이 유쾌하게 받아들여질 사람은 아마도 없다. 신체가 노쇠해지는 것이 기꺼울 이가 과연 있을까. 알면서도 인정하기 싫고 막을 수 없어도 거부하고 싶다. 그래서 젊을 때에는 나이듦을 생각하지 않는다. 나이듦이란 ‘그 때 가서 어찌저찌 될’ 그 무엇이다.
30대 이하의 게이(이하 ‘젊은 게이’라고 칭한다)들은 40대 이상이 되면 게이로서 잘 팔릴만한 시기는 끝나고 뭔가 무대 뒷편으로 사라지는 것처럼 생각하지 않나.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잘 관리한 40대와는 어찌저찌 가능할(?) 것 같지만 그 이상은 아무래도…라고 생각하지들 않는가.
마흔을 앞두니까 괜히 싱숭생숭해서 평소에는 생각지도 않던 것들을 생각하게 됐다. 확실히 이전보다 체력이 떨어졌다는 게 느껴지고 아랫배도 더 나왔다. 몸과 마음은 서로 연결되어 있으니 정신적인 에너지의 최대 용량도 조금 감소한 것 같다.
서른 살에 행성인 활동을 시작한 이후 모든 인간 관계가 행성인과 직간접적으로 연관되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로 단체 활동은 나의 삶에 큰 영향을 끼쳤다. 한국의 성소수자 인권운동은 90년대 초반 대학생을 중심으로 시작되었는데, 성소수자는 언제나 존재해왔지만 소위 말하는 ‘활동판’의 토대 위에서는 그들이 나의 롤모델이었다. 이제 그들의 나이가 5~60대가 되어간다.
40대의 나는 어떤 방식으로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50대에는? 60대에는? 나이든 게이의 삶에 대해 생각하면서 내 주변에 나보다 나이가 더 많은 지인들에게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 평소에는 연락도 안하고 잘 만나지도 않던 형들에게 요즘엔 조금씩 연락도 하고 만나서 이런저런 사는 이야기도 나눈다.
행성인 HIV/AIDS 인권팀 팀원으로서 이런 고민을 팀 내에서 나누다가 중장년 게이/PL 토크쇼를 기획하게 되었다. 토크쇼 손님으로는 한국HIV/AIDS감염인연합회 KNP+ 손문수 대표를 모시고 KNP+가 걸어온 길, PL공동체 사랑방 이야기, 서로돌봄 사업, 나이듦과 섹스에 대해 질문과 답변 형식으로 이야기 나눴다. 1
감명 받은 주제는 KNP+의 PL공동체 사랑방에 대한 이야기였다. KNP+는 사무실과 함께 있는 주방, 거실, 방 등의 공간을 사랑방이라고 부르는데 우리 사회에서 그리고 소수자인 게이 커뮤니티에서 이중으로 차별을 겪는, 소수자 중의 소수자인 HIV 감염인들이 도움이 되는 정보나 서로의 삶을 나누고 때로는 성적인 이야기도 편하게 나눌 수 있는 곳이 바로 사랑방이다. 이곳에서 감염인들이 함께 모여 식사를 하는 ‘밥상모임’이 큰 의미를 가지기 때문에 사랑방에 찾아오는 이들을 ‘식구’라고 부른다. 동료 감염인이 함께 모여 산과 바다로 힐링캠프도 떠나고 연사를 초청하여 강연을 열기도 한다.
또한 KNP+는 의료와 돌봄의 사각지대에 놓인 HIV감염인들이 지역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감염인이 감염인에게'를 모토로 2022년부터 서로돌봄 사업도 진행하고 있다. 10여 명의 돌봄활동가가 방문 돌봄 및 병원 동행, 먹거리와 물품 지원, 의료비와 주거비 지원, 심리 상담 등을 하고 있다. 2
나도 행성인 활동가 또는 행성인을 통해서 알게된 지인, SNS로 알게 된 지인들이 있고 그들을 만나 취미 활동이나 정보를 나누거나 섹스 이야기를 하고 때로는 천박한 성적인 농담도 주고 받는다. 하지만 뭔가 동질성이나 연대감에서 PL사랑방의 끈끈함에는 비할 바가 못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감염인 차별과 혐오에 맞서 서로를 지지하고 돌보기 위해 만들어진 모임과 비감염인의 모임을 비교하면 분명한 차이가 있겠지만 나이가 들수록 신체적, 정신적, 경제적으로 더 나아지기 보다는 점점 취약해져 갈 확률이 훨씬 높다는 점은 같기 때문에 차별받는 성소수자들에게 최소한의 지지와 버팀목이 될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로돌봄 사업을 참고하면 논의를 시작하는데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준비와 호응이 충분히 모인다면 장래에는 퀴어 협동조합이나 공제조합을 만들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토크쇼 후반부는 만남, 관계, 섹스라는 키워드를 주제로 진행했다. 개인적으로 가장 궁금했던 내용이었는데 토크쇼에 온 청중들의 관심 또한 집중되었다.
나는 중장년 게이들이 어디에서 어떤 방법으로 새로운 누군가를 만나거나 알게 되는지 매우 궁금했다. 나는 데이팅 앱을 거의 이용하지 않지만 젊은 게이들이 새로운 사람을 만나거나 알게 되는 경로에는 데이팅 앱이나 SNS의 비중이 매우 큰 것으로 보인다. 주로 온라인 채널이다. 40대나 50대 이상은 이러한 온라인 채널에서의 존재감이 급격히 줄어든다. 마치 없는 존재처럼 느껴질 정도로.
손문수 대표는 신당동, 충무로, 종로 등 7~80년대 이후 게이들이 주로 만남을 갖거나 크루징을 하던 장소의 역사를 개별 극장이나 업소 이름과 함께 자세하게 구술했다. 듣는 내내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도로 대단히 재미있고 흥미로웠다. 청중들 중에서는 이러한 역사를 조사하거나 기록하는 것에 흥미가 있는 이가 손문수 대표에게 추후 별도의 인터뷰를 요청하는 일까지 있을 정도였다. 물론 과거의 역사 외에도 현재 시점에서 중장년과 노년의 게이들이 발걸음하는 곳에 대한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아마도 그러지 않을까? 하고 미리 조금은 예상했지만 중장년 게이들은 주로 해당 나이대가 방문하는 술집에서 다른 사람을 만나게 된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술집 뿐만 아니라 사우나에서 육체적인 관계를 맺는 중년들 또한 많다는 것도.
토크쇼 말미에 마지막 질문으로 ‘먼저 나이든 사람으로서 하고 싶은 당부나 제안’이 있는지 여쭤보았다. 이 질문을 너무 하고 싶었다. 그냥 단지 “젊을 때 많이 즐겨둬라”와 같은 짧은 한마디라도 좋다고 생각했다. 그만큼 간절했다. 나보다 더 나이든 게이의 조언이.
손문수 대표의 답변은 내가 예상한 평범한 답변과 달랐다. 너무나 소중하고 뼈 있는 조언이었다. 그것은 “젊을 때 많이 즐겨둬라”류의 답변이 아니었다. 그는 “나이를 의식하지 말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라”고 조언했다.
그렇다. 숫자로서의 나이도 그렇거니와 나이를 먹을수록 점점 노화되는 얼굴, 대체로 사람들에게 매력있다고 평해지는 기준에서 점점 멀어져만 가는 신체의 외양으로 인해 자신감이 떨어져 가는 것을 느끼고 있던 터다. 단지 누군가를 만나는 것 뿐만 아니라, 무언가를 시도하거나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것을 포함한 삶의 행위 전반에서 나이듦은 자신감을 감소시킨다. 손 대표는 그것을 지적한 것이다.
행사를 모두 마친 후 같은 장소에서 간단한 먹거리 및 주류와 함께 바로 이어질 뒷풀이를 시작하려던 찰나에 손문수 대표는 중장년 게이/PL 토크쇼 후기인 나의 이 글 제목이 된, 마치 나이든 게이로서 하고 싶은 조언을 짧은 문장으로 농축시킨 것과 같은 한마디를 외쳤다.
“개의치 마세요!”
- ‘PL’은 ‘People Living with HIV/AIDS’를 줄인 말로, 직역하면 ‘HIV/AIDS와 함께 사는 사람’이란 뜻이다. [본문으로]
- 참고: 사단법인 함께서봄 https://knpplus.org/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