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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코넛의 눈코입귀] 춤을 추며 절망이랑 싸울 거야 - 비애국 성소수자의 독백

행성인 2025. 4. 19. 13:48

 

코코넛(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

 

 

사진: 류민희@minhee_ryu

 

이 글을 쓰기 시작한 날부터 정확히 11년 하고도 하루가 모자란 날, 2014417일 아침. 당시 중학교 2학년이었던 나는 평소와 같이 학교에 갈 준비를 하면서 집 앞에 배송된 일간지의 헤드라인을 훑어보고 있었다. 대형 여객선이 침몰해서 여러 명이 구조되었다는 내용의 기사가 크게 보도된 것 같았다. 모르는 사람들이 구조선을 타든 말든, 당장 학교에서 애들이랑 무슨 딴짓을 하고 놀지, 학교 끝나고 자기 전까지 풀어야 할 문제집 양이 얼마나 많을지가 더 중요했던 시절, 대한민국의 나름 선진적인 인명 구조 시스템이 어련히 일을 잘하겠거니 대수롭지 않게 기사를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고 학교로 향했다. 그 이후로 며칠, 몇 주, 몇 달이 지나서까지 사람들이 기사 속 여객선 이야기를 하고, 삼백 명 가까이 되는 사람들이 죽었다고 말하고, 내가 다니던 중학교를 포함한 전국 수많은 학교가 수학여행을 취소하고 나서야 심각한 일임을 지각하기 시작했다. 당장 내 눈앞에 닥친 내 불행한 생활이 전혀 모르는 사람들의 운명보다 더 중요했던 나는 여객선 참사가 당위적으로 애도해야 하는 것, 비통한 심정과 숙연함을 드러내야 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렇게 11년이 흘렀다.

 

20221029일 밤, 집 근처 자주 가는 비건 프렌들리 겸 퀴어 프렌들리 술집에서 알바를 하고 있었다. 기나긴 디나이얼 시기를 끝내고 퀴어 커뮤니티에 나올 때까지 약 8개월 정도가 남은 시점이었다. 할로윈 직전 주말이었는데 딱히 할로윈에 놀러 갈 일도, 같이 놀러 갈 친구들이나 애인도 없던 나는 아무도 찾지 않는 일상을 한탄하며 술잔을 닦고 안주를 만들고 있었다. 잠깐 짬이 나서 담배를 피우며 습관처럼 네이버 뉴스를 보는데 이태원에 인파가 많이 몰린다는 소식이 보였다. 할로윈이니까 그러려니, 하면서 놀러 나가지 않은 것이 잘한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당시에 이태원은 비건 식당 가려고 한두 번 정도밖에 가보지 않은 상태였다. 그곳의 지리가 어떻고, 어떤 특성이 있고, 그런 것은 인식 밖의 것들이었다. 계속 일을 하는데 아빠에게서 전화가 왔다. 이태원에서 사망자가 나온다는 뉴스를 봤다고, 혹시 어디 놀러 나가서 다치지는 않았는지 걱정해서 전화했다고 했다. 일하는 중인데 이태원은 무슨 이태원이냐고, 괜찮다고 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아무리 서울을 포함한 수도권의 인구 포화가 심각하다고 해도 무슨 사람이 깔려 죽기까지나 하는지, 잠깐 생각했다. 그러고 나서 1년 동안 애도가 이어지고, 2023년까지 전국의 여러 술집과 클럽에서는 할로윈 행사를 하지 않을 때가 되어서야 이태원에서의 그 사건이 그냥 넘길 일이, 단순한 사고사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렇게 2년 반이 흘렀다.

 

그 사이에 나는, 강요된 시스젠더 헤테로 규범에 평생 맞추며 사는 것은 불가능함을 인정하고 드디어 퀴어 커뮤니티에 나왔다. 연애를 시작했고, 이별을 경험했고, 다양한 정체성과 지향성의 퀴어 친구들을 만났고, 행성인을 포함한 여러 단체에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성소수자 인권단체와 퀴어 커뮤니티에서는 세월호를, 이태원 참사를 항상 추모하고 기억하고 있었다. 고등학생 때 진보 의제라고만 대충 알고 지나갔던 세월호의 진상에 대한 규명을 요구하는 성소수자들이 무지개와 노란 리본을 달고 광장에 나서고 있었다. 함께 노란 리본을 달고 나선 장애인들과 노동자들과 연대하고 있었다. 이태원의 게이 클럽들을 자주 다니며 이태원의 지리와 특성을 알게 되었다. 이태원 참사가 일어난 그 골목이 얼마나 사람들이 몰리기 취약한 곳인지 느꼈다. 참사의 희생자 중에 퀴어 당사자도 있었을 수 있으며 그들이 내 지인들의 친구들일 수도 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렇지 않더라도 그곳에서의 죽음이 왜 진심으로 분노할 만한 일인지 알고 분노하기 시작했다. 이태원을 마음의 고향 내지는 아지트로 삼는 수많은 성소수자들이 이태원 참사의 진실을 규명하고 책임을 똑바로 지라고, 광장에 나와서 요구하고 있었다.


그렇게 2024123일 밤, 이태원 참사의 책임을 제대로 지고 진상을 규명하기를 거부한, 애초에 그런 참사가 일어나게 놔둔 정권의 최고 권력자인 윤석열이 계엄을 선포하며 탐욕스럽게 권력을 평생 독점하려 시도했다. 선관위 직원들과 국회의원들과 시민들 앞에 군인들이 서고, 무장하지 않은 사람들을 향해 총을 겨눴다. 새벽에 국회 앞에서, 그 후로 네 달 동안 광장에서 윤석열을 저지한 이들 중에는 나도 끼어 있었다. 저항의 액션을 보여야 한다는 당위성 때문이 아니었다. 진심으로 분노했고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세월호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기 거부했던 정권의 최고 권력자였던 박근혜를 시민들이 끌어내린 것처럼, 윤석열도 그렇게 시민들이 끌어내렸다. 나도 수많은 시민들과 함께 한국에 사는 성소수자의 한 사람으로, 하고 싶은 일을 했다. 무지개 깃발을 들었고, 시민들에게 무지개 피켓과 깃발을 나눠주었고, 발언대에 올라 성소수자로서의 나를 드러냈다.

 

우리는 흔히 국가적 재난 앞에서 무력감과 두려움, 불안감을 느끼곤 한다. 그런데 그런 감정을 느끼지 않는 방법이 있기는 하다. 바로 20144월과 202210월의 나처럼, 그런 재난들이 직접적으로 겨냥하지 않는 이상 세상의 수많은 고난들 중 또 다른 하나의 안타까운 일로 넘기고, 타자화하고, 그렇게 일상을 충실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어쩌면 성소수자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누군가가 그렇게 한다고 해서 쉽사리 비난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성소수자가 국가적 위기에 왜 신경을 써야 하는가? 국가와 사회가 우리에게 준 것이 무엇이길래? 스스로의 일상과 안위를 챙기기에도 차고 넘치도록 바쁜 성소수자들이, 본인들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지도 않은 무언가에 굳이 예민하게 반응할 필요가 있는가? 솔직히 말해서 성소수자들 중에 소위 '애국자'라고 불릴 만한 사람이 얼마나 된다고, 국가적 재난이 찾아올 때마다 우리는 누구보다도 먼저 달려나가는가?

 

얼마 전에 이 질문을 진지하게 곱씹어 볼 기회가 생겼다. 올해 초, 윤석열이 탄핵되기 전이고 한창 윤석열 퇴진 성소수자 공동행동 소속으로 집회에 나가며 무지개존을 꾸리던 때였다. 대충 5~6년 전에 연락이 끊긴, 오프라인으로는 단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지인에게 인스타그램으로 연락이 왔다. 당시 나의 인스타그램 스토리와 게시글은 광장에 무지개 깃발과 피켓을 들고 나가는 나와 내 동료들의 사진으로 도배되어 있었다. 지인은 성소수자 정체성을 가지고 광장에 적극적으로 나가는 내가 대단해 보인다고 말하며, 123일 국회 앞으로 달려나간 걸 보고 '애국자'라고, 애국자들이 스스로 애국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 것 같더라고 말했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내가 애국자가 아니라는 사실은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있었으며, 나를 포함해 계엄 선포의 밤에 국회 앞에 나온 사람들 중 '애국자'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도 한둘이 아닐 것이다. 심지어 계엄 해제가 국회에서 의결되고 군인들이 어느 정도 철수한 이후에 국회 앞으로 나갔으니, 더더욱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애국자'가 아닌데도 국회 앞으로, 광화문과 한강진과 남태령으로 달려나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애국자 정체성을 가지지 않을 이유는 차고 넘친다. 나라가 우리에게 뭐라도 해준 게 있어야 스스로 애국자라고 생각하지 않겠는가? F. 케네디는 '조국이 당신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묻지 말고, 당신이 조국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자문하라'고 말했다지만, 한 개인이나 성소수자 커뮤니티보다 훨씬 더 방대하고 많은 권력과 자원을 가진 국가가 먼저 그 정치와 법의 영향을 받는 시민들을 먼저 돌보는 게 맞지 않겠는가? 나라에게서 자신의 모습대로 살아갈 권리도, 사랑하는 사람과 가족을 꾸리고 살 선택권도, 낙인찍히지 않을 권리도, 그 무엇도 받아본 적이 없는 성소수자들이 국가에게 부채 의식이나 애정을 갖고 있을 리 만무하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난 네 달 동안 광장에서 윤석열 퇴진과 민주주의 수호를 외친 이유, 국가적 재난이 닥칠 때에 광장으로 뛰어나가고 예민하게 반응하는 이유가 애국심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국가에 대한 애정이 없어도, 자신을 지키고 내가 아끼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광장에 나설 수 있는 사람들이 성소수자가 아닌가 싶다. 또한 재난과 같은 상황을, 비극을 겪는다는 것이 무슨 느낌인지 잘 안다면 우리도 국가의 민주주의를 지킬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애국자라는 '과찬'을 해준 지인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 광장에 뛰쳐나오는 성소수자들 중에는 아마 애국자와 거리가 먼 사람들이 꽤 많을 것이다. 하지만 직접적으로 우리와 상관없는 투쟁의 현장에서도 비극에 대한 감각에 공감할 수 있기에, 나라를 지키는 데에는 딱히 관심이 없더라도 스스로를 지키는 데에는 관심이 있을 수 있기에 광장에 나오는 것이 아닐까. 세월호 참사와 같이 부실한 시스템에 의해 목숨이나 안위를 위협받고, 국가에 마땅히 져야 할 책임을 외면받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는 알고 있다. 많은 성소수자들이 마음의 고향이자 아지트로 삼는 이태원에서 사람들이 생명을 잃는 일이 일어나고, 마찬가지로 권력과 책임이 있는 사람들이 그 책임을 서로 떠넘기기에 바쁘다면, 우리는 성소수자를 위한 정책을 제정할 책임을 모른 척하고, '나중에'로 밀어 버리는 그 사람들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전세계적인 감염병으로 커뮤니티가 얼굴을 마주하고 만나지 못할 때, 우리는 단절되고 외롭다는 감각을 항상 가지고 살아가는 성소수자로서의 정체성을 다시 상기한다. 이태원의 게이 업소에서 집단 감염이 일어나 성소수자에 대한 대규모 혐오가 수면 위로 떠오를 때, 우리는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더라도 한국 사회에서 항상 느껴지는 그 성소수자 혐오를 피부로 느낀다. 국가 원수가 계엄을 선포하고 시민들의 자유를 앗아가려 했을 때, 우리는 성소수자와 여성을 포함한 소수자에 대한 혐오에 앞장선 대통령에 의해 항상 탄압받았던 그 경험을 다시 한번 꺼내든다. 계엄은 2024123일에 갑자기 생겨난 일이 아니고, 차별금지법과 성별정정볍과 혼인평등이 제정되지 않은 사회에서 항상 겪는 일이다. 스스로를 숨기도록 강요받는 것은 우리에게 익숙한 감각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소수자로서의 정체성을 인정하고 성소수자 단체들에서 활동을 시작한 나는 이전과 달리 도저히 국가적 재난을 타자화할 수 없다. 이것이 남의 일이 아닌 것을 알기 때문에,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와 탄압이 여러 재난들과 다른 투쟁들과 연결된 것을 너무도 잘 알게 되었기 때문에 동료들과 친구들과 광장에 나선다. 국가가 우리를 외면하고 존재를 지우려 한다 해도, 수많은 투쟁들과 연대하고 비극에 공감하는 것이 스스로의 존재를 받아들이고 나와 내 친구들을 지키는 행동의 연장선인 것 같다.

 

두시반 회의와 다섯시 집회를 앞둔 어느날

 

윤석열은 파면되었지만, 내란에 동조한 위헌정당은 아직 남아서 다음 대통령을 선출하기 위한 경선의 과정을 거치고 있다. 대통령 선거 출마를 선언한 많은 정치인들 중에는 성소수자들을 위한 정책을 공약으로 내건 사람들이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 사회에 있는 성소수자 혐오는 아직 건재하다. 대학가를 비롯한 청년 커뮤니티에도 성소수자를 비롯한 소수자 혐오에 기반한 백래시가 우후죽순으로 일어나고 있다. 세월호 참사와 이태원 참사의 진상은 아직 규명되지 않았다. 고공 투쟁을 이어가는 동지들은 아직도 외로운 싸움을 이어 나가고 있다. 장애인의 평등한 이동권은 아직도 서울시와 국가, 경찰에 의해 철저히 무시당하고 탄압당하고 있다. 우리에게 있어서 국가적 재난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계엄은 아직 진행되고 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솔직히 확신이 없고, 투쟁과 연대를 이어 나가는 중에도 불안하기도 하다. 성소수자들에게 있어서 단절된 기분과 추모는 익숙한 감각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앞으로 찾아올지 모르는 비극을 마주하며 우리의 방식대로, 내가 요새 즐겨 듣기 시작한 노래 가사처럼 춤을 추며 절망이랑 싸우는, 그런 삶을 이어나갈 것 같다. 국가가 너무 좋아서, 국가의 민주주의에 대한 애정이 너무 커서는 절대 아니다. 그런 싸움이 스스로를 긍정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