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 기고] 난 레즈야, 하지만 레즈가 싫어.
자사호(웹소설 작가)
우리는 제한된 경험 안에서 살아가기에 이야기라는 것을 발명했습니다. 책장을 펼치는 순간 독자는 전혀 다른 삶을 삽니다. 첫 페이지로 되돌아가 몇 번이고 반복할 수 있죠. 고작 한 세기 남짓 사는 인류가 영생 비슷한 걸 누릴 꼼수입니다.
그러니 상상해 봅시다. 2005년생 여성 김서연, 이것이 지금 당신에게 주어진 새로운 삶입니다.
서연의 어머니는 작은 손을 잡은 채 땀을 흘립니다. 서연을 데리고 편히 쉴 만한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굳이 '노키즈존' 팻말이 없어도 어머니는 주위의 눈치를 살핍니다. 아이의 투정을 이해하기엔 다른 사람들이 너무 지쳐 있기 때문이죠. “에이, 씨.”, “시끄럽게…” 등의 비난을 익히 들어온 자신은 그렇다 쳐도 서연이 상처받을까 봐 두려울 뿐입니다. 우레탄 바닥이 깔린 놀이터도 텅 비어 있습니다. 결국 서연이 놀 수 있는 곳은 키즈카페뿐입니다. 대단지 아파트 중심의 신도시 상가에 있는 키즈카페 말이죠. 다행히 서연의 어머니는 이용료를 지불할 여유가 있지만, 언제까지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가끔 서연에게 스마트폰을 쥐어줍니다. 서연이 처음 접한 빛이자 선생님, 친구, 온전하고 성스러운 법전이 바로 이 작은 기기입니다. 작고 답답했던 키즈폰은 어느새 엄마의 것과 같은 스마트폰으로 바뀝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화면 속 세상이 서연을 몰아붙입니다. 서연의 얼굴이 문제랍니다. 중안부가 길며 모공이 넓고 뚱뚱한 꼬막눈 여자애라 비웃습니다. 돈 들여 고치지 않으면 친구들에게 얕보이고 평생 사랑받을 수 없다고 속삭입니다. 고치려니 집에 돈이 없는 것도 문제입니다. '사랑받고 자란 티 나는 애들 좀 보라'며 딸에게 헬스장과 피부과, 필라테스를 끊어주지 않는 엄마는 과연 딸을 사랑하는 것이 맞냐고 조롱합니다.
세상은 같은 반 남자아이들이 이상한 말을 한다고 꼬집는 동시에 그 남자애들이 더욱 이상해지도록 부추깁니다. 남자애들이 이상해지는 이유가 한국 탓이라고 합니다. 한국 같은 곳에서 왜 태어났냐며 이민을 권유합니다. 그러다가도 아예 지구가 망했으니 탈출할 곳이 없다며 말을 뒤집습니다.
서연은 점점 심약해집니다. 용돈으로 탕후루와 마라탕을 사 먹고, 쾌적한 스터디 카페에서 공부하며, 친구들과 편의점에서 간식을 나눠 먹는데도 마음은 공허합니다. 속이 썩어 문드러지는데 엄마에게는 도저히 말할 수 없습니다. 엄마가 이해할 리 없다고 생각합니다. 설상가상으로 서연은 레즈비언입니다. 자연스러운 계기로 알게 되었습니다. 서연은 첫 커밍아웃을 엄마나 친구가 아닌 화면 속 익명의 공간에 털어놓습니다. 서연과 같은 생각을 하는 또래들이 모인 곳을 찾은 것입니다.
보통 사랑은 사람을 더 나은 인간으로 만들죠. 하지만 서연은 타인을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을까요? 서연은 여자를 사랑하면서도 정작 여자와 연애해 본 적이 없습니다. 자신을 지나치게 미워하기 때문입니다. 살을 빼야 하고 화장이 서툴며 예쁘지도 않다고 생각합니다. 용기를 쥐어짜 오프라인 모임에 나가도 실망할 뿐입니다. 서연 본인도 타인에게 실망을 주겠죠. 애매하고 수치스러운 경험들은 서연의 마음을 더욱 흉악하게 구겨버립니다. 그런데도 서연은 어떻게든 관계를 맺고 싶어 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X(트위터)에서 편하게 덕질하는 친구들과 놀기도 껄끄럽습니다. 서연은 사진과 짧은 게시글 몇 줄로 그들을 가늠합니다.
‘와, 저런 얼굴로 당당하게 셀카를 올려? 플텍계 아녔으면 조리돌려졌겠다.’
타인을 평가할 때의 잣대는 반드시 자신에게도 향하게 되어있기에 서연은 남을 깔보면서도 우울해합니다. 결국 맘편히 놀 수 없던 서연은 "친목 금지"며 유저 닉네임이 'ㅇ갤러'로 통일된 사이트로 향했습니다.
'여기선 오프 모임을 할 수 없어.'
'할 수 없으니 안 하는 거야. 내게 하자가 있어서 못 하는 게 아니라고.'
순서를 뒤집어서 생각하는 게 서연에게 작은 위안을 줍니다.
하지만 서연이 도착한 곳도 결국 마음을 온전히 의탁할 수 있는 곳은 아녔죠. 가장 예민한 시기에 서연을 둘러싼 모든 것이 서연을 공격하려 노리는 것 같습니다. 서연의 인터넷 친구들 또한 그렇게 느낍니다. 서연과 그들은 서로의 생각을 주고받으며 편견을 강화합니다. 예를 들어, 그들이 공유하는 글에는 "국내 여대 게시판에 성중립 화장실을 찬성하는 글이 올라왔는데, 여성을 혐오하는 성향의 퀴어 커뮤니티에서 좌표를 찍고 조직적으로 여론전을 펼쳤다"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사실 여부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역시 저들은 우리를 음해하려 한다'라는 댓글이 주를 이었습니다. 다른 글에서는 "게이들은 여자를 '뽈록이'(가슴이 뽈록 나왔다는 비하어)로 부르며 여성혐오적 언행을 일삼는다. 게이의 인권을 지지하는 것은 여성의 인권을 깎아먹는 것과 다름없다"는 주장이 확산되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트랜스젠더 여성의 여성 스포츠 경기 참여는 여성의 권리를 침해하는 행위이며, 생물학적 여성의 자리를 빼앗는 것이다"라는 주장을 공유하며 '정의로운' 행동에 동참할 것을 독려하기도 했습니다.
서연은 자극적인 정보를 접하며 생각을 굳힙니다. 여성을 보호하지 못하는 기존의 ‘퀴어’들과 연대할 수 없다며 마음의 문을 닫아버린 것입니다. 서연보다 앞서 태어난 레즈비언들은 쿨하거나 저항적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어른들은 "모든 소수자는 연대해야 한다", "젠더 이분법적 사고를 벗어나야 한다", "혐오는 혐오를 낳을 뿐이다"와 같은 원론적인 '선한 말'들을 쏟아냈습니다. 하지만 서연의 눈에는 그들의 말이 현실의 고통을 외면하고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무책임한 방관으로 보였습니다. 그들의 커뮤니티에서 성폭력 사건이 터지는데 해결된 것이 없다고 합니다. 레즈비언이라면서 코르셋을 찬 "여자"들만 좋아한다고 비난합니다. 자기들끼리 '티부'가 어쩌고 '티부사랑단'이 저쩌고 싸워댑니다. 서연과 친구들은 기존 퀴어 커뮤니티가 자신들의 목소리를 담아내지 못하고 갈등만 심화시킨다고 여기며 '실패한 어른들'로 규정합니다. 그러한 인식 하에 “스까/장미우산/포주는 닥쳐라!”며 격양된 목소리로 타인을 멸칭에 가둔 뒤 의견을 묵살합니다. 이는 단순히 어른들을 향한 분노를 넘어 기존 퀴어 커뮤니티가 자신들의 기대와는 다르다는 깊은 실망감과 그로 인한 좌절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어른들의 '선한 말'이 현실의 문제 해결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무력감을 느낍니다.
어른들은 서연의 가시 돋친 말을 무시하거나 오히려 화를 냅니다. 물론 차분하게 대화를 시도한 어른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닿지 않습니다. 서연은 태어날 때부터 검열 없이 비교 문화에 노출되어 온 세상이 자신을 끊임없이 평가하고 부족함을 꼬집는다고 느꼈습니다. '도와달라'고 말해야 한다는 것 조차 자각하지 못했습니다. 보호받을 수 있는 관계의 존재 자체를 인지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죠. 어쩌면 보호받을 기회가 있었을지 모르지만 구분할 수 없었습니다. 서연에게는 그 모든 것이 자신을 고립시키고 판단하는 세상의 일부니까요. "괜찮아. 별일 아냐. 네 생각처럼 세상이 그렇게 위험하지 않다니까?"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서연의 법적 보호자가 아닙니다. 서연이 그 말을 믿고 한 발짝 나섰을 때 피해를 당하면 아무도 자신을 구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지만, 최악을 상상하는 데엔 도가 텄습니다. 이러한 불신은 단지 개인의 피해 의식이 아닙니다. 실제 사회에서 소수자들이 겪는 차별과 배제, 방관을 학습한 것입니다. '세상은 안전하다'라는 말은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합니다.
"넌 왜 이상한 음모론을 믿어?" 서연도 어렴풋이 알 뿐입니다. 알기 때문에 믿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은 선과 악으로 나눌 수 없는 진흙탕 그 자체이고 우리는 미꾸라지일 뿐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하지만 그걸 인정한다면 서연은 '진짜' 세상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엉망진창인 세계에서 부딪히며 자신을 관철해야 합니다. 그 과정에서 얻어맞거나 때리거나 상처를 입어야 합니다. 피해자가 되거나 가해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저지른 잘못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서연은 그러기 싫습니다. 안락한 알껍데기 속에서 꿈꾸는 호사를 누리고 싶을 뿐입니다. 아직 덜 자랐으니까, 세상이 '미성숙하고 연약한 존재'로 자신을 규정하며 끊임없이 몰아세우는 듯 느꼈기 때문입니다. 서서연이 쌓은 편견은 서연을 다정하게 안아줍니다. '저들은 나쁘고 너만 착해.' 서연 홀로 불쌍하며 모든 위로를 받을 자격이 서연에게 있다고 말합니다.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서연 나름의 방어기제인 것입니다. 이러한 자기 연민과 집단적 편견은 서연에게 일시적인 '안전한 위안'을 제공합니다. 하지만 이는 동시에 현실 세계에 부딪히며 성장할 기회를 회피하게 만드는 요인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미성숙한 자아와 불안정한 환경이 결합하여 나타나는 모습은 요즘 청(소)년들 사이에서 적지 않게 관찰되는 심리 기제이기도 합니다.
이제 독자들은 그녀의 눈을 빌린 후 복잡한 균열을 직시하게 되었습니다. 앙금의 테두리를 따라가다 보니 새로운 길에 올라타게 됩니다. 어쩌면 서연이, 또는 독자들 또한 그토록 걷고 싶던 곳이죠. 그 길의 이름은 대화입니다.
대화하기 위해선 상대의 이야기를 아는 게 중요하죠. 생각해보니 ‘대화하다’와 ‘얘기하다’가 비슷한 뜻으로 쓰이는 게 의미심장하지 않나요?
현재 X뿐 아니라 여초 커뮤니티의 주된 담론은 퀴어를 배척하는 것입니다. 저는 '김서연'이라는 가상의 인물을 통해 그 정서가 개인의 일탈이 아니라 현 사회의 현상임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그러려면 먼저 그들의 감정과 경험을 이해해야 합니다. 단순히 '어리석다'라고 치부할 것이 아니라 왜 그들이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그 배경에 깔린 사회적 맥락과 개인적 상처를 들여다봐야 합니다.
물론 당연히 '맞기만 하고 반격하지 말라'는 주장을 하는 건 아닙니다. 이야기를 들어주고, 이해하며, 그럼에도 그 발언이 남에게 상처를 주니 하지 말라고 단호하게 선을 그어야 합니다. 지치겠지만 같은 방식의 노력을 거듭해야 합니다.
거친 말을 쏟아내는 익명의 계정들도 이 질문 하나에 마음을 여는 것을 자주 보았습니다.
우리는 사람이기에 타인의 이야기에 공감할 수 있습니다. 이제 당신의 적이 어떤 이야기를 가지고 있을지 들어봅시다. 우리 또한 들려줄 이야기가 있으니까요.